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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은 어디로

통합진보당의 앞길에 깔린 안개가 걷히기는커녕 더욱 짙어지고 있다. 통합진보당이 진보의 원칙에 입각해 위기를 극복하고 투쟁에 나서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실망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구민주노동당 당권파가 안팎의 강력한 반발과 비판을 무시하고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밀어붙일 때부터 비극의 씨앗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진보대통합은 실패하고, 노동계 분열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은 채 갈등의 골만 깊어졌다. 또, 서로 계급적 기반이 다른 세력의 통합이 잘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처음부터 있었다.

4·11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이 역대 최다 의석을 얻으며 제3당으로 도약할 때만 해도 기대 속에 이런 우려는 가려졌다. 야권연대를 통한 선거적 실리도 있었지만, 경제 위기와 양극화 속에서 급진화한 사람들이 통합진보당에 지지를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터진 경선 부정 파문은 이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국회로 가는 지름길인 당내 경선은 한 달짜리 당원 대거 모집 등으로 처음부터 과열됐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참여계까지 포함해 모든 정파들이 크고 작은 부정을 저지른 것이다.

이것은 진보의 대의에 어긋나는 일이었고, 따라서 경선에 참여한 후보를 포함한 관련자들이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건 최소한의 도리였다. 그런데 구당권파는 이것을 거부했고, 5월 12일 중앙위원회에서는 급기야 단상 점거와 폭력까지 자행했다. 경선 부정뿐 아니라 이러한 대처 방법 때문에도 구당권파는 비판받지 않을 수 없다.

이 기회를 조중동과 우파들이 놓칠 리가 없었다. 저들은 대대적이고 역겨운 ‘종북’ 마녀사냥에 나섰다. 검찰은 통합진보당 당원 명부를 강제로 탈취해 가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끝없는 측근 비리와 레임덕에 허우적대던 이명박에게도 통합진보당 사태는 꽃놀이패였다. 지난 두 달 동안 ‘조중동’뿐 아니라 〈한겨레〉, 〈경향신문〉조차도 통합진보당과 ‘종북’ 관련 기사는 수백 개나 쏟아낸 반면, 내곡동, BBK 등을 다룬 것은 몇 건밖에 안될 정도였다. 정부와 우파는 통합진보당 마녀사냥으로 진보를 위축·분열시키고, 우파를 결집시키려 했다.

따라서 통합진보당은 하루빨리 정의를 바로 세우고, 진보의 정체성을 복원하는 쇄신을 통해 신뢰를 회복해야 했다.

그러나 혁신비상대책위원회와 당원대책위원회로 나뉘었던 신·구당권파는 진정한 쇄신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구당권파는 검찰 탄압이 시작되자 탄압만을 부각하며 경선 부정과 중앙위 폭력 사태 등에 대한 책임을 덮으려 했다. 신당권파의 ‘새로나기’가 우경화를 가리키고 있다는 비판도 하고 있다.

물론 ‘애국가 부르기’,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동맹 해체 재검토’ 등 신당권파의 방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신당권파의 일부가 당권 투쟁에 눈이 멀어 조중동에게까지 당원 명부를 넘겼다는 소식은 경악스러울 정도다.

그러나 당의 강령을 더 체제 순응적으로 후퇴시키고, 친자본주의적 자유주의 정당인 참여당을 끌어들이면서 진보의 정체성을 훼손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구당권파였다. 더구나 ‘묻지마 야권연대’나 민주통합당과의 연립정부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신·구당권파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

진보의 원칙과 정의를 바로 세우고, 경제 위기와 우파의 공세에 맞서 독립적인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단결과 투쟁을 건설하겠다는 관점이 양측 모두에게서 결여돼 있다.

그러다보니 지도부 선거도 투표 중단과 재투표 사태를 겪으며 거듭 삐걱거리고 있고, 진흙탕 싸움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스탈린주의의 문제점

통합진보당의 위기는 자주파 활동가들의 스탈린주의가 가진 문제점을 보여 줬다. 자주파 경향 활동가들이 당권 유지와 의회 진출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정의롭지 못한 방법과 수단까지 택했던 것이다.

