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글로벌 슬럼프》 서평 관련 토론:
정선영 동지의 답변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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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정선영 기자가 쓴 '《글로벌 슬럼프》 서평에 대한 김종현 동지의 논평에 답하며'를 보고 김종현 씨가 보내 온 글이다.
우선, 필자의 부족한 논평에 신경 써 답해 준 정선영 동지께 감사드린다. 정선영 동지가 필자의 논평 덕분에 배운 것이 많다고 말했으나, 사실은 정선영 동지의 답변을 통해 필자가 배운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더욱이 《글로벌 슬럼프》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지 않은 필자인만큼, 부적절한 지적도 많았던 것 같다.
이 글은 우선 자기성찰로 시작할 것이다. 필자가 정선영 동지의 서평에 대해 오해한 점, 그리고 필자가 맥낼리의 《글로벌 슬럼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실수한 점, 그 외에 크고 작은 실수 등에 관해 논하고자 한다. 하지만 필자는 정선영 동지께서도 오해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 지적하고자 한다.
특히, 필자가 이윤율 저하와 공황의 연관성의 중요성을 기각한 것으로 오해한 것은 유감이다. 정선영 동지가 지적한 대로, 우리는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많은 것은 분명하다. 이 글에서는 필자는 우리의 ‘공통점’을 더 강조하게 될 것이다. 다만 차이점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다. 필자는 이 글에서 이 차이가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
1. 필자가 저지른 오류들에 관한 정정
우선 필자가 논평을 하면서 저지른 초보적인 실수 때문에 오해가 벌어진 측면이 있다. 필자는 정선영 동지의 서평에 관해 논평할 때 “이윤율은 신자유주의 시기에도, 맥낼리 교수의 의견과는 달리, 이윤율이 상당히 높았음을 주장한다” 하고, 정선영 동지의 의견과는 정반대 되는 평을 써버렸다. 사실,정선영 동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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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필자가 《글로벌 슬럼프》를 읽지 않아 생긴 실수도 있다. ‘과잉축적’ 개념에 관한 것인데, 필자는 과잉축적이라는 용어를 몇몇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의미로 — 즉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와 연결지어 — 사용했다. 그러나 정선영 동지의 답변을 보니, 동지의 주장대로 맥낼리 교수는 ‘과잉축적’을 과소소비 및 불비례와 같은 문제로 환원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내가 맥낼리의 이윤율 해석에 관해 오해한 것 같다. 물론 필자도 혹시 자신이 오해한 것이 아닐까 우려해, 처음에 논평할 때 “나는 맥낼리 교수가 정확히 이런 의미로 과잉축적을 사용했는지는 모른다” 하고 쓴 바 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정선영 동지가 처음의 논평에서 맥낼리 교수가 과잉축적을 정확히 어떤 의미로 썼는지에 대한 자세한 지적이 없었고, 바로 과잉생산과 동일시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설명은 다른 독자들이 과잉축적과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를 동일시하는 공황론 서적들을 읽을 때 오해를 할 소지가 있다.
한 가지 과잉축적 개념에 관해 추가하자면, 로버트 브레너가 ‘과잉축적’을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와는 크게 상관 없는 개념으로 쓴 것은 맞다. 필자도 이전에 언급했다시피, 브레너에게 중요한 것은 상품의 ‘가격’이 자본간 경쟁에 의해 하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브레너에게 있어서도 ‘축적’이라는 용어가 “잉여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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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정성진 교수가 《마르크스와 한국경제》에서 과잉생산공황론을 논의한 부분에 대해 필자와 정선영 동지 사이에 이견이 있었다. 정선영 동지는 “과잉생산론은 공황의 원인을 규명할 수 없”는 이론이라고 말했다. 정선영 동지에게 있어서 과잉생산론은, ‘공황의 궁극적 원인이 과잉 생산 그 자체에 있는 것’을 의미한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의 과잉생산론이라면 정선영 동지가 지적한 바는 옳다. 정선영 동지가 지적한 대로, 과잉생산 역시 이윤율 저하의 결과로써 인식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사실,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을 부정하는 것으로 잘못 알려진, 속칭 ‘과소소비론의 여왕’ 로자 룩셈부르크조차도 과소소비를 이윤율 저하와 결부시켜 생각했다.
