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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MARX IS MUSS 2012 참가기:
개방적이고 급진적 토론으로 가득찬 독일 ‘맑시즘 2012’

독일 좌파당(Die Linke) 내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네트워크인 ‘Marx21’이 주최하는 행사 “MARX IS MUSS 2012”(‘마르크스주의’의 독어 단어 Marxismus를 음소별로 풀어 쓴 것으로, ‘맑스는 의무다’라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다)가 6월 7일부터 10일까지 나흘간 베를린의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 건물에서 열렸다.

Marx21은 좌파당이 2007년 건설될 때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현재 좌파당을 급진적 사회주의 정당으로 만들기 위해 매우 열성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좌파 조직이다. 5백여 명이 참여해 나흘간 열린 이번 행사에서 나는 큰 감명을 받았고 크나큰 뿌듯함을 느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매우 다양한 주제들이었다, 대부분의 주제들이 참신했고 어떤 주제들은 매우 논쟁적이라 눈길을 끌었다. 예컨대 철학 연속강좌에서는 맑스, 엥겔스의 저작 발췌 외에도 레온 트로츠키가 쓴 철학 텍스트를 참가자에게 나눠주고 그가 변증법과 계급투쟁에 대해 발전시킨 생각들을 설명했는데, 나는 트로츠키의 철학 텍스트는 처음 읽어보는 터라 흥미를 가지고 들을 수 있었다.

초대손님으로 방문한 존 몰리뉴도 “맑스주의와 예술”, “맑스주의와 아나키즘: 책 출간회” 시간에 강연을 했다. 그가 청중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언과 질문 모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반응하고 답변하려 노력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논쟁적 주제들은 주로 좌파당과 운동 내에서 제기되는 질문들로서 독일 운동의 특수성을 반영하는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좌파와 스탈린주의”, “구동독(DDR) 작업장에서의 지배”, “구동독에서의 1968”, “구동독은 계획경제로 실패했는가?” 같은 주제들은 당 내에서 스탈린주의, 구동독과 관련된 논쟁들에 개입하기 위해 마련된 것들이다.

독일 좌파당은 오스카 라퐁텐을 중심으로 한 서독의 사회주의 좌파 또는 전투적 노동조합 좌파들이 구동독 집권당의 후신인 민주사회주의당(PDS)과 합쳐 건설된 정당이다. 후자는 구동독 지역에서 좌파당을 집권당으로 만드는 등 좌파당의 대중적 인기에 가장 큰 몫을 하고 있지만, 구동독에 대한 독일인들의 향수를 중심으로 개량주의적으로 당을 운영해 서독 좌파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

PDS 출신 대부분은 구동독의 관료들이 아니라 개혁적 정치인들이었지만 그중 상당수는 구동독에 대해 향수를 느끼고 있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당의 개량주의화를 추구하며 사민당과 함께 연립정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Marx21 그룹은 좌파당이 구동독과 스탈린주의에 대해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한다는 점, 구동독은 사회주의가 아니었으며 진정한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주장했다.

이스라엘의 점령, 시온주의 등의 주제들과 “마르크스주의적 홀로코스트 분석” 등의 주제들도 많았는데 이는 나치 시절 유태인 학살의 기억 때문에 대부분의 독일 좌파들이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을 삼가고 있고 이 때문에 이스라엘의 억압적 정책들을 비판해 온 (제4인터내셔널과 국제사회주의경향 등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부당하게도 “반시온주의자”, “반유태주의자”로 비난받는 상황을 반영한다.

최근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작가 귄터 그라스가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시를 발표해 독일 기성 사회에서 “반유태주의”로 비난받을 때도 트로츠키주의자들 이외의 좌파들은 그라스를 방어하길 꺼렸다. 이런 상황에서 Marx21 그룹은 시온주의와 이스라엘 비판이 반유태주의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나치즘 비판과 자본주의 비판 사이의 연관성 등을 주장했다.

기본소득 논쟁

이번 대회를 통틀어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았고 가장 열띤 토론이 벌어진 것은 “조건없는 기본소득(BGE)” 찬반 논쟁이었다. 특히 기본소득 찬성론자로 최근 좌파당의 여성할당 당대표로 선출되었으며, 젊은 당원과 지지자들 사이에 상당한 인기를 받고 있는 젊은 여성 정치인 카티야 키핑(Katya Kipping)이 나왔기 때문에 이 토론은 굉장히 많은 인파가 몰렸다.

