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객전도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주인과 손님이 바뀌었다는 소리다. 주인은 주인 대접을 받아야 하고, 손님은 손님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되려 손님이 주인 행세를 하고 주인이 손님 행세를 하는 경우에 이런 말을 쓴다. 조금 생소한 한자성어로는 발이 위에 있다는 뜻으로 족반거상, 손님이 도리어 주인 행세를 한다는 뜻의 객반위주 등이 있다.

인간지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살다 보면 주객이 전도되는 현상을 너무도 자주 경험한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이미 주객이 전도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주인인 줄 알았건만 위대한 인간의 의지도 한낱 욕심 앞에서는 스스로 무너지고 만다. 인간이 만들어 냈지만 결코 인간이 주인일 수 없는 물건. 바로 ‘돈’이다. 비록 인간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었지만 인간은 이것의 유혹 앞에 모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최근 영리병원이 화제다. 송도 경제 자유구역에 외국인 영리법인 설립 허가가 떨어졌고, 제주도에서도 영리병원을 설립한다고 떠들썩하다. 국민건강보험이 적자라고 아우성이다. ‘더 내고 덜 받는’ 보험이라는 소리까지 나온다. 이 쯤 되면 국민건강보험이 무슨 소용인지, 차라리 따로 보험을 들어서 안전하게 의료 서비스를 받는 것이 훨씬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다. ‘비효율적인’ 전국민 의료보험제도는 사라져야 한다는 소리가 솔솔 나온다. 의사도 돈 좀 벌어야하지 않겠다는 목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씁쓸하게도, 우리네 사회는 갈수록 그런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우리도 돈 좀 벌어 보자’라는 구호, ‘효율성’이라는 구호, ‘이윤’이라는 구호 앞에 우리네 사회는 점점 무릎을 꿇고 있다. 한 인간의 건강이, 심하게는 목숨이 걸린 일이 돈 앞에서 계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을 치료하면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을까, 어떻게 치료를 해야 더 많이 뜯어낼 수 있을까. 이 따위 궁리가 갈수록 우리네 사회를 지배하려 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기 이전에 돈으로 환산해 가치를 매기는 사회가 되어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뭔들 돈으로 못 바꾸겠느냐마는, 돈으로 모든 것을 환원해 버리는 체계가 갈수록 인간을,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제 아무리 고고한 윤리적 잣대도 ‘효율성’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진정한 주객전도가 아닐 수 없다.

영화 〈식코〉를 보면 충격적인 이야기들이 수두룩하다. 영화라기보다는 한 편의 다큐에 가까운, 분노 없이는 볼 수 없는 이 영화에 담긴 메시지는 단순하다. 돈이 먼저냐, 인간이 먼저냐 하는 질문이다. 조금 더 확장하면, 공공성인가 사유화인가의 문제로 환원할 수도 있겠다. 공공적이어야 할 부문이 사유화가 진행됐을 때, 그 사회가 과연 건강한 사회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알던 ‘아메리칸 드림’은 영화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가 행복한, 모두가 권리를 누리는 ‘자유’의 나라 미국은 영화 속에선 존재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재산에 의해 대우가 달라지는 계급 사회에 불과했다. 돈이 없는 사람은 굶어 죽을 자유, 아플 자유 밖에는 누리지 못했다.

〈식코〉에 등장한 인물들의 삶은 처참하기 짝이 없다. 회사의 이윤 앞에서 그들은 전혀 속수무책이다. 얼굴에 철판이라도 한 오십여 장은 깔아놓은 듯, 의사들은 아주 심각한 환자조차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치료만을 해 준 채 돌려보낸다. ‘보험’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몸이 너무나도 아팠지만 ‘자유의 나라’인 미국은 그들에게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이 보험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에게 적절한 치료를 제공해 준 것은 오랫동안 미국이 악마로 선전해 왔던 쿠바에서였다. 9·11 테러 구조작업 후유증을 앓던 이들에게 쿠바 의료진은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해 줬다. 그저 현지인들과 똑같이만 대우해 달라는 주문임에도 그들은 미국에서는 절대로 받을 수 없었던 최고의 VIP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자유가 있지만 돈 때문에 건강할 자유, 행복할 자유가 없이 그저 굶어 죽을 자유, 아플 자유만 있다면 그걸 ‘자유’라고 부르는 것은 심각한 기만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을 ‘자유’라고 선전하는 것은 위선 중의 위선일 뿐이다.

점점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는 영리병원 논란 속에 정부는 ‘당연지정제’를 내세우며 미국처럼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의료 시스템을 민영화시켜 회사별로 경쟁하면 더 좋은 의료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는 게 정부의 선전이다. 의료 보험 체계는 더욱 ‘효율적’이 되고, 의사들도 돈을 벌고, 환자는 더욱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개혁이란다.

의료민영화의 신호탄

필자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저 선전 속 어디에 사람들의 건강권이 있는가? 단지 ‘더 좋은 의료 보험에 가입하면’ ‘더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라는 게 요지다. 시장 원리 속에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부 말대로 민영화가 된다면, 국민들의 건강권은 국가에서 공공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기업에서 관리하게 될 것이다. 보험업계는 더욱 활성화 될 것이고, 다양한 의료 파생 상품이 나올 것이다. 사람들의 건강은 그들에게는 ‘상품’이다.

비록 아직까지는 ‘논의’단계이고, 부자들을 상대로 하는 ‘명품 병원’이라고는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의료 민영화의 신호탄임을 부정할 수 없다. 공공적이어야 할 시스템에 자본이 개입하는 순간, 공공성은 무너지고 대신 ‘사유권’만이 철저하게 보호된다. 배타적 소유권만을 인정하는 속에서 사람은 결코 사람으로서 대우받지 않는다. 필요한 것들은 필요한 때에 보급되지 않는다. 역사 속에서 우린 그러한 사례를 무수하게 보았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영원한 우방’이라 자처한 미국은 사람들에게 최악의 자유를 선사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건강할 권리가 있고 자유가 있다. 건강권은 행복권과도 연결된다. 이는 우리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의 영역이다. 그러나 여기에 자본이 개입하는 그 순간 국민의 건강권은 ‘상품’으로 치환돼 뿌리부터 위협당한다. 우리가 의료 민영화를 논의 단계부터 철저하게 봉쇄해야만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