다만, 필자가 과잉생산론에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으로 인한 공황론까지 포함시켜 말하고자 한 것은 그저 “자본주의에서 공황은 과잉생산공황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마르크스주의자는 없다”
2. 이윤율 저하와 공황에 관한 필자와 정선영 동지의 인식 차이
정선영 동지는 필자가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의 중요성을 기각한다고 썼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오해라고 생각한다. 동지께서는 이윤율의 저하 그 자체와 공황을 결부시키는 ‘근본주의자
이 이론에 관해서 필자의 졸렬한 글을 통해 이해하는 것보다, 이 이론들을 잘 설명하고 있는 책들을 읽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파인과 해리스가 쓴 《현대정치경제학 입문》
위의 책들을 살펴보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만, 일단은 논의를 진행하려면 벤 파인 등의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 해석에 관해 어느 정도 설명이 필요하다. 우선 본격적으로 설명하기에 앞서, 필자가 ‘부분적으로’ 벤 파인의 공황론을 지지하지만, 이윤율의 저하 그 자체를 기각하는 그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히겠다.
이 다음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저작들의 광범한 인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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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필자의 주장을 전개하기에 앞서 필자는 정선영 동지의 ‘근본주의적 학설’에 대해 간단한 논평을 하는 것으로 시작하겠다. 정선영 동지는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이 투자를 하는 데서 이윤율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핵심적으로 강조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이윤량에 관한 마르크스의 언급에 관해서는 “이 말이 곧 이윤율이 낮을 때도 이윤율이 높을 때처럼 진취적으로 투자와 생산을 확대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고 주장하면서, 이윤율 저하가 투자수요를 감소시켜 공황을 불러일으킨다는 주장을 전개했다.
벤 파인과 알프레도 새드-필호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
또한, 자본가들, 특히 대자본가들은 이윤율 저하를 이윤량의 증대로 보상하려고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더욱 빨리 축적하려고 노력할 것이며, 이에 따라 이윤율 저하를 더 강화시킬 것이다.
무엇보다, 마르크스 자신은 자본론에서 이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주장을 펼쳤다. 정선영 동지처럼 ‘그럴 수도 있다’라는 것이 아니라, 이윤율 저하와 축적의 가속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일반 법칙과 같다는 식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이윤율 저하와 축적의 가속화는 … 동일한 과정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 자본의
정선영 동지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이번 전 세계적인 위기 전에 기업들이 왜 그렇게 막대한 돈을 쌓아 두고 투자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며 반박한다. 이렇게 주장한다면, 정선영 동지는 근본주의자들 중에서도, 국내에선 장하준의 지도교수로 유명한 로버트 로쏜
사실, 로쏜의 이러한 주장에서 거론되는 ‘이윤율’은 마르크스의 이윤율 개념보다는 케인스가 그의 명저 《일반이론》에서 제시한 ‘자본의 한계효율’에 가까운 개념이다. 벤 파인과 로렌스 해리스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아마 정선영 동지의 주장에 대해서도 적절한 지적이 아닐까 싶다.
