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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볼리비아 혁명:
노동자 권력이 가능함을 보여 주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지는 못하겠지만, 올해 4월은 볼리비아 혁명이 일어난 지 60주년이 되는 때다. 1952년 4월에 시작한 볼리비아 혁명은 후진국 노동자들이 군사 독재와 자본주의를 모두 쓰러뜨릴 수 있음을 보여 줬다. 이 경험은 오늘날 이집트 혁명과 아랍 혁명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감을 줄 것이다. 영국의 사회주의자 스티브 헨셸이 어떻게 볼리비아 노동자들이 군대에 맞서 승리했는지 살펴본다.

60년 전의 볼리비아에서 모진 억압과 가난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키고 정치 엘리트들의 아성을 무너뜨렸다.

노동자들은 며칠 새 개혁주의 단체들이 수십 년 동안 해내지 못한 것들을 이뤘다.

잠깐이나마 노동자들이 사회를 통제했다. 그리하여 노동계급 조직이 잠시 동안 의회 권력과 맞먹었다.

혁명은 역대 정부가 점점 더 민심을 잃고 노동자 운동이 자신감을 키운 결과였다.

혁명이 지속된 기간은 짧았지만,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볼리비아 사람들한테 영향을 미치는 잣대를 확립했다. 혁명기 볼리비아 노동자들의 투쟁은 후진국에 존재하는 상대적으로 소수인 노동자들도 투쟁의 선두에 서서 사회를 바꿀 수 있음을 보여 줬다.

볼리비아 혁명은 소수의 게릴라 집단이나 정치가들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 수 있음을 보여 줬다.

혁명 당시 볼리비아 경제는 주석(朱錫) 생산에 집중돼 있었다. 볼리비아 사람 대부분은 농민이었지만, 광산을 중심으로 소수 노동계급이 형성됐다.

광부들은 비록 지리적으로 외딴 곳에 몰려 있었지만, 경제에서 핵심적인 구실을 했다. 광부들은 악랄한 광산주들과 싸우면서 전투적 기풍을 발전시켰다.

정치 권력은 광산을 소유한 한 줌밖에 안 되는 엘리트들이 독점했다. 그러나 대공황 이후 수많은 저항 이데올로기와 야당 세력이 성장했다.

이러한 야당 세력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것은 민족혁명운동(MNR)이었다. MNR은 볼리비아 경제가 미국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는 것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들의 제국주의 반대는 모순된 형태를 취했다.

MNR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볼리비아가 연합국을 지지한 것에 반대했고, 많은 MNR 지식인들이 독일과 이탈리아 파시즘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MNR은 국내 정책으로는 부르주아적 사회 개혁과 경제적 민족주의를 강조했다.

1940년대 말에 MNR은 거대하게 성장했고, 파시즘적 경향을 약화시켰다. MNR은 1949년에 벌어진 내전에서 반군 세력을 이끌었고, 1950년에는 광부들의 지지를 받아 봉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누그러뜨리기

정부가 대중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려고 1951년에 선거를 실시하자, MNR은 후보를 내고 승리했다.

군부는 그러한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군부는 곧바로 MNR을 불법화하고 군사독재를 실시했다.

MNR은 군사독재 타도를 준비했다. 그들은 준군사 조직인 경찰 기동대 사령관과 비밀 동맹을 맺었고 군대 대부분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계획이었다.

4월 9일 그들은 시가를 장악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군대는 분열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진압하러 나섰다.

쿠데타 지도부는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며칠 뒤 노동자들이 개입하자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공장 노동자들이 군대에 정면으로 맞섰다. 광부들은 다이너마이트로 무장하고서 밀루니[수도 라파스 근교] 역을 점거한 뒤, 운반 중인 탄약을 몰수하고 열차 선로를 끊어 버렸다.

민병대는 한편으로 그럭저럭 군대를 깨부수면서 또 한편으론 하급 장교와 병사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반란에 가담한 병사들은 무기를 민병대에 제공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옛 상관들에 반대한다는 표시로 모자를 거꾸로 썼다.

사흘 동안 전투가 벌어졌고 그사이 노동자들은 군부에 충성하는 군대를 무장 해제시키고 대통령 관저를 점령했다.

마지막까지 저항한 사관학교 학생들을 몰아낸 뒤 반군이 수도 라파스를 장악했다. 군부는 4월 11일 항복했다.

