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시장을 수용한 것은 제3세계 나라들이 따라야 할 모범 사례로 인용된다. 크리스 하먼이 이 과장광고에 숨겨진 현실을 파헤친다.

 

중국이 미국을 추월할까?

 

중국이 세계 경제 발전을 둘러싼 논쟁의 화두로 갑자기 떠올랐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중국은 20년 넘게 경제 성장이 지속돼 왔으며, 1990년대 말 동아시아의 다른 신흥 공업 경제들을 강타한 불황도 겪지 않았고, 지금은 세계 최대의 철강 생산국이다. 중국의 수출이 세계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80년 약 1.2퍼센트에서 오늘날 약 5퍼센트(대략 영국과 같은 규모)로 증가했다. 연평균 17퍼센트에 이르는 중국의 지속적 성장 때문에 일부 평론가들은 중국을 “세계의 공장”이라고 부르며, 2010년이면 중국의 수출이 미국을 능가할 수 있다고 예측하고 있다.(마틴 울프, 〈파이낸셜 타임스〉 2003년 11월 12일치)

이런 성장 때문에 지금 중국에 대한 외국 자본 투자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으며, 그래서 미국은 같은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 회원국인 멕시코보다 중국에 더 많이 투자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중국은 엄청난 양의 원자재를 소비해 브라질 같은 나라 자본가들의 주요 고객이 됐으며, 이 덕분에 그런 나라들은 미국과 유럽연합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들고 있다.(미국과 유럽연합은 브라질로부터 해마다 각각 약 140억 달러어치를 수입한다.) “6월과 7월에 중국은 아르헨티나의 최대 수출 시장이었으며, 2003년 1월부터 8월까지 브라질의 대 중국 수출은 136퍼센트나 치솟아 거의 30억 달러에 이른다.”(〈파이낸셜 타임스〉 2003년 9월 26일치)

중국이 세계 시장에서 성공한 것은 시장 자본주의의 고전적 기구들―주식 시장, 산업의 성공을 이윤 잣대로 측정하기, 외국인 직접 투자의 자유 보장 등―을 많이 도입한 것과 일치했다. 이것은 많은 좌파가 갖고 있던 신념(흥미롭게도, 레닌과 트로츠키의 저작들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에 이의를 제기한다. 즉, 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연계된 제3세계 나라들은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없다는 신념 말이다.

이 점을 포착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은 시장을 수용한 중국이야말로 다른 제3세계 나라들이 따라야 할 모범이라고 주장한다. [경제에 대한] 국가 통제를 폐지하기만 하면 그런 나라들도 호황을 누릴 수 있으며 만연한 대중 빈곤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는 세가지 주된 결함이 있다. [첫째,] 지난 20년 동안 중국의 시장 자본주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전 30년 동안 국가자본주의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다른 두 주요 호랑이들인 한국이나 대만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경제를] 지도해 기간산업들을 건설하고 강력한 탄압으로 대중의 생활 수준을 계속 억제했다.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라는 이 선행 시기가 없었다면 중국은 세계 시장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와 아무 관계도 없었다. 대다수 국민이 굶주림에서 벗어낫다고 할 수 없는 아주 가난한 나라에서 국민소득의 약 30퍼센트가 공업―흔히 매우 비효율적인―과 국방을 건설하는 데 들어갔다. 주민 대중에게 떠넘겨진 부담은 엄청난 것이어서, 그것이 최고에 이른 1950년대 말의 “대약진” 기간에는 기근으로 약 2천만 명이 사망했다. 그런 부담을 강요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온갖 전체주의적 [억압] 장치들과 개인 숭배였고, 이는 《대륙의 딸들》(Wild Swans)[금토, 1999년] 같은 책들이 묘사하는 “문화혁명” 시기의 마녀사냥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국가자본주의

 

그런 공포에 기초한 중공업 성장이 없었다면, 1970년대 말 이래로 중국 수출 산업의 성공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중국의 수출 산업들을 좌우한 것은 동부와 동남부 연안 지역의 새로운 사기업들(흔히 “합작사”라고 부르는)에 값싸고 풍부한 생산요소들을 공급한 북부의 국영 기업들이었다.

