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진진했던 세계사회포럼 워크숍

세계화와 전쟁

 

[편집자] 이 글은 지난 1월 17일 제4차 인도 뭄바이 세계사회포럼의 워크숍에서 영국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운동 단체 ‘저항을 세계화하라’ 소속 활동가 크리스 나인햄(Chris Nineham)이 한 발표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같은 워크숍에서 최일붕 씨도 발표했다.

 

워 싱턴의 전쟁광들은 어처구니없이 오만합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어떤 면에서는 그들의 오만이 반전 운동과 반신자유주의 운동에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업들과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과 현재 그들이 추진하고 있는 군사 프로젝트의 연관을 감추려는 노력조차 전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며칠 전에만 해도, 부통령 체니가  임원으로 있던 세계적 기업 핼리버튼이 이라크 ‘재건’ 사업에서 큼직한 계약을 또 한 번 따낸 사실이 공개적으로 발표됐습니다. 워싱턴의 정치 엘리트들과 군부와 기업들의 연결 고리를 이보다 분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화 프로젝트와 전쟁의 상호 관련성은 좀 더 체제 내적인 차원에서 거듭 드러납니다. 예컨대 얼마 전에 전직 미 재무장관 폴 오닐이 시인한 바에 따르면(그는 이 사실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습니다), 워싱턴의 엘리트들은 1990년대 후반 내내 이라크 침공을 논의해 왔으며, 지금의 전쟁은 9·11에 대한 대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워싱턴의 매파들은 섬뜩하게도 9·11을 그들 자신이 수년간 논의하고 계획하고 심사숙고해 온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한 일종의 기회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테러와의 전쟁” 뒤에 숨어 있는 동역학을 명확하게 보여 줍니다.

1989∼91년[소련 블록 붕괴 시기]부터 워싱턴의 이데올로그들은 시장의 확산과 함께 평화와 화합의 “신세계질서”가 도래할 것이라며 줄기차게 선전 공세를 벌여 왔고, 심지어 어떤 자들[프랜시스 후꾸야마 같은]은 “역사의 종말”을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미사여구와 신자유주의의 달콤한 약속들에도 불구하고 막상 현실에서는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의 진행과 함께 미국 대외정책의 급격한 군사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보여 주는 것은, 세계화가 시장이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지구촌 구석구석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모종의 자애롭고 순탄한 과정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자유 시장’,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열린 시장’은 워싱턴의 지배자들이 처음부터 군사력으로 뒷받침할 준비가 돼 있었다는 것입니다.

 

절대 강자

 

또한 이것은 오늘날 미국 대외정책의 군사화와 이라크 전쟁이 결코 일탈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것은 좌파의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펜타곤[미국 국방부]과 백악관을 한 무리의 정신병자들이 장악하고 있어서 생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 매우 치밀하게 계획된 일이며, 그 배경에는 서방 자본주의의 심장부에서 작동하고 있는 더 심오한 동역학이 있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정신이상도 아니고 일탈도 아닙니다.

또한 “테러와의 전쟁”도 단순히 미국의 권력이 압도적으로 강해서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좌파와 우리 운동 내의 많은 사람들이 부시를 절대 강자처럼 여기고, 군사력을 이용해 세계 어느 곳이든 맘대로 주무를 수 있는 전능한 악마처럼 보는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하지만 그들[부시 일당]의 큰소리와 오만 뒤에 숨어 있는 불안 심리를 간파해야 합니다.

그들이 남발하는 미사여구의 행간을 읽으면, 또 펜타곤에서 이따금씩 발간하는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 ‘국가 안보 전략 보고서’ 등의 노골적인 제목이 붙어 있는 문서들을 읽어 보면 매우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글에서 나타나는 무시무시하고 긴급한 언어들은 한편으로 대단히 자신만만하고 떠들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관적인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즉, 21세기 미국의 세계적 지위에 대한 불안감입니다. 그 문서들은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서 미국의 경제적 헤게모니를 위협하는 강대국들이 출현하고 있다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공포스러운 전망으로 가득합니다.

