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해가 바뀔 때마다 적잖은 이들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치열한 삶이 떠오르게 됐다. 

2012년 1월 1일 새벽 2시 경 청계천 근처에서 승합차가 택시와 충돌해 전복되는 불운한 사고가 났고 고(故) 조성민 동지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42세였다. 

신년 타종 행사에 맞추어 진행된 ‘한미FTA 날치기 무효·디도스 테러 한나라당 해체’ 촛불집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는 현장에서 마지막까지 〈레프트21〉을 판매했다.

운 좋게도 동승했던 그의 동료 일곱 명은 외상 없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마음에 깊은 상흔을 입었다. 특히 운전자였던 동료가 가장 그럴 것이다. 그에게 당신의 탓이 아니라고 말해 주자. 모두 그에게 다가가 따뜻하게 손을 잡아 주고 더 당당하게 투쟁하며 죽은 동료의 유지를 이어가라고 말해 주자. 

고 조성민은 1971년 5월 20일에 태어났다. 넉넉하지 않은 가정형편에서 태어났고,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되지 않아 시작한 학생운동의 강렬한 경험은 그를 평생토록 이 세계의 불평등과 불의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그는 1996년에 한양대 총학생회에서 사무국장을 지낸 뒤 이듬해에 전국학생정치연합(이하 전학련)의 중앙기구에서 정책국장으로 활동했는데 얼마되지 않아 구속된다. 

그는 최후변론에서 사회주의적 신념을 밝히며 국가의 부당한 탄압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이 재판은 전학련 활동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됐다. 자신의 신념을 적당히 감추고 읍소하는 게 낫다는 반응이 나왔다. 다른 한편 신념을 끝까지 지키는 게 옳다는 이들도 있었다.

경쟁 교육, 전쟁, 한미FTA 반대 운동 등 지난 20여년 간 활동에 헌신적이었던 고(故) 조성민 동지

출소 이후 그의 밝은 표정을 많은 이들이 기억한다. 그는 이제 막 감옥에서 나온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사기 충천해 있었다. 국가 기구의 권위에 무릎 꿇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는 출소 후 법정에서 대놓고 자신의 신념을 지켰노라고, 그래서 이제 빼도 박도 못 한다고 유쾌하게 웃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가 학생운동을 시작하던 무렵은 지적 혼란기였다. 많은 이들은 사회주의라며 동경하던 소련이 붕괴하자 충격을 받고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도 처음에는 소련 사회가 모종의 사회주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는 출소 전후에 소련을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보는 국제사회주의자들(IS)의 견해에 귀기울이기 시작했고, 치열한 고민과 거듭된 토론 끝에 미국식 시장자본주의와 소련식 국가자본주의 모두에 반대하는 혁명적 입장을 채택했다.

최후변론

그 이후 그는 2000년대 초부터 ‘다함께’ 건설에 주도적으로 동참했고, 민주노동당 개입, 반전 운동, 노동자 투쟁에도 헌신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음악도 좋아했다. 수천 장의 음악 시디와 그만큼의 엘피판을 모았으며 여러 장르의 음악에 대한 방대한 식견을 갖고 있어 밤새도록 음악에 관해 이야기해도 그칠 줄을 몰랐다. 또한 꽤 괜찮은 일렉기타 연주자였으며 송년모임 등에서 멋들어진 연주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반려견 ‘로자’를 정말 사랑했는데, 개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관련 서적을 탐독할 정도였다. 심지어 연행에서 풀려난 뒤 석방을 환영하는 동지들을 뿌리치고 이틀 동안 굶었을 ‘로자’를 챙기러 달려갈 정도였다.

물론 그는 종종 오전 일정을 펑크 내기도 했고, 2000년대 중엽의 3년 정도는 자신감이 떨어져 중심적인 활동에서 거리를 두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과거의 일이 되고 있었다. 지난해 초부터 시작된 아랍 혁명과 미국과 유럽 각지의 대중적 분출에 적극적으로 호흡하면서 자신감을 높여 가고 있었다.

다함께 서울동부지구 모임에서 공개토론회와 세미나를 담당하며 교육에 힘 썼던 고(故) 조성민 동지
우리는 고(故) 조성민 동지를 기억하며 그의 신념과 뜻을 이어갈 것이다.

그는 2009년 오바마 방한에 항의하는 촛불문화제에서 깁스한 여성이 경찰에 둘러싸이자 그 여성을 구하려다 연행이 된 적이 있다. 지난해 6월 재판에서 그가 보여 준 법정투쟁은 방청객들에게 진한 감동을 줬다. 최후진술이 얼마나 인상적이던지 우연히 방청하게 된 재능교육 노조 활동가들이 “이렇게 멋진 재판은 처음 봤다”고 할 정도였다. 

그가 남기고 떠난 집을 찾았을 때 책상 한켠에 수북이 쌓아 올려둔 자료들. 그것은 최근에 그가 〈레프트21〉에 연재하고 있었던 미국 저항의 역사를 취재한 자료였다. 

그 연재는 간결하고 명료한 문장으로 이해하기 쉬웠으며 흡입력이 있었다. 그는 글의 말미에서 1960년대 미국 저항의 교훈을 간명하게 정의했다. 

“원칙, 전략, 전술이라는 것이 단지 투쟁 속에서 아래로부터 자동적으로 탄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다. 이것은 원칙이 확립된, 응집력과 경험을 갖춘 활동가 조직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최근에 그는 다함께 서울동부지구 모임에서 공개토론회와 세미나를 담당하며 대학생들과의 토론과 지적 자극에 한껏 고무받아 있었다. 

이렇듯 2011년은 그의 인생에서 각별한 해였다. 그의 죽음은 한 해를 낙관과 열정으로 가득 채워 보낸 직후였다. 많은 이들이 그를 통해 용기를 얻었다.

이제는 까맣게 반질반질 윤이 나는 그의 일렉기타도, 그가 현장 곳곳을 누비며 〈레프트21〉을 판매하는 열정적인 모습도, 그의 재치 넘치는 농담과 연설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지난 세월 동안 쌓아 올린 행위들은 우리들 경험 속에 깊이 파고들어와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그를 보고 듣고 느끼게 될 것이다. 

슬퍼해야 하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그가 몇 년 전 미국의 록 밴드 RATM의 인기를 분석한 글에서 인용한 ‘타운십 폭동’의 가사를 다시 그의 영전에 바친다.

“반란을 일으켜라, 반란을 일으켜라. 그리고 소리쳐라. 사람들이 여전히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