둘째, 중국식 “발전”을 찬양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은 그 불균등성(많은 국가 통제 발전 모델에서도 나타나는)을 무시한다. 지금 중국에는 고층 빌딩들이 늘어선 현대식 도심지들뿐 아니라 사람들이 엄청 가난하게 사는 농촌들도 수없이 많다. 세계은행의 추산에 따르면, 중국인 2억 4백만 명―여섯 명 중 한 명꼴―이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생활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농촌에서 살고 있다. 심지어 대도시에 비교적 가까운 농촌들에서도 빈곤은 심각하다. 이것은 몇 년 전 농촌 학교를 다룬 [장이모우 감독의] 중국 영화 “책상서랍 속의 동화”에서도 드러난다. 무역과 공업의 중심지에서 떨어진 곳의 상황은 더 끔찍하다.

그래서 중국사회과학원 소속 연구원 유지안롱이 작성한 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도시와 농촌의 관리들은 권력을 직접·간접으로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고 뇌물을 받고 공갈·협박을 일삼고 향응을 제공받는다. 그 때문에 관리들과 민중 사이에 긴장 관계가 조성되고 있다.”

허난성(河南省)의 한 농부는 자신이 납부해야 하는 각종 세금과 공과금을 열거했는데, 촌락 유지비, 공익 비용, 행정 비용, 교육비, 구호 기금, 민병대 훈련비, 도로 보수비, 가족 계획비 등이었다. 심지어 공과금 징수를 위한 공과금도 있었다.(〈파이낸셜 타임스〉 2003년 9월 23일치)

일부 관리들은 경제 성장으로 창출된 부의 일부가 농촌으로 흘러 들어갈 것이므로 전체 빈곤 수준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농업부 연구원 장샤오후이는 어떻게 “냉장고·TV·에어컨·휴대전화 등 내구재에 대한 농촌의 1인당 평균 지출이 지난해에 33퍼센트 증가해 89위안이 됐는지” 얘기한다.(〈파이낸셜 타임스〉 2003년 9월 23일치) 그러나 89위안은 겨우 5파운드[약 1만 원]에 불과하며, 이는 농촌의 번영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그리고 이 총액도 농가들 사이에 균등하게 분배되지 않고 관리나 부농들 수중에 집중될 것이다.

이를 보면, 서구식 생활과 사치품에 점차 익숙해지는 중간계급 이미지들에도 불구하고 [리양 감독의] 중국 영화 ‘맹정’(盲井)에 나오는 사람들과 비슷한 농민이 여전히 1억 명에서 1억 5천만 명이나 존재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들은 해마다 도시로 쏟아져 들어와 갖가지 임시일용직 일자리를 얻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불균등 발전

 

거기서 그들은 또 다른 3천만 명의 도시 실업자들과 취업 경쟁을 벌인다. 이 수치는 하락할 조짐이 안 보인다. 낡은 중공업들의 효율을 증대시켜 새로운 수출 산업들을 위한 생산요소를 창출하기 위해 그런 낡은 중공업에서 인력을 감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상황을 잘 보여 주는 사례는 페트로차이나(중국 석유·천연가스 유한공사 : 여전히 지분의 90퍼센트를 국가가 소유하고 있는)다. 이 회사는 한때 1백60만 명에 달했던 인력의 4분의 3을 감축했다. 중공업에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그와 함께 최소한의 복지 혜택들(저렴한 주거비나 의료비 등)―이른바 “철밥통”―도 잃게 된다.

