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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 논쟁:
비그포르스 제대로 보기

복지국가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진보진영 내에서 스웨덴 사민당의 주요 지도자였던 비그포르스에 대한 관심도 나타난다. 얼마 전에는 홍기빈이 쓴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책세상)도 출판됐다.

에른스트 비그포르스(1881~1977)는 “스웨덴 사민주의 운동의 전체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이데올로그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또 당의 정책 입안과 집행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기도 했다.”(신정완, ‘비그포르스와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비그포르스는 1920~40년대에 재무부 장관 등을 역임하며 사민당 내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는데 당시에 “사민당이 제출한 급진적 경제 정책 구상의 배후에는 늘 그가 자리잡고 있었다.” 1928년의 상속세 강화안이나, 고소득층의 조세 부담을 대폭 증가시키는 1946년의 조세개혁안 등이 대표적인데 이런 급진적 정책들은 대부분 자본가들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됐다.

“비그포르스는 부르주아 정당들이나 재계로부터, 사민당 지도부 내에 자리잡은 골수 사회주의자로 간주돼 집중적인 공격의 표적이 되곤 했다.”

그런데 한국의 일부 논자들은 비그포르스의 주장을 소개하며 뜬금없이 급진적 반자본주의 주장을 비판하고 있다.

예컨대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승일 정책위원은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를 서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들[반자본주의자들]은 여전히 ‘생산 수단의 사회화 또는 국유화’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비슷한 수준의 공상적 유토피아주의로 전락했다.”

그러나 비그포르스의 정신을 따르자며 ‘생산 수단의 사회화 또는 국유화’ 주장을 비판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비그포르스는 1940~50년대에 스웨덴 사민당 지도자들에게 복지국가에 안주하지 말고 ‘생산수단의 사회화 혹은 국유화’를 추진하라고 촉구한 좌파 개혁주의자였다.

국유화

비그포르스 이전에 스웨덴 사민당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사상가로 닐스 칼레비(1892~1926)가 있는데 칼레비는 일찌감치 사민당에 국유화 노선을 포기하도록 촉구했다.

1960년대 말까지 스웨덴 사민당이 추진한 정책들은 대부분 이런 칼레비의 노선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그포르스의 견해는 달랐다. 특히 말년에 비그포르스는 복지국가를 넘어서는 사회주의적 과제를 제시하는 데 힘을 쏟았는데 1959년에 쓴 《정체 상태를 타파할 수 있는가? 일상 정치와 유토피아》에 그의 관점이 잘 드러난다.

그는 복지국가가 전성기를 누리던 1950년대 스웨덴에서 사민주의 운동의 핵심 과제로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의 극복을 제시했다. 다양한 개혁 정책으로 스웨덴 사회의 민주화와 평등화가 꾸준히 진행됐지만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존재하는 경제적·사회적 지위 상의 큰 격차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요지였다.

그리고 이렇게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근본적인 불평등을 해소하려면 사회정책(복지정책) 등으로는 불충분하고 기업 소유 형태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10월 복지 삭감에 반대하는 영국 노동자들 복지국가가 부딪힐 시장 논리의 벽을 뛰어넘으려면 반자본주의 투쟁이 필요하다. ⓒ사진 출처 divinenephron (flickr.com)

비그포르스가 1958년에 쓴 《잠정적 유토피아에 관하여》는 옛 소련에서 스탈린이 죽고 스탈린 집권 시절의 끔찍한 실상이 드러난 때에 칼 포퍼 등의 마르크스주의 비판에 응답한 글이다.

비록 이 책에서 비그포르스는 칼 포퍼의 주장을 대부분 수용했지만 끝까지 유토피아(사회주의)라는 목표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유토피아의 청사진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조금씩 고쳐 나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잠정적’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평등주의적 사고가 없었더라면 복지국가는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평등주의적 사고를 계속 갖고 있으면서, 복지국가 내에도 아직 남아 있는 계급사회의 형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비그포르스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예컨대 그는 점진적 개혁을 통해 근본적인 체제 변화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을 고수했다.

