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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슬럼프》 서평에 대한 간단한 논평

나는 데이비드 맥낼리 교수가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학자라는 것은 알고 있으나, 얼마 전에 나온 《글로벌 슬럼프》는 아직 정독하지 못했고 서점에서 목차 정도만 훑어본 상황이다.

따라서 내 지적은 부정확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지난 호 정선영 동지의 서평에서 몇 가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는 용어 사용과 개념 이해가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우선, 정선영 동지의 서평은 정말로 마르크스주의적인, 훌륭한 글이었다. 예컨대, ‘사회운동 노조주의’가 진정한 대안이 아니라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점, 영국 등 선진국의 저항의 사례를 맥낼리 교수의 주장에 대한 적절한 반례로 제시한 점, 볼셰비키를 “좌파연합세력”이라고 표현한 저자의 오류를 지적한 점 등은 매우 적절하며, 훌륭한 마르크스주의적인 정치관이 돋보였다.

그러나 정선영 동지의 경제학에서는 몇 가지 문제가 보였다. 정선영 동지는 이윤율 저하에 관한 맥낼리 교수의 ‘과잉축적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그런데 과잉축적, 즉 과잉생산을 이윤율이 하락하는 원인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 이윤율이 높다면 자본가는 투자를 늘릴 것이고, … 반대로 이윤율이 낮다면 투자를 하지 않을 것 … 따라서 과잉생산은 … 위기의 징후[이다.]

그러나 이는 동지께서 “과잉 축적”의 개념을 잘못 이해한 것에서 기인하는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과잉‘생산’과 과잉‘축적’은 확연히 다른 개념이다. “축적”은 단순히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가 잉여가치(s)를 불변자본(c)이나 가변자본(v)에 투자하는 것을 의미한다.(김수행 교수의 책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와 공황》 제6장 214쪽을 보면 “축적은 잉여가치를 다시 자본으로 추가하는 것”이라고 나온다.)

물론, 나는 맥낼리 교수가 정확히 이런 의미로 과잉축적을 사용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과잉축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는 자본의 구성이 고도화돼 공황의 조건이 발생한다는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사실, 정성진 교수가 〈레프트21〉에 기고한 복지국가에 관한 칼럼에서도 “과잉축적”이라는 단어가 나오며, 정선영 동지가 인용한 로버트 브레너 교수도 과잉축적이라는 용어를 쓴다. 아예 어떤 사람은 “유기적 구성의 변화에 근거한 과잉축적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이윤율이 낮으면 마치 자본가가 투자를 회피할 것인양 묘사한 동지의 주장에도 오류가 있다는 점을 주장하고 싶다. 이러한 정선영 동지의 이론은 마르크스보다 케인스의 그것에 가깝다. 케인스는 이자율보다 자본의 한계효율(이윤율과 유사한 개념)이 낮을 때 자본가들은 투자하기를 그만둔다고 그의 저서 《일반이론》에서 주장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 경제 이론에 있어 자본가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더 큰 이윤“율”이 아니라 이윤“량”이다. 어짜피 자본가들의 입장에서 고정자본은, 브레너 교수가 표현한 바 있는, “매몰비용”일 뿐이다. 따라서 총자본량 대비 이윤을 나타내는 이윤율은 자본가들에게 그닥 중요한 투자 지표가 아니다.

벤 파인과 로렌스 해리스가 지적했듯, 오히려 자본가들은 이윤량, 혹은 잉여가치량을 늘리는 데에 더 열을 올린다. 따라서, 이윤율이 저하하더라도 자본가들은 고도의 구성을 지닌 자본을 통해 절대적·상대적 잉여가치를 모두 뽑아낼 수 있으므로, 오히려 이윤량 자체는 증가할 수 있다. 애초에 이윤율이 마이너스가 아닌 이상, 이윤량은 좌우지간 증가할 것 아닌가. 따라서 이윤율이 저하더라도 자본가들은 여전히, 아니 어쩌면 더 자본축적에 열을 올릴 것이다(정말 자본주의스러운 일이다).

더욱이,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의 끊임없는 축적욕을 지적한 바 있다. 그들은 정말이지 공황이 닥치지 않는 한, 설령 그것이 투기나 도박에 가까울 지라도 투자를 계속할 것이다.

용어에 관한 지적을 하나 더 하자면, (참고로 지금 하려는 지적은 매우 사소하고, 용어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에 의한 것이므로 그다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과잉생산”의 개념은 상당히 넓다. 일반적으로 과잉생산론이라고 하면 우리는 ‘과소소비론’이나 ‘유효수요의 부족’만을 떠올린다. 그러나 과잉생산 공황의 개념은 과소소비론과 유효수요 부족의 이론뿐만 아니라, ‘불비례론’ 때로는 ‘이윤율 저하론’까지 포괄하는 광위의 개념이다.(정성진 교수의 책 《마르크스와 한국경제》 175페이지를 보면 용어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내 생각으로는, 아마 조셉 추나라는 과소소비만을 지칭하는 의미에서 쓴 것일 것이다.)

정선영 동지는 또한 맥낼리 교수의 신자유주의 시기의 이윤율에 대한 설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논박한다. “… 그 시기에 낮은 이윤율 때문에 자본가들이 생산적 투자보다 금융 투기로 몰렸다는 점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고 크리스 하먼과 로버트 브레너 교수를 인용하면서 이윤율은 신자유주의 시기에도, 맥낼리 교수의 의견과는 달리, 이윤율이 상당히 높았음을 주장한다. 물론 정선영 동지의 주장대로 맥낼리가 단지 최고점과 최저점을 비교한 것이라면 그 점은 잘못이다. 또한 나도 이윤율에 대한 크리스 하먼과 로버트 브레너 교수의 주장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맥낼리 교수의 분석을 “왜곡”이라고 하는 것은 약간은 과장이 아닐까 싶다.

애초에, 이윤율은 어느 경제학자가 사용하냐에 따라 그 정의가 크게 다를 수 있다 ― 로버트 브레너 교수에게 있어 이윤율의 결정에 중요한 것은 경쟁과 가격이다. 뒤메닐· 레비 교수의 분석에 있어서 이윤율은 생산성의 지표이다 ― 애초에 학파별로 이윤율을 다르게 계산하기도 한다.(예컨데, TSS라는 이론체계에서는 이윤율 계산 자체가 기존의 방식과는 미묘한 차이 ― 시차를 적용 ― 가 있다.)

더욱이, 어떠한 통계를 사용하냐에 따라 이윤율의 계산은 같은 계산법을 놓고도 다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나는 《글로벌 슬럼프》에서 데이비드 맥낼리 교수가 어떠한 방식으로 어떠한 통계를 사용했는지에 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윤율의 추계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왜곡”이라고 하는 것은(물론 맥낼리 교수의 이윤율 통계에 대해 동의하지 않더라도) 과장된 표현일 수 있다.

별로 내용도 없음에도 쓸데없이 긴 글을 썼고 지나치게 현학적인 용어를 사용해 버렸다. 그러나 나는 〈레프트21〉을 구독하는 다른 독자들과 다함께의 동지들이 좀 더 정확한 이해를 하고자 도우려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