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중순 중국 공산당은 충칭 공산당 서기장 보시라이를 전격 해임했다. 그의 오른팔 왕리쥔이 미국 대사관으로 도망가 망명을 신청한 지 한 달 만이었다.

중국 혁명 8대 원로 중 하나인 보이보의 아들인 보시라이와 같은 정치 거물이 해임된 것은 20년 만에 처음 있는 큰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무엇을 보여 주는지에 관한 논의들은 매우 혼란스럽다. 

어떤 이는 ‘충칭 모델’로 상징되는 그의 ‘마오주의적 극좌 정책’에 친시장 개혁주의자들이 반격한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무자비한 ‘범죄와의 전쟁’이 중앙의 신경을 거슬렀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공청단과 태자당 사이의 권력 투쟁이 원인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들을 모두 나열한다.

이번 사건이 단순한 파벌 간 권력 투쟁이라는 주장은 또 다른 태자당 인사인 장더장이 보시라이의 자리를 대신하면서 설득력을 잃었다. 

보시라이를 시장 개혁에 반대하는 마오주의 인사로 묘사하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보시라이의 경력을 보면, 그가 국가자본주의와 시장을 결합하는 ‘중용’을 추구하는 전형적인 탈마오주의 시대 공산당 관료임을 알 수 있다.  

보시라이는 1990년대 다롄 시장일 때 국유기업을 구조조정하고 적극적으로 외국 자본을 유치했다. 덕분에 그는 2004년부터 4년 동안 국무부 상무부장(무역부 장관)을 지냈다. 

최근 언론 보도들을 보면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당시 그는 외국 자본가들 사이에서 능숙한 영어로 외국인 투자와 통상 문제를 부드럽게 처리하는 ‘자유주의적’ 인사로 여겨졌다.  

또, 오늘날 보시라이의 상징물이 된 이른바 ‘충칭 모델’은 마오 시대 경제 모델 — 폐쇄적 국가자본주의 — 의 부활이 전혀 아니며, 심지어 보시라이의 발명품도 아니다. 

현 충칭식 경제 정책은 2000년대 초 상하이 출신 관료 황치판이 충칭에 부임하면서 시작됐다. 상하이에서는 강력한 국영기업이 성장을 주도했다. 황치판은 변두리인 충칭이 성장하려면 국영기업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감독 아래 10년 동안 국영기업 자산가치가 (주로 보유 부동산 가치 상승 덕분에) 8배나 증가했다. 그러나 충칭은 상하이만큼 부유하지 않았기에 민간 자본 유치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중국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개혁을 쟁취하는 사례가 급속히 늘고 있다.

충칭 모델

충칭의 법인세율은 15퍼센트로 중국 평균(33퍼센트)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2007년 충칭 시 공산당 서기로 부임한 보시라이는 무역부 장관 시절 쌓은 외국계 인맥을 이용해 공격적으로 외자를 유치했다. 이 과정에서 충칭 국영기업을 TGA 캐피털, 블랙스톤 등 서구 금융자본들의 주요 투자 파트너로 만들었다.  

충칭 모델을 유명하게 만든 대규모 사회기반시설 투자, 공공주택 건설, 심지어 호구제도 개혁조차 민간 자본 유치가 주된 목표였다. 

예컨대, 노동자들의 자살로 악명 높은 폭스콘은 초대형 공장을 충칭에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종업원 수십만 명을 공장 숙소에 가둬 두는 광둥의 방식을 영원히 지속할 수 없다면 그들에게 저렴한 공공주택을 제공하는 것은 매력적인 대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기업은 추가 비용을 한푼도 낼 필요도 없다. 

호구제 개혁은 연안 지역으로 빠져나간 농촌 인력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필요했다. 또, 농민들의 도시 정착이 확대되면 대규모 공장 건설에 필요한 토지를 추가로 확보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충칭은 전국 최초로 토지 거래 시장을 만들었다. 

언론에서 툭하면 언급하는 보시라이의 충칭 모델과 왕양의  ‘광둥 모델’ 간 경쟁이란 것도 두 가지 상반된 경제 발전 사이의 충돌이 아니다. 그런 주장은 왕양이 2007년 충칭에서 재직했고, 당시 오늘날 보시라이의 업적으로 지목되는 정부 주도의 대규모 사회기반시설 투자 계획을 세웠던 점을 설명하지 못한다.

