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바야흐로 신자유주의의 시대다. 세계를 지배하던 케인스의 복지 담론은 무서운 경기침체와 더불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그 자리를 성장 담론이 대신 꿰어찼다. 파이가 커질수록 나눠 먹을 것이 많아진다는 성장론은 우리에게 장밋빛 미래를 제시하는 한편, 복지는 성장을 침체시킨다는 논리를 등장시켰다. 신자유주의는 사람들에게 그럴 듯한 청사진을 제공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열렬히 지지했다.

그러나 믿음과는 다르게, 최근 들어 터진 세계의 심각한 경제 위기를 보노라면 믿음은 믿음일 뿐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지금의 경제 위기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경제 위기를 빌미로, 엄청난 순이익을 내는 기업들조차 수많은 해고자를 배출해 내고 있다. ‘성장’을 향한 무한 경쟁은 사람들을 점차 사지로 몰고 있다. 장밋빛 미래는 고사하고, 끝없는 경쟁 속에 존재하는 것은 단 하나, 경제성장 지수뿐이다.

성장 담론은 제각기 분화되어 있는 가치 체계들을 하나로 통일시켜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에 둔다. 또한 그것이 적용되는 단위는 언제나 기업, 국가 등 대단위다. 성장의 이름 아래 성장을 방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제거 대상이 된다. 복지는 그중 하나다. 무절제한 해고와 ‘덜 주고 더 시키는’ 기업 입맛에 맞는 노동강도의 강화도 성장 담론 아래에서는 정당한 행위다. ‘성장’이라는 테제가 설정되는 순간, 그 안에 인간은 사라지고 대신 숫자와 기호만 남는다. 그 숫자를 키우기 위한 모든 행위는 ‘정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잔인한 체제 아래에서는 저항이 늘 있게 마련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두고 ‘스스로 무덤을 파는’ 체제라고 했다. 사람들이 종교처럼 신봉해 오고 순응해 왔던 체제는 이제 스스로 균열을 내는 것 같다. 쌍용차 노동자들의 파업, 재능교육 노동자들의 파업, 기아자동차 노조의 파업, 그리고 청소 노동자 할머니·할아버지들의 절규는 시작일 뿐이다. 신자유주의는 스스로 ‘고용 유연성’ 운운하며 비정규직을 양산했고, 그 편리함에 도취되었지만 이제는 그들에게 역풍을 맞고 있다. 저항의 물결은 점점 거세지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수많은 비정규직을 양산했으면서도, 뻔뻔하게도 비난의 화살을 그들에게 돌렸다. ‘너희가 능력이 없어서’라는 아주 편리한 논리로 말이다. 그러나 저항이 점점 거세지면서 신자유주의는 궁지에 몰리고 있다. ‘1퍼센트 대 99퍼센트’라는, 체제에 도전하는 구호까지 등장했다.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는 1차적인 책임이 신자유주의에 있음을 보여 줬다.

그러나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신자유주의‘가’ 문제인가? 곳곳에서 벌어지는 저항의 본질은 신자유주의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의 저항은 근본적으로 생존수단을 보장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능동적 행동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그것이 복지 위주건 성장 위주건, 생존수단을 노동계급으로부터 빼앗아간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1차적으로 복지를 지지해야 함은 노동계급이 지녀야 할 태도로서 옳지만, 그것이 결코 근본 대안은 아니다. 이제껏 자본주의의 대안은 자본주의 안에서만 이루어질 것처럼 이야기되어 왔지만, 자본주의 하에서 복지 체제는 언제나 신자유주의적, 또는 우파적 공격에 취약하기 마련이다. 때에 따라서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효과적으로 착취하기 위한 신자유주의를 오히려 더 지지하기도 한다. 복지냐, 성장이냐 하는 선택의 폭은 고작해야 자본주의 안에서만 왔다갔다할 뿐이다. 신자유주의가 가지는 문제점을 복지가 해결해줄 것이라 믿는 것도, 결국 자본주의가 형성한 이데올로기적 프레임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단지 자본주의가 얼마나 쉽게 타락하고 사람들을 착취하며 억압할 수 있는가를 증명했을 뿐이다. 근본적인 원인은 자본주의다. 사람들에게 어떤 대안도 없고 단지 선택만을 강요하는 체제는 지금 스스로 무너지고 있는 중이다. 그것도 아주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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