또 하나, 이 문서들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으로, 그들은 중국이 아시아에서 미국의 경제적 헤게모니를 위협할 수 있는 초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또, 그들은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지배할 초강대국으로 재기할까 봐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심지어 서방에서 등장하고 있는 도전 세력, 특히 유럽연합에 대해서도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 문서들을 보면 그들의 경제적 입지에 관한 극도로 불안한 심경이 명백히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런 불안감은 근거 있는 현실을 반영합니다. 그 현실인 즉, 미국은 더는 적수가 없는 엄청난 군사력을 갖췄음에도 경제적으로는 지난 30∼40년 전보다 상대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다는 것입니다. 제2차세계대전 직후에는 세계 전체에서 생산되는 재화의 절반을 미국이 생산했습니다. 세계 총생산의 절반이 미국에서 이뤄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비중이 25∼28퍼센트로 떨어졌습니다.

이처럼 그들의 자만심과 허세 이면에는 깊은 불안감이 존재합니다. 미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우리가 꺾을 수 있는지를 가늠하려면 이 점을 간파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자만심

 

미국 대외정책의 군사화와 “테러와의 전쟁”, 아프카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등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는커녕 더 많은 문제를 미국에 안겨 줬다는 점을 간파해야 합니다. 단지 군사적인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그들은 이라크에서 수렁에 빠져 있고, 이라크 저항세력은 명백히 성장하고 있는 데다가 점점 더 정치화하고 있습니다. 이라크의 시아파 지도자인 시스타니가 이제는 즉각적인 직접선거 실시와 진정한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스타니는 이라크 저항세력의 성장과 정치화를 반영하고 있고, 저항세력의 이 같은 성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점점 베트남을 닮아가고 있는 이라크에서 그들[미국 지배자들]이 단지 군사적으로 수렁에 빠지고 있다는 이유에서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 과정은 제국주의 본국에서도 반영되고 있는데 특히 영국이 그렇습니다. 토니 블레어와 노동당 정부는 영국 국민에게 전쟁의 명분을 납득시키지 못했기에 전쟁 초기부터 정치 위기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왔다갔다 했습니다. 영국보다는 덜 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중요한 측면에서 미국도 같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조지 부시와 매파들에게 전쟁이 정치적 호재가 결코 아니었음은 명백합니다. 그들은 이제 대량살상무기에 관해 해명하느라 애먹고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점령을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엄청난 비용을 해명하느라 애먹고 있고, 그 비용을 대는 것도 엄청난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

끝으로 저는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 전체가 직면하고 있는 두 가지 난제를 더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운동을 건설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대단히 의미심장한 두 가지 난제입니다.

첫째 난제는, 그들이 이 전쟁을 벌임으로써 전 세계에서 방어하려고 하는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이미 지난 15∼20년 동안 세계적으로 신뢰를 잃었습니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기업 세계화의 경험은 끔찍한 재앙으로 판명났고, 남반구와 북반구 모두의 민중은 그것을 재앙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WTO 주도의 세계 무역 질서에 맞선 칸쿤의 승리는 그 자체로 멋진 쾌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신자유주의자들과 세계화론자들에 맞서 세계 여론이 대거 돌아섰음을 나타내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난제

 

세계 여론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과 관련해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또 하나의 난제는, 그들이 너무나 명백하게 서방 기업들의 이익을 위해 일으킨 이[이라크] 전쟁이 오히려 세계 곳곳에서 그들이 겪고 있는 정당성 위기를 엄청나게 심화시켰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 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나게 강해졌고 확산됐습니다. 제 생각에는 거의 모든 나라가 2월 15일에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이 거대한 반전 운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운동이 너무나 강력한 나머지 미국의 지배계급조차 이 운동이 그들에게 중요한 걸림돌(가장 큰 걸림돌은 아니었을지라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우파 신문인 〈뉴욕 타임스〉는 2·15 직후에 실은 글에서 매우 의미심장하게도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오늘날 세계에는 두 개의 슈퍼파워가 있다. 하나는 미국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 여론이다.” “세계 여론”이라고 말할 때 그들이 지칭하는 것은 단지 수동적인 의미의 여론이 아니라 반전 운동을 계기로 전 세계에서 가공할 규모로 행동에 나서기 시작한 목적 의식적 여론이라는 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운동을 앞으로 밀고 나가는 데서 직면하는 문제점은 단지 남반구와 북반구의 여러 정부들이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에 동참하고 있고 종종 말로는 반전을 얘기하면서도 실제로는 전쟁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심지어 좌파의 많은 사람들조차 마거릿 쌔처가 TINA[there is no alternative]라는 약어로 표현한 논리, 즉 ‘대안은 없다’는 논리, 시장과 신자유주의와 사유화가 아닌 대안은 없으며 사회를 조직하는 대안적 모델도, 진보를 향한 다른 길도 없다는 논리를 너무나 많은 좌파들이 이렇게 저렇게 수용한 것도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 눈부신[세계사회포럼] 행사를 보더라도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지금 우리에게는 엄청난 기회가 있습니다. 이번 세계사회포럼은 예전의 어떤 행사보다도 크고, 이는 아시아의 운동이 규모가 엄청난 데다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난 몇 세대 동안 본 적이 없는 멋들어진 기회입니다.