둘 사이의 충돌은 시장 개혁 이후 중국 지방 정부들이 중앙 지원금, 외국 자본, 심지어 나중에는 노동력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해 온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결국 사회·경제적으로 충칭 모델에는 극좌적인 내용이 없다. 오히려 보시라이가 체포된 후 국내외 민간 자본가들은 충칭상공회의소에 모여 불안해 하면서 충칭에 계속 투자해야 하는지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보시라이의 또 다른 공적인 ‘범죄와의 전쟁’은 한국에서 노태우가 한 것처럼 무자비하고 잔인한 캠페인이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고위 관료가 (자기편 부패에는 눈을 감으면서) 다른 파벌에 속한 지방 부패 관료와 깡패들을 소탕하는 작전을 펴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는 상황에서 딱히 중앙에 위협이 될 것은 없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마오주의 시대의 문화적 상징들을 부활시킨 보시라이의 홍색 문화 캠페인이다. 

한 충칭 관료의 말을 인용하자면 보시라이가 이 캠페인을 추진한 목표는 “사람들에게 사상적 위안과 통일성을 제공해 급속한 경제 발전의 모순을 완화”하는 것이었다. 보시라이 자신이 그런 경제 정책을 추진한 지배자의 일원이란 점에서 그것은 위선적 캠페인이었다.

그러나 불평등 심화를 성토한 것은 대중적으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공개적으로 밝히진 않았지만 이 캠페인의 또 다른 주요 목표는 이런 포퓰리즘적 언사를 통해 보시라이 자신을 ‘띄우는 것’이었다. 즉, 중앙 — 정확하게는 정치국 상무위원 — 에 자신을 끼워 달라고 압력을 넣는 것이었다.  

중앙이 보시라이를 제거한 결정적 이유는, 겉은 화려해도 실질적 파급력은 별로 없어 보이는 이 문화 정책 때문이었다.

중앙이 위협적으로 느낀 것은 문화 캠페인의 내용이 아니었다. 마오쩌둥을 문화적 상징으로 이용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마오쩌둥 초상화는 위안화 지폐를 포함해 사방에 깔려 있다. 문제는 그것을 추구하는 방식이었다. 

판도라의 상자 

보시라이는 캠페인 추진 과정에서 대중 정서를 이용했고 종종 그들을 한곳에 모았다. 신좌파들이 충칭 모델을 찬양하고 다른 관료들을 비판하는 책을 출간하고 토론회를 여는 것을 후원했다.   

일부 공산당 중앙 지도자들은 보시라이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있다고 봤다. 

그들은 중국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하면서 현 통치 체제가 심각한 정당성의 위기를 겪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보시라이와 같은 인물의 선동이 의도치 않게 대중의 행동을 자극할까 봐 걱정한 것이다. 원자바오가 보시라이 해임 전날 ‘제2의 문화혁명이 발생할 수 있다’ 고 경고한 것은 이런 의미였다. 

상하이 북부에 있는 철강 공장 노동자 5천 명이 지난 2월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고 가두 행진하고 있다.

문화혁명의 출발은 자발적 대중 행동이 아니라 지배자들 간 권력 투쟁이었지만 오늘날 중국 관료들은 당이 대중 통제력을 잃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로 인용한다. 다른 고위 관료들은 원자바오 발언의 의미를 접수했고, 보시라이 제거를 둘러싼 당내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결국, 보시라이 제거는 보시라이가 아니라 그를 제거한 자들의 상태를 더 잘 보여 주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즉, 그들은 대중투쟁이 언제든지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다고 인식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그럼 이제 공산당 지배자들은 말썽꾸러기를 제거했으니 두 발 뻗고 잘 수 있을까? 

모순이게도 공산당 중앙 지도자들은 당을 보호하려고 당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을 제거했다. 위기 때 써먹을 탄약이 하나 줄어든 것이다. 세계경제 위기 여파 속에서 중국 경제 모순이 심화하고 노동자와 농민이 갈수록 치열하게 모순에 맞서 싸우는 상황에서 공산당 지도자들은 어리석은 결정을 내린 것인지도 모른다.  

중국 공산당이 1986년 인기 있는 지도자 후야오방을 제거한 지 3년 뒤 톈안먼 항쟁이 발생했던 것 같은 상황이 재연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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