비그포르스가 제안한 ‘소유주 없는 사회적 기업’ 구상은 훗날 마이드너가 ‘임노동자기금’안으로 발전시켰다. 마이드너는 한 인터뷰에서 임노동자기금이 칼레비와 사민당 주류의 노선과 달리 마르크스와 비그포르스의 전통을 복원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1975년 사민당과 LO(스웨덴 노총)가 내놓은 임노동자기금안은 대기업들이 해마다 이윤의 20퍼센트를(!) 기여금으로 납부해 임노동자기금을 조성한다는 구상이다. 이윤이 많을수록 더 많은 기여금을 내야 하고, 현금이 아니라 해당 기업의 주식으로 납부한다. 이 주식은 주식시장에서 거래되지 않고 임노동자기금의 소유 지분으로 동결된다.

또, 개인의 지분 소유를 인정하지 않고 배당도 하지 않는다. 기금은 오로지 LO가 집단적으로 소유·관리한다.

계획대로라면 머지않아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기업의 대주주가 될 것이다. 그러면 의사결정 과정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비그포르스의 생각대로라면 근본적인 불평등을 해소할 길이 열리고,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무엇을 얼마나 생산할지 결정하는 ‘사회주의’로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상에는 근본적인 모순이 있었다. 임노동자기금이 개별 기업들을 통제할 수는 있어도 경제 전체는 여전히 국내외 시장 경쟁에 종속돼 있다는 사실이다.

임노동자기금

결국 해당 기업의 자본가들이 받던 시장의 압력을 임노동자기금을 운영하게 될 노동조합도 받을 것이다.

실제로 비그포르스의 구상은 이런 시험대에 오르지도 못했다. 자본가들의 대대적인 반대 캠페인으로 사민당은 이듬해에 44년에 걸친 장기집권을 마쳤다.

사민당과 LO에 대한 노동자들의 지지가 이전처럼 단단한 것이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1940년대 말부터 강력한 임금 억제 정책을 펼친 사민당 정부와 LO 지도부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었다.

결국 1960년대 말에는 유럽 전체의 좌경화 분위기를 타고 스웨덴 곳곳에서 비공인 파업들이 벌어졌고 LO 지도자들의 통제력은 크게 약해졌다. 자본가들은 이런 LO와의 단일 상층 교섭 구조를 걷어차 버렸다. 스웨덴 ‘모델’이 해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사민당이 임노동자기금 같은 급진적 정책을 시도한 것은 이런 급진화 분위기 덕분이었다. 문제는 사민당 우파는 물론이고 당내 좌파조차 이런 노동자 투쟁의 힘을 활용해 자본가들을 밀어붙일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민당에 불만을 느낀 노동자들을 조직할 대안적 좌파 정당도 없었다.

결정적으로 1970년대 경제 위기는 사민당 내 좌파 지도자들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완전히 굴복시켰다. 사민당은 1982년 말에 재집권하자마자 스웨덴 산업의 가격 경쟁력을 높이겠다며 ‘제3의 길’ 정책을 추진했다.

그 뒤로 스웨덴 복지국가는 사민당이 주도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해체되기 시작했다. 한국 같은 나라에 견주면 여전히 높은 수준이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이전보다 크게 악화됐다.

사민당은 1996~2006년 사이에만 당원의 3분의 1을 잃었고, 2006년에 이어 2010년에도 보수당에 크게 패배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에서 복지국가 건설을 제시하는 진보진영이 비그포르스의 주장과 실천에서 이끌어내야 할 진정한 교훈은 반자본주의적 급진성과 거리두기가 아니다.

오히려 경제 위기 시기에 복지국가를 건설·유지하려 하는 운동은 곧 시장 논리라는 벽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벽을 뛰어넘으려면 반자본주의 투쟁으로 발전해야 한다.

비그포르스의 결정적인 약점은 그 벽을 슬쩍 넘어갈 수 있다고 있다고 생각한 데 있다. 마이드너는 기업을 돈으로 사들여 벽을 넘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경제 위기 상황에 놓인 자본가들의 공포와, 거기서 비롯한 격렬한 저항을 물리치려면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투자가 아니라) 투쟁에 나서도록 해야 한다. 계급투쟁의 이론인 마르크스주의가 복지국가 실현에 기여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