혁명 와중에 MNR은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 권력을 쥐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애초 바람대로 막후 협상 덕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공세 덕분이었다.

망명

4월 17일 MNR의 빅토르 파스 에스텐소로가 망명지에서 돌아와 대통령이 됐다. 에스텐소로 정부에는 광부, 공장 노동자, 운수 노동자를 대표해 노동계급 지도자 3명이 입각했다.

같은 날 노동조합들이 대회를 열고 노동조합의 총집결체인 COB[볼리비아 노동총연맹]를 결성했다. COB는 [노동조합뿐 아니라] 모든 민중 단체들을 한데 모았고, 농민, 가정 고용 노동자, 학생들도 포함했다.

COB는 영국의 TUC 같은 단순한 노동조합 대표 기구가 아니었다. COB는 노동계급의 기구로 민중의 절실한 요구들을 대변했고 잠시나마 그러한 요구들을 집행할 힘도 가지고 있었다.

노동자 민병대가 가두를 통제했고, 메이데이에는 무장한 노동자 4만 명이 라파스 거리를 행진했다.

볼리비아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지도자인 기예르모 로라는 COB를 두고서 “명실상부한 유일 중앙 권력”이라고 했다.

[그러나] 볼리비아에는 두 개의 권력이 존재했다.

한편에는 새롭게 구성된 정부가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군사독재를 자기 힘으로 물리친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는 COB가 있었다. COB는 MNR에 압력을 넣어 원래 목표를 훌쩍 뛰어넘는 개혁을 실시하게 만들었다.

거대 광산 회사 세 곳의 국유화, 토지 개혁, 보통선거권 도입이 혁명의 주된 성과였다. 이 세 가지 잣대는 지금도 볼리비아에서 “52년 체제”로 불린다.

그러나 이중권력 상황이 오랫동안 계속될 수는 없었다. 결국 어느 한편이 다른 쪽을 누르고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리하여] 권력이 노동계급 수중에 있었는데도, 노동계급 지도자들은 그 권력을 MNR 정부한테 넘겨 버렸다.

노동계급이 곧바로 공격받지도 않았다. 그러나 1956년에 자본 축적을 촉진할 ‘안정화 계획’이 입안됐다.

혁명기에 이룬 많은 성과들이 후퇴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노동조합을 분열시키고, 농민의 지지를 되찾고, 군대를 재건했다.

1952년 반란은 빗나갔다. 그러나 COB와 광부들은 20세기 내내 볼리비아의 권위주의 정부들에게 위협적인 세력이었다.

또한 혁명의 기억은 볼리비아 노동자들의 용기를 북돋아 왔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 혁명에 기여한 트로츠키주의자들

민족주의자들만이 볼리비아의 유일한 혁명적 야당 세력이었던 것은 아니다. 노동자혁명당( POR)은 세계에서 가장 큰 트로츠키주의 단체 가운데 하나였다.

혁명 무렵 POR은 자신들이 분리해 나온 스탈린주의적인 혁명적좌파당(PIR)보다 더 컸다. 더욱이 POR은 광산과 노동계급 속에 실제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1946년에 POR은 ‘풀라카요 테제’를 발표해 MNR을 지지해 오던 광산 노조의 지지를 획득했다. 풀라카요 테제는 트로츠키의 이행기 강령을 볼리비아 조건에 맞게 적용한 전술적 요구들이었다.

POR은 민족주의자들을 신뢰하는 일은 매우 경계했지만, 자신들의 요구를 노조 지도자들한테 의존해 완수하려 했다. POR은 특히 광부 출신 장관인 후안 레친에게 의지했다.

레친은 MNR 정부에서 자기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광부들의 힘을 사용하곤 했다.

POR은 노조 지도자들한테 주도권을 넘겼고 그 지도자들은 곧바로 정부에 주도권을 넘겼다. 곧 반란은 진압됐고 POR은 노조에서 마녀사냥 당했다.

POR의 경험이 주는 교훈은 중요하다. POR은 노동자 자신의 힘에 기대기보다 노조 지도자들에 의지해 자신의 전략을 완수하려 했다.

[이 때문에] POR은 진정으로 노동계급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지만 독립적으로 행동 가능한 대중적인 혁명 단체를 건설하는 일에는 결국 나서지 못했다.

출처: 영국의 혁명적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 22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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