함께 했던 짧은 시간을 뒤돌아 볼 겨를도 없이 2012년 1월 1일 새벽 그가 떠났다.

사고 순간 옆자리에 앉아 그의 마지막을 무기력하게 지켜봤다.

가슴이 먹먹해 견디기 힘들고 머리는 멍해져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를 대성리에 묻고 돌아 와서도 현실 감각이 돌아오지 않는다.

이건 그가 원하지 않을 일이다. 차분하게 그를 회상하며 정신을 차리려 한다.

1987년에 나는 대학교 1학년이었고, 6월 항쟁을 거치며 91년부터 사노맹에서 활동했다. 이후 소련 해체와 국가 탄압으로 92년 조직이 와해된 후 17년 동안 개인으로 살았다.

그는 92년 와해된 사노맹 조직원들이 재건한 전학련 주요 활동가로, 그리고 IS그룹과 다함께로 이어지며 혁명적 사회주의자의 길을 걸어 왔다.

엇갈렸던 인연은 내가 17년만에 집회에 참가한 2008년 청계광장 촛불집회에서 다함께의 한 열정적 신문판매원에게 “맞불”을 구입하면서 이어졌다.

그를 만난 3년 7개 월은 짧지만 밀도 높은 시간이었다.

그의 정치적 기여로 나는 17년간 내 삶을 덮고 있던 자본주의의 온갖 오물을 씻어 내고 사회주의자로 다시 설 수 있었다.

그는 원칙에 있어 결코 물러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패널로 참가한 참여당 통합 관련 토론회에서 그는 날선 발언으로 통합 찬성 측을 논박했는데 어찌나 서슬 푸르던지 베어야 할 곳을 베기 전에는 칼을 거두지 않는 무사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회원들을 대할 때는 혹 덜 여문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을까 항상 노심초사 했다. 회원들과 밤 세워 토론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다 던질 줄 알았다. 언제나 상대를 배려하며 기다릴 줄 알았으며 그 속에서 사람들을 견인하려 했던 사람. 그 때문에 그는 민주노동당과 관련한 전술 전환 후 선거 개입과 관련한 논쟁에서 몇몇 회원들의 과도한 비판에 처하기도 했으며 그가 그 일로 아파할 때 내가 그를 방어하지 못했던 것을 그가 몹시 섭섭해 했는데 나는 끝내 그것에 대해 사과하지 못했다.

원칙과 신념을 지켜냈던 그였지만 그의 일상은 때때로 자본주의가 가하는 억압과 소외의 반향에 시달려야 했다. 그에게 생계를 위한 과외는 고역이었다. 주로 저녁시간에 과외를 하고 자정 넘은 시간에야 여가를 보낼 수 있었던 그는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글을 쓰거나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다 아침 무렵에야 잠들어 오후에 깨어나는 것이 생활이 돼 오전 활동 일정이 있을 경우 잠을 자지 않고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간혹 잠이 들면 깨어나지 못하는 바람에 규율에 문제가 생기기도 해 그런 경우 그는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사기저하로 이어지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일이고 최근의 그는 “조직의 이완을 담당하는 조성민입니다”라는 유머를 구사할 정도로 강해졌으며 이제는 다 극복했다며 자신감 있는 눈빛으로 말한 것이 불과 며칠 전이었는데.

그는 술과 토론과 음악을 좋아했다. 매년 함께 갔던 자라섬 재즈 패스티벌을 우리는 연중 축제로 설레임 속에서 맞이했다. 그는 아프리카 재즈 뮤지션의 노래를 그럴듯하게 맑스주의 언어로 번역해 우리를 숨넘어가게 하곤 했다. 그는 수천 장의 음악CD와 해박한 음악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자라섬에서 만난 자페즈 회원들과 밤새 음악을 주제로 대화하기도 했다. 그의 미니홈피 대문에 걸려있는 눈을 감은 채 레드제플린의 음악에 젖어있는 사진은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의 적절한 표현이다.

그의 반려견 로자에 대한 사랑은 깊고 컸다. 자라섬까지 데려가 재즈를 들려주었고 눈썰매를 탈 때도 동해바다에서 스노쿨링을 할 때도 그는 로자와 함께 했다. 로자와 소통하기 위해 관련서적을 탐독해 이내 개들의 언어에 통달했던 그, 그가 만약 아이를 낳았다면 그 아이는 더없이 사랑이 넘치는 다정한 아빠를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동지가 위기에 처하면 자신의 온몸을 던질 줄 알았다. 오바마 방한 아프가니스탄 재파병 반대 집회에서 경찰 폭력으로부터 다리에 깁스를 한 여성회원을 구하려 몸을 던져 연행되기도 했던 그였다.

종종 내가 의지와 기대에 의존하여 정세를 판단하려 할 때면 그는 과학적 분석을 우선해야 한다며 반박하곤 했다. 그는 판단에 있어 가능성과 한계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려 노력했고 결정을 내리는데 있어서는 주저함이 없었으며 그로 인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노동계급의 자기해방과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위해 42년 생애의 절반 이상을 던져 넣었던 사람 그는 나의 스승이었으며 동지였고 마음 따뜻한 친구였다. 그가 있어 나는 험로에서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며칠 전 술자리에서 그가 진지한 얼굴로 내게 했던 “좀 더 책임지려하고 실천 속으로 한걸음 더 자신을 던져 넣으라”는 말이 유언이 될 줄 몰랐다.

동지! 미안하고 사랑한다. 동지의 유지에 따라 나를 한걸음 더 실천 속으로 던져 넣을 것이다. 동지와 함께 했던 3년 7개 월은 내게 여행과 같다. 목적지에 당도하지 못하는 한 여행은 계속돼야 하고 이제 목적지에 도착해 축포를 쏘아 올릴 일은 우리들의 몫이다.

“슬퍼하지 말고 조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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