활동가들의 임무는 곳곳에서 반전운동을 건설하고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을 고무할 뿐 아니라, 거대한 힘을 지닌 이 운동으로부터 워싱턴의 신자유주의자들과 전쟁광들에 결연히 맞서 싸울 수 있는 세력을 만들어 내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국내의 전쟁광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을 패퇴시킬 수 있는 운동을 모든 나라에서 건설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토론 정리

 

경쟁이 점점 격렬해지는 국제 환경 속에서 미국이 자국 기업들을 위해 세계 어느 곳이든 군사적으로 개입하고 싶어한다는 아친 베나익[발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인도 CND(비핵화 운동)의 창립 멤버] 동지의 첫번째 지적은 완전히 옳습니다.

또한 그가 지적했듯이 그러한 군사적 개입은 그들에게 도리어 심각한 문제를 안겨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제국 유지 비용을 [다른 국가에] 전가해야 합니다. 그들이 과거에도 시도했던 참전동맹 건설 노력은 이제 훨씬 더 힘겨운 과제가 됐습니다.

게다가 지난 2∼3년 간 그들은 전 세계 곳곳의 사회들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양극화시켰습니다. 그들로 인해 거의 모든 지역에서 그들의 지배에 맞서는 대중 운동들이 탄생했습니다.

사실, 그들은 모순에 봉착해 있습니다. 그들은 이라크에서 모순에 봉착해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점차 커지는 저항에 직면하고 있는데, 이 저항세력은 점점 정치화하고 있고 이제는 이라크 민중을 위한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선거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 민주주의야말로 그들이 여태껏 남발한 온갖 인도주의적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절대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중동의 석유를 지배하길 원하기 때문에 죽는 한이 있어도 민주주의는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요구에 직면한 그들은 놀라운 위선을 발휘해 다시 UN에 손을 벌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계 각국 정부들에 손을 벌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치 아픈 상황에 빠졌는데 니들이 좀 도와 주라. 그래도 인도주의적인 티가 좀 나게 니들 병력도 보태 주면 더 좋고.’ 하지만 이것은 매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모순 때문에, 그리고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대중적 반란 때문에 이라크 전쟁이야말로 그들의 진정한 급소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모든 힘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급소

 

그렇기에 사람들[청중석 발언자들을 가리킴]이 3·20을 단지 미국과 유럽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시위로 만들자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옳습니다. 저는 이것이 이번 세계사회포럼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3·20은 2·15와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라크 점령과 부시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시퍼렇게 살아 있음을 알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미국이 UN과 갈등을 겪는 이유는 UN이 조금이라도 인도주의적인 기구여서가 아닙니다. UN는 어떤 면에서도 진정한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기구가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UN은 세계 최대의 강도 국가들이 운영하는 기구입니다.