이것은 ‘위로부터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스탈린주의 정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스탈린주의는 당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곧 계급이 권력에 이르는 것이고, 계급을 대표하는 당이 국가를 장악해 옛 소련이나 북한식 모델을 만들면 그것이 곧 사회주의라고 본다. 이때 사회주의는 소련 군대나 관료, 소수 지식인, 게릴라 군대, 국회의원 등이 선사하는 것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노동계급이 스스로 해방되기 위한 대중 행동과 민주주의는 간과되고, 국가 권력에 가까워진다는 목표를 위해 잘못된 수단과 방법까지 정당화되는 것이다.

오직 아래로부터 노동계급의 대중적 행동을 통해서만 사회주의를 성취할 수 있고,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 민주주의가 필수불가결하다고 믿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정치에 기초해야만, 지금의 위기를 올바로 분석하고 대처할 수 있다.

인민전선의 정치적 파산

통합진보당은 스탈린주의자들의 주도 하에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부르주아 자유주의 세력이 통합해서 만들어졌다. 정치 전략과 전통이 다른 세력들이 인민전선적으로 통합한 이 불안정한 동거는 처음부터 모순을 품고 있었다. 〈레프트21〉은 진작부터 이 점을 경고했다.

“상이한 계급적 기반에서 비롯한 정치 방침 때문에 수시로 갈등이 표면화될 공산이 크다.”(〈레프트21〉 70호)

통합진보당 지도자들은 참여당과의 통합이 진보·정의·평화를 이룰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해 왔다. 이 과정에서 진보정당의 강령뿐 아니라 정책도 더 온건하게 후퇴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지금의 사태 속에서 그동안 수면 아래 있던 이런 문제점과 모순들이 모두 터져 나오고 있다. 통합진보당은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에 별 도움이 안 되고 있다. “단결해서 더 큰 힘을 내면 좋은 것 아니냐”는 인민전선의 ‘덧셈’ 논리는 현실에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런 정치적 문제점은 민주당과 연립정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더 심각하고 파괴적인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은 국회를 개원하면서 이석기, 김재연 의원에 대한 자격심사에 합의했다. ‘종북’ 마녀사냥을 계속하려는 새누리당의 계산과 야권연대를 위해 두 의원을 털고 가야 한다는 민주당의 계산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대선까지 이어지는 상황에서 새누리당의 마녀사냥과 민주당의 타협은 계속될 것이다. 이미 검찰은 보수 단체의 고발을 핑계로 공무원, 군인의 통합진보당 가입 여부까지 수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통합진보당의 신·구당권파는 이런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며 ‘한 지붕 두 가족’ 사태를 지속하고 있다. 지도부 선거 결과에 따라 통합진보당이 쪼개질 것이라는 전망도 대두되고 있다. 당권 갈등과 경쟁이 격화하며 신당권파와 구당권파가 계속 충돌을 거듭할 것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지금 선진 노동자들은 ‘통합진보당 사태’라는 어두운 터널을 빨리 벗어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열망을 받아 안기에 통합진보당은 너무나 결함이 많다는 것이 이번에 드러났다.

제대로 된 진보정당이라면 진보의 정체성과 노동자 중심성을 바로 세우며, 민주당과도 구분되는 급진적 대안을 제시하고 투쟁을 고취하는 구실을 해야 한다.

특정 정파가 패권적으로 잘못된 방향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각 정파의 정치적·조직적 독립성을 허용하며 공동의 과제를 중심으로 투쟁하면서 차이점을 민주적으로 토론하는 방식으로 운영돼야 한다.

전·현직 민주노총 리더들이 이런 노동계 정당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 바람직한 대안일 수 있다. 현재의 통합진보당뿐 아니라 민주노동당 건설에 참여했던 세력, 그리고 민주노동당 바깥에서 투쟁을 조직해 왔던 모든 진보세력이 이런 대안을 건설하기 위한 진지한 논의에 나설 필요가 있다. 물론, 이석기·김재연 국회 제명 시도와 노수희·범민련 탄압 등 우파의 마녀사냥에는 함께 단호하게 맞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