다른 산업들이 성장함에 따라 창출되는 새로운 일자리의 압도 다수는 심각한 빈곤과 비교했을 때만 매력적으로 보인다. 도시 실업자와 대다수 농민은 바로 그런 심각한 빈곤에 처해 있다. 그래서 예컨대 11만 명을 고용하고 있는 신발회사 푸첸이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는 대가는 겨우 “월급 약 59파운드(약 13만 원), 즉 주당 최대 69시간 노동에 시간당 임금 27펜스(약 6백 원)와 엄격한 야간 통금을 지켜야 하는 이주 노동자용 기숙사뿐이다.”(〈파이낸셜 타임스〉 2003년 2월 4일치)

농촌 빈곤, 실업, 사양 산업의 인력 감축, 저임금은 중국식 “모델”의 우연적 특징이 아니라 핵심적 특징이다. 생산량 증대가 축적률에 좌우되는 정도는 지령 경제의 전성기보다 지금 훨씬 더 크다.

계산에 따르면, 국민소득의 40퍼센트가 “저축”된다. 즉, 소비되지 않고 이런저런 종류의 투자로 전용된다. 이것은 대다수 국민의 생활수준을 최대한 억제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수백만 달러를 소유한 부자들의 수가 몇 곱절 늘어나고 중간계급 일부가 처음으로 서구식 소비재를 이용할 수 있게 됐는데도 말이다. 마르크스 당시의 영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부의 축적은 곧 빈곤의 축적이다.

중국식 “모델”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일시적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경제가 더 성장하면 농민들이 현대적 부문으로 유입될 것이고 그 부문의 임금도 국민총생산의 증대와 함께 증가할 것이라고 한다. 사실, 그들은 중국의 막대한 소비재 수요 덕분에 여전히 가난한 다른 아시아 지역들이 똑같은 산업화 경로를 추구할 수 있는 시기가 올 것이라고 예견한다. 그들은 중국의 성장이 먼 미래까지 평온하게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들의 세번째 오류다. 그런 식으로 중국의 성장이 평온하게 계속될 것이라는 보증은 결코 없다. 사실, 중국식 모델에는 여러 요인들이 내재해 있고, 세계체제와 그 모델이 결합되면서 그런 전망의 실현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그 모델은 축적 수준에 달려 있는데, 그 축적 수준은 쉽게 지속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포기해 버릴 수도 없다. “새로운” 산업들의 역동성은 생산설비를 확장하기 위해 중국 기업 상호 간에, 그리고 외국 기업들과 미친 듯이 경쟁하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당장은 이 덕분에 중국의 수출이 증대하고, 국내적으로 중간계급의 부유한 부문이 이용할 수 있는 소비재가 급속히 증대하게 된다. 그래서 [2003년] 10월의 자동차 판매는 1년 전보다 40퍼센트 증가했고 가구 판매는 40퍼센트, 가정용품과 오디오·비디오 판매도 21.5퍼센트 증가했다.

그러나 고전적 자본주의 호황에서 그랬듯이, 심각한 문제들이 표면 바로 아래 숨어 있다.

 

과잉생산

 

첫째는 지속적인 과잉생산 경향이다. 축적을 위해 임금과 농민 소득을 억제해야 하고, 이 때문에  국내 시장이 급속히 확장되지 못하고 있는데도, 서로 경쟁하는 기업들은 생산설비를 증설하고 있다.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중국 제조업 제품의 90퍼센트가 공급과잉 상태다.” 중국 정부 관리들은 “부동산, 시멘트, 철강, 자동차, 알루미늄을 포함해 많은 부문들이 과잉투자 상태”라고 불평한다.

기업들은 가격을 대폭 인하함으로써 소비재 과잉생산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중국 기업들 사이에서 가격 전쟁이 특히 격렬한 이유는 경쟁 업체들이 단기 수익성의 개선을 추구하지 않고 흔히 시장 점유율을 높이려 하기 때문이다. … 무자비한 공급 경쟁 때문에 많은 현지 기업들은 매출 이익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파이낸셜 타임스〉 2003년 2월 4일치)

많은 수출품의 수익성도 별로 높지 않다. 해외 시장에서 중국 기업들이 더는 한국 같은 기존 공업국들의 고가 제품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중국 기업들의 저가 제품들과 경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더 값싼 중국산 전기제품들의 소매 가격이 하락한 것이 그런 사례다.