“
다시 말해, 정선영 동지와 로쏜의 주장은 이윤율 저하로 인해 자본주의 경제가 장기 침체를 겪는 것에는 설명력이 있을지 몰라도, 잘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던 자본주의가 공황으로, 갑작스럽게 폭발하는 것은 설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윤율 저하로 인해 투자의 유인이 줄어들어서 수요가 줄어든다는 점에서 공황이 발생한다는 정선영 동지의 주장, 그리고 이윤율 저하 시에는 투자가 줄어든다는 정선영 동지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윤까지 마이너스가 되는 현상, 즉 ‘절대적 과잉축적’ 현상이 벌어지지 않는 한, 이윤율 저하로 인해 축적이 줄어드는 일이 공황을 유발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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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절대적 과잉축적’을 수반하지 않는 이윤율 저하는 어떻게 공황을 유발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에서 벤 파인 등이 제기한 모순 폭발론이 크게 중요해진다. 그들이 우선 이윤율의 필연적 저하를 부정한다는 데에서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점은 사실이다. 그들은 자본의 구성 개념을 좀더 구체화시키면서, 이윤율을 저하시키는 요인인 ‘기계화’가 이윤을 증가시키는 데 공헌하고, 불변자본 가치를 감소시키므로, 이윤율이 실제로 하락할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브레너가 강조한, ‘매몰비용’으로서의 자본이나 하먼이 강조한 ‘추가적인 투자를 요’하는 존재로서의 자본은 무시하며, 시차도 무시한다.
그러나 공황의 폭발 자체에 관해서는 큰 통찰력을 준다. 사실, 이들의 주장은 새로운 것이라기 보다는, 《자본론》 제 3권 제3편 15장 ‘법칙 내적 모순들의 전개’를 재발견한 것일 뿐이다. 여기에서는 마르크스는 축적과정 내지는 이윤율 저하가 공황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파인과 해리스의 논의는 굉장히 추상적이다. 파인과 해리스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기존자본의 가치 감소와 가치 증식이 축적 과정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금융공황과 같이, 현대자본주의의 전형적인 형태의 공황을 설명하려면, 이윤율 저하 경향의 내적 모순 중에서도 ‘제3절 - 과잉인구와 나란히 존재하는 과잉자본’을 좀 더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토미즈카와 카키자키도 이 절을 굉장히 중요시했다고 한다.
“이윤율 저하와 함께, … 개별자본가가 가져야 할 자본의 최소한도
“이윤율이 저하하면 … 투기와 투기의 일반적 촉진이 나타난다.”
따라서 이윤율 저하로 인한 투기가 일어나고, 그 투기 버블이 무너지는 순간 공황이 이뤄지는 것이다. 이번 금융공황과 1929년의 세계 대공황은 금융 부문에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 전야에는 서방에서 투기로 인한 가격상승으로 아기 기저귀조차 못샀다고 김수행 교수가 어느 글에서 회상한 바 있다. 1970년대 당시는 이번 공황처럼 부동산 투기에도 버블이 많이 끼어 있었다고 한다. 유명한 일화지만, 네덜란드에서는 튤립으로 투기를 한 적도 있고 일본에서는 카나리아로 투기를 했다가 공황이 발생한 적 있다. 이러한 것들을 이윤율 저하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으로 필자는 그동안의 논의를 종합하고 정선영 동지의 글에 재반박을 시도했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는 공유하고 있는 점이 더 많다. 사실 정선영 동지가 지적했던 차이점 중 대부분은 사실 단순한 오해나 필자의 부주의한 실수에서 기인한 것이 많다. 특히, 정선영 동지와 내 주장은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을 자본주의의 공황을 파악하는 데에 핵심적 역할을 하는 바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음을 밝히고 싶다. 다만 이윤율과 공황이 어떤 식으로 연결되는 바에 관해 인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끝으로, 정선영 동지와 필자의 논쟁이 독자들로 하여금 마르크스주의 공황론에 관한 바른 이해에 기여하는 데에 도움이 됐으면 바란다. 필자의 졸렬한 논평에 적절한 지적을 해 주셔서 생산적인 토론을 전개한 정선영 동지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이 글을 끝마치고자 한다.
그나저나, 막상 글을 써보니 분량이 너무 많아 읽기 불편하게 됐다. 필자의 글솜씨가 부족한 지라 좀더 간결하게 써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 점에 관해 양해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