기본소득론 논쟁에서 연설하는 좌파당 당대표 카티야 키핑 ⓒ한상원

기본소득 반대론자로는 좌파당 베를린 노이쾰른 지구의 대표단 소속이고 Marx21 그룹의 노장회원인 베르너 할바우어가 나왔다. 양측의 입장대립은 매우 팽팽했다.

할바우어는 기본소득은 유토피아적이며, 노동자들의 일상적 요구가 아니므로 기각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좌파당은 오히려 최저임금제 투쟁에 집중해서 다음 총선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기본소득은 자본주의 하에서는 불가능한 무리한 요구라고 일축했다.(나는 개인적으로 할바우어의 의견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작업장의 요구 이외의 쟁점으로는 투쟁을 조직할 수 없다는 점에서 완강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는 노동계급 중심성을 (조직)노동자주의로 잘못 이해해서 생긴 오류다. 노동운동이 조합주의 운동을 넘어서 정치적 투쟁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미고용된 취약계층과 불안정노동자들에 대한 요구를 자신들의 요구와 결합시켜야 하고 기본소득론은 이렇게 고용된 노동계급과 미고용, 불안정 노동계급 사이의 공통의 연대를 실현해 줄 수 있는 쟁점이다. 베를린을 비롯, 독일에서 청년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해적당이 각 지역 선거에서 연이은 돌풍을 일으키는 것 역시 이들이 기본소득론, 무상교통 등 파격적 복지쟁점을 공약으로 내걸어 불안정한 삶을 사는 청년세대들에게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좌파당은 젊은층 표를 해적당에게 빼앗기며 작년부터 선거에서 내리 패배하고 있다.)

카티야 키핑은 자신의 발제에서 할바우어의 기본소득론 반대논지를 조목조목 반박하며 미고용부문의 청년들에게 삶의 질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최저임금제로는 부족하므로 기본소득을 통해 보편적 복지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토론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이렇게 극단적으로 기본소득론에 대해 상호 대립하는 양 진영이 토론회 내내 매우 우호적으로 논쟁을 진행했다는 점이다. 새로 당대표로 선출된 키핑이 행사장에 입장하자 관중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으며 주최 측에서는 그녀의 당대표 당선을 축하하는 꽃다발을 선물했다.

토론이 끝난 뒤에도 키핑과 할바우어는 웃는 얼굴로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였다. 이렇게 의견이 다르지만 함께 좌파당을 더 강력하게 건설하기 위해 연대가 필요하다는 공감대 속에 토론이 진행되는 것을 보니 나는 새삼 의견의 차이와 행동의 통일 사이에 변증법적 매개가 이뤄질 수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 진보진영의 서글픈 현실이 떠올랐다.

운동 건설

이 외에도 좌파당의 미래에 관한 토론들이 여럿 준비돼 있었는데 이 역시 좌파당의 건설에 대한 Marx21 소속 사회주의자들의 진지하고 열정적인 태도를 반영한다. 대부분의 토론들 속에서 Marx21의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좌파당 내에서 그들과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는 활동가들은 좌파당은 선거에서 만족해선 안 되며, 당이 운동 속에서 노동계급의 분노를 표현해야 한다는 점, 이주민들에 대한 공격과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태도를 분명히 드러내야 한다는 점, 당의 온건화가 아니라 급진화 속에서 사회민주당(SPD)과 차이를 드러내야 한다는 점을 올바르게 강조했다.

지난 3월 29일 영국 브래드포드 하원의원 보궐선거에서 무려 55.9퍼센트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노동당 후보를 두 배 격차로 따돌리며 당선한 리스펙트의 조지 갤러웨이 선거운동을 보좌한 리스펙트 활동가 케빈 오벤던 역시 이를 강조했다. 리스펙트의 엄청난 성공은 리스펙트가 선거에 집중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선거는 여러분의 삶을 바꾸지 않는다. 여러분 스스로가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당과 선거가 운동을 대리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표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년 총선을 준비하고 있는 좌파당 내의 사회주의 활동가들 역시 오벤던의 의견에 공감을 표하며 운동 속에서 대중의 분노를 표현하자고 주장했다.

그 외에도 나는 Marx21 그룹이 자신들의 행사에 참여한 청중들 모두에게 균등하게 토론 기회를 부여하고 개방적으로 토론하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았다. 토론을 활성화하려고 일부러 청중을 소규모 그룹으로 나누고 누구나 자유롭게 손을 들어 발언 신청을 한 뒤 발언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상당수의 토론들은 소규모 포럼과 같은 분위기였는데 그 안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도 매우 친밀하게 대화를 할 수가 있었다.