과잉생산 경향과 동시에, 노동집약적 기계설비류 투자가 아니라 자본집약적 기계설비류 투자가 지속된다. “흔히 기업들은 노동자를 고용하고 훈련시키는 것보다는 기계화에 돈을 쓰는 것이 더 싸게 먹힌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결과는 최근 몇 년 동안 국내총생산(GDP) 성장에 비해 일자리 창출이 감소한 것이라고 베이징 젱화(淸華) 대학교의 리슈구앙은 말한다.”(〈파이낸셜 타임스〉 2003년 10월 23일치)

다시 말해, 시장의 한계까지 생산이 증대함에 따라 노동 대비 [기계설비류]투자의 비율이 증대하는 것 ― 마르크스는 이를 “자본의 유기적 구성 고도화”라고 불렀다 ― 이다. 두 요인이 결합돼 실질 산업 이윤을 압박하고 있지만, 이는 기꺼이 대출하려는 은행들에 가려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은행 자체에 대한 문제들을 제기한다. “부실 대출”이 GDP의 20∼45퍼센트나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어떻게 측정하든 중국의 금융제도는 경제 대국 가운데 가장 취약하다.” 하고 논평했다.

정부는 은행 파산을 막기 위해 개입할 수 있고 십중팔구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비용은 정부의 수입을 막대하게 잠식할 것이다.

해외 판매 신장은 수익성에 대한 압박을 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중국 정부가 무역수지 흑자 때문에 중국 통화인 위안 화의 가치를 절상하지 않고 그럼으로써 제품의 가격이 낮게 유지되는 데 달려 있다. 미국 정부가 요구하는 위안화 절상은 중국 수출품의 가격을 인상시킬 것이고 중국 국내에서 생산된 제품보다 해외 수입품의 경쟁력을 더 높일 것이다.

이것은 달러화 가치를 높게 유지시키고 자국 통화 가치를 낮게 유지하기 위해 미국 금융기관들에 거액을 대출함으로써 필사적으로 산업을 확장하고 공업화를 달성하는 데 혈안이 된 [중국] 지배자들에게는 분명히 불합리한 상황이다. 결정적인 불합리는 이 돈의 일부가 지금 중국으로 되돌아와 미국계 다국적기업들이 중국 산업의 일부를 지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중국은 안정된 성장의 길을 가고 있기는커녕, 그 지배자들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줄타기는 부분적으로 미국 정부의 또 다른 줄타기에 달려 있다. 미국 정부는 중국과 여타 동아시아 나라들의 자금을 계속 끌어들여 달러화 붕괴를 막으려고 노력하는 한편, 미국 제조업자들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중국 정부에 위안화를 절상시키라는 압력을 넣고 있다.

줄타기가 혹시 효과를 낼지도 모른다. 1990년대 초와 1990년대 말에 중국의 경제 위기가 임박했다던 무서운 예언들(예컨대 “중국은 일본병에 걸릴 것”이라던 1998년 10월치 〈이코노미스트〉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제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중국에 유리한 결과가 무한정 계속될 것이라고 장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호황이 붕괴하면 항상 끔찍한 불황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지금처럼 위기가 지속되는 국면에서조차 자본주의에는 역동성이 존재한다. 경쟁의 결과 일부 자본들은 ― 가끔은 뜻밖에 ― 성장할 수 있고, 다른 자본들은 마찬가지로 뜻밖에 쇠퇴할 수 있다. 그러나 역동성은 체제 전체에 균형 성장이 아니라 불안정을 일으키고, 이것이 이번에는 갑작스런 정치·사회 위기로 돌변한다.

다른 한편, 경제 성장 때문에 노동계급이라는 사회세력의 규모가 커지고 있다. 이들을 두려워한 중국 정권은 1989년 천안문 광장에서 학생 시위를 그토록 잔인하게 진압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낡은 산업뿐 아니라 새로운 산업에서도 빈발한 파업들은 그 세력이 옛 국가자본가들과 그들의 사적 자본가 후손들 모두에 대항하는 독자적 투쟁 전통을 발전시키기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