미국이 지난 한 해 동안 참전 동맹을 건설하는 데 그토록 애먹은 부분적인 이유는 바로 우리가 이미 건설한 운동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독일, 프랑스, 터키 정부가 원칙에 입각해 전쟁에 반대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국익이 걸려 있다 해도 그들 스스로 전쟁에 반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세계 곳곳에서 조직한 거대한 시위들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찍소리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는 그들의 전쟁 프로젝트에 미사일을 날려 급소를 명중시켰고 그들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우리의 눈부신 운동이 이미 그들에게 입힌 타격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자국

 

또한 우리는 남반구와 북반구를 불문하고 세계 곳곳의 우리 정부들도 우리의 적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비록 몇몇 정부들은 말로는 전쟁을 비판하고 심지어 칸쿤에서는 WTO에 맞서 일부 저항을 조직하기도 했지만, 각국에서 오신 많은 발언자들이 지적했듯이 그들은 자신들의 반전 언사와는 무관하게 소위 ‘인도주의적 임무’랍시고 기어이 파병을 하고 맙니다. 마치 남한 정부와 타이 정부가 이라크 민중에게 라면을 나눠 준다는 명목으로 파병하듯이 말입니다.

다른 정부들은 “테러와의 전쟁”을 핑계 삼아 자기들 나름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충족시켰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체첸 국민을 계속 억압하고 있고, 누군가 지적했듯이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남태평양 지역에서 자국의 패권을 확장하려 합니다.

이 정부들이 세계화와 미국에 대해 뭐라고 얘기하든 모두 자기 나름의 토종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사유화 정책, 시장 정책을 추종하며 노조 탄압과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악화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가 각자의 나라에서 정치적 투쟁을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사활적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개량주의

 

저는 개량주의가 파산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 생각에 개량주의는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구식 개량주의 정당들은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끝장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의 운동을 이용해 각자의 나라에서 개량주의의 지배력에 도전해야 합니다. 영국에서 우리는 무슬림 공동체, 노동당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들, 반자본주의 운동 지지자 등 영국 사회의 여러 부문들을 하나의 연합으로 결집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6월에 치러질 지방선거, 유럽의회 선거에서 토니 블레어와 노동당에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반자본주의 운동, 세계사회포럼, 반전 운동이 만들어 내고 있는 눈부신 희망과 영감, 그 엄청난 잠재력과 힘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3·20을 제국주의에 맞선 세계적인 반란의 날로 만드는 데 모든 힘을 쏟아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또한 조직상으로 별개이지만 상호 연관된 측면에서, 우리는 실제로 정권교체를 위해 싸우는 반전 연합, 반자본주의 연합, 좌파 연합들을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지 부시에 맞서 싸울 뿐 아니라 우리가 각자 살고 있는 나라에서 직면하고 있는 부패하고 신자유주의적이며 전쟁에 참여하는 정권들을 교체하기 위해 싸우는 운동을 건설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일을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는 3·20을 건설하고 부시의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을 건설하는 한편, 국내의 압제를 끝장내야 하며, 우리 운동이 단지 부시에게만 타격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살고 있는 본국의 신자유주의자들과 전쟁광들에게도 타격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프랑스

히잡 착용 금지는 인종차별이다

 

[편집자 : 지난 2월 10일 프랑스 하원에서 히잡 착용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이 법안에 반대하는 시위가 몇 주 동안 프랑스·북미·중동에서 계속되고 있다. 폴 먹가가 히잡 착용을 이유로 학교에서 퇴학당한 프랑스 여중생 자매를 옹호한다.]

 

프랑스 정부는 학교에서 히잡[무슬림 여성들이 착용하는 머리쓰개를 가리키는 아랍어]을 금지하려 한다. 프랑스 정부가 어떤 핑계를 대든 이것은 인종차별 정책이다.

이 법안의 반동적 성격은 학교에서 “정치적” 상징을 금지하는 데서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체 게바라 티셔츠나 파업 노동자 지지 스티커, 또는 반전 배지도  착용할 수 없다.

금지 조치를 권고했던 관선위원회는 “원리주의적” 종교에 대해서 “세속적” 교육을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정하게 보이기 위해서 위원회는 모든 “종교적 또는 정치적” 상징을 “공공연하게“ 내보이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의심의 여지 없이 진정한 표적은 무슬림이다.