행사장 가판대 모습 ⓒ한상원

둘째 날 쉬는 시간에는 Marx21 그룹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지역별로 나누고 그 지역별 모임들도 소규모로 쪼개어 각자 자기소개를 하고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따라서 처음 온 사람들도 금세 쉽게 친해지며 Marx21의 활동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어보고 활동가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학생들 모임시간도 마찬가지였는데, 학생들은 정해진 시간에 특정 장소로 찾아오라고 공지를 한 뒤 모인 사람들은 잔디밭에 앉아 서로 소개를 하고 즉석에서 편안한 분위기 속에 학생이 변혁운동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역사적 상황 속에서 학생운동이 노동계급투쟁과 사회주의 운동에 기여한 사례를 제시하며 학생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생도 있었고 본인이 공부하는 과목 속에서 사회주의 정치를 결합시키자는 주장들도 나왔다. 또 각 대학들 내에 어떤 투쟁 쟁점들이 있는지를 발언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이렇게 개방적인 자세로 서로 즐겁게 토론하고 어울릴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주최측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굉장히 참신한 행사들도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혁명적 도시관광”이라는 프로그램으로, 행사가 이뤄지는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 주변의 역사적 현장들을 도보로 순례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가이드를 맡은 활동가는 참가자들에게 베를린의 역사를 설명해주면서 도보산책을 하는 가운데 역사적 투쟁의 현장들을 소개해 줬다. 그중에는 1953년 동독 최초의 봉기가 일어난 곳, 동독에서 청년들의 저항운동을 기념하는 “청년 저항 박물관”, 1992년 청년 활동가가 네오나치에게 살해된 곳, 동독 지역 최대 규모의 주택 점거운동이 벌어졌다가 통일된 직후 서독 정권의 경찰에 의해 진압당해야 했던 거리 등이 있었다.

6월 9일(토) 저녁에는 독일과 포르투갈의 유럽 선수권대회 조별예선 축구경기가 있었는데 참가자들은 야외에 모여 스크린을 틀어놓고 맥주를 마시면서 축구를 단체로 관람했다.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독일을 응원해야 하는지, 아니면 재정위기에 놓인 포르투갈이 상대적 약자이며 독일 정부는 재정위기의 원인이자 그 수혜자이기 때문에 응원해선 안 되는 것인지, 과연 “독일”이라는 국가 또는 “독일인”이 존재하는지 등을 놓고 토론하고 논쟁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런 논쟁을 공식적으로 치열하게 벌이지는 않았다. 참가자들은 그저 편안하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축구경기를 보았고, 중간중간에 만담꾼들이 나와 익살을 하며 현재 경기상황을 독일 정치상황에 빗대 개그쇼를 선보였는데 청중들은 매우 즐거워했다.

이집트 혁명

마지막 날의 정리 토론회에서는 직접 이집트 혁명을 보고 온 Marx21 그룹의 젊은 여성 활동가 모나 돌레가 이집트의 상황을 전하며, 자율주의자들의 혁명에 대한 환상과 달리 이 혁명은 그 방향을 놓고 상이한 논쟁 속에 진행되고 있으며 정치적 개입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스의 사회주의자 소티리스 콘토야니스는 그리스의 운동 역시 그 방향을 놓고 노동조합 간부들과 급진적 좌파들 사이에 노선충돌이 있었고, 노동조합 상층 간부들이 운동의 방향을 선회하려고 할 때 좌파들과 평범한 노동자들이 적극 개입해 운동을 발전시켰으며 결국 정권을 전복할 수 있었다고 주장해 큰 박수를 받았다.

마무리 토론회에서 발언하는 그리스 사회주의자 소티리스 콘토지아니스 ⓒ한상원

독일 급진적 이론잡지 “Prokla”의 편집자인 토마스 자블롭스키는 독일은 혁명적 상황은 아니지만 수많은 불만들이 투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을 구체적 사례를 들어 제시했으며, 당장 혁명이 눈 앞에 벌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혁명이라는 기획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번 행사는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계급투쟁 속에서 좌파들의 역할을 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다양한 주제들과 개방적 분위기, 우호적이고 협력적인 논쟁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활동가들의 헌신성, 이 모든 것이 오늘날 좌파당 속에서 가장 급진적인 주장을 하면서도 그 안에서 중요한 당의 일부로 인정받고 있는 Marx21 그룹의 현주소를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이 즐거운 경험이 나 개인만의 추억으로 남지 않고 남한에서 변혁적 정치활동에 투신하는 투사들에게도 자극과 귀감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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