정부의 이러한 책략을 알아차렸어야 할 많은 사람들은 정부의 정당화에 동조했다. 프랑스 사회당의 많은 당원은 프랑스 교육 제도의 소위 “세속적” 가치를 위해서 이 법을 지지한다고 말한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을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조치라면서 환영한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일부 프랑스 극좌파조차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세속적 교육이란 학교에서 어떤 종교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이지, 개별 학생들에게 무엇을 입을지 일일이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 국가가 세속 교육의 원칙을 들먹이는 것은 위선이다. 95퍼센트가 그리스도교인 사립학교들(대부분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는다)에서도 이 원칙이 지켜지고 있나? 또는 프랑스 국립학교 내의 1천5백여 개에 달하는 그리스도교 교회당에서는?

프랑스 동부의 알자스와 모젤에서는 의무적으로 그리스도교 교육이 강요되고 있다.

프랑스 국가의 인종차별과 제국주의를 전혀 모르는 사람만이 “자유·평등·우애”라는 “공화주의” 가치를 수호한다는 프랑스 국가의 주장을 근거로 이 법안을 정당화할 것이다.

1백만 명의 알제리 사람들을 희생시킨 식민지 전쟁이 벌어졌던 1950년대 프랑스 공화국은 “자유”를 수호했는가? 식민지 점령 동안 알제리 무슬림들이 공공연하게 이등시민 취급을 받은 것은 “평등”했는가? 그리고 오늘날 프랑스에 살고 있는 5백만 무슬림들을 인종적으로 차별한 것이 “우애”를 실천한 자랑스런 예인가?

현 우파 정부와 전임 정부 모두 이러한 인종차별을 강화해 왔다.

더 역겨운 주장은 히잡 금지가 여성 해방을 향한 중요한 진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특정한 옷을 입지 않으면 퇴학시키겠다고 협박해서 14살 먹은 무슬림 소녀를 해방시킬 수는 없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여성차별적 편견이나 광고모델처럼 입는 것은 “해방”이고 히잡을 착용하기를 선택하면 “억압”인가?

만약 국가나 종교 지도자가 여성들에게 히잡을 두르라고 명령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입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프랑스에서도 여성의 억압에 저항하는 치열한 싸움이 있어야 한다. 프랑스 여성들은 여전히 평균적으로 남성들보다 25퍼센트나 적게 받는다. 전체 시간제 노동자들 중 여성이 85퍼센트를 차지하며, 가사의 4분의 3을 담당한다. 또한 그들은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계속 성적 대상으로 취급된다. 여성들이 짊어지는 불평등한 짐은 복지 삭감 때문에 더 무거워졌다.

현실에서 여성을 억압하는 것은 젊은 무슬림 여성이 두르는 히잡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이다.     

일부 사람들은 무슬림 여성들이 히잡을 착용하도록 압력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젊은 무슬림 여성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현실은 이보다 모순적이다. 많은 무슬림 여성은 인종차별적이라고 올바르게 보고 있는 사회에 맞서서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기 위해 히잡을 착용한다.

물론 무슬림 공동체 내에는 여성들이 사회에서 이등시민의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 반동적 인사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젊은 무슬림 여성들의 히잡을 벗기고, 학교에서 이것을 착용하지 못하게 협박해서 그 자들이 약화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무슬림 여성들이 인종차별과 모든 사회적 불의에 맞서 싸울 때 그들과 함께해야 할 것이다.

오직 그러한 공동 투쟁을 통해서만 여성들이 사회에서 온전하고 동등한 역할을 못 하도록 막으려는 자들에게 성공적으로 도전할 수 있다.

 

 

오늘날 영국에서 히잡 착용 금지를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는 보수당을 지지하는 <데일리 텔레그래프>조차 프랑스의 방식에 비판적이다. 그러나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에는 분위기가 달랐다. 전에는 소수민족들이 자기 종교에 따라 옷을 입을 수 없도록 금지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리즈와 브리스톨 같은 지방에서는 시크교도가 터번을 둘렀다는 이유로 버스운전을 못하게 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젊은 라스타[전 이디오피아 황제를 숭배하는 자메이카 종교단체]는 땋은 머리 때문에 학교에서 귀가 조치될 수 있었다.

이러한 형태의 차별들은 오직 단호한 인종차별 반대 투쟁을 통해서 저지될 수 있었다.

영국에는 아직도 무슬림에 대해 상투적인 편견을 가진 사람과 집단이 많이 있다. 이들의 생각은 프랑스에서 금지법을 통과시키려는 자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