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위원회(이하 교진추)가 교과부에 청원해 진화론 관련 내용을 교과서에서 삭제하려고 했다. 특히 이 사건에 대해 유명 과학 저널인 〈네이처〉가 관심을 표한 덕분에 국내 언론들도 앞다퉈 보도했고, 한국 사회 또한 이 사안의 심각성을 빠르게 자각할 수 있었다.

이런 효과 탓인지 교진추가 한발 물러서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학술적으로만 보면 한낱 에피소드에 불과한 문제일지 모르겠으나, 진보 진영은 이 사안을 조금 더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진화론에 대한 창조론의 반격이라는 표면 뒤에는 더 근본적인 배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청원을 주도한 이광원 교진추 회장의 발언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진화론의 본래 성격은 유물론이다. 사람의 정신도 물질 현상이라고 보는 진화론을 가르치면 학생들에게 잘못된 세계관이 형성된다. 물질은 순환하기 때문에 생명을 죽여도 죄악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낙태나 이기주의도 마찬가지다.”(〈시사인〉 247호)

즉, 유물론에 대한 공격이 교진추의 주된 목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미국 사회에서 전개된 것과 유사하게 창조론에 지적설계(생물계의 복잡성과 치밀함은 도저히 우연적인 진화의 과정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지적존재’에 의한 설계의 결과물이라는 주장)라는 어설픈 과학적 외피를 입혀 어떻게든 링 위에 올려 볼 심산인 것이다(창조과학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광원은 실제로 꾸준히 지적설계를 주장해 왔다).

이는 다윈의 진화론이 유물론의 결정체임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윈이 그의 비밀 노트에 스스로 유물론자임을 밝히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동시대에 라마르크, 월러스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진화론을 전개했지만 결국 “다윈의” 진화론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이유는 바로 그가 손톱만큼도 신이 개입할 만한 여지를 남기지 않고 철저하게 유물론적인 관점으로 자연사를 설명해 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종의 기원》을 접한 마르크스는 바로 “역사 속의 계급투쟁에 대한 자연과학적 근거”라며 격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단속평형설

이후 진보적 학자들에 의해 다윈의 진화론은 더욱 단단해졌는데, 특히 스티븐 제이 굴드의 구실이 컸다. 그는 변이가 “점진적으로 축적”돼 종이 변한다는 다윈의 이론을 수정하면서, 생물종이 오랜 시간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다가 특정 조건에서 짧은 시간에 획기적 변화가 발생한다는 “단속평형설”을 정립했다. 

이를 통해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었던 화석의 불규칙적인 발견에 논리적인 설명을 제시하며, 진화론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이런 굴드를 교진추가 자신들의 주장을 위해 끌어다 썼으니 굴드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다). 

굴드는 창조론의 현대적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지적설계론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였으며, 생물학적 결정론인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 그리고 다윈의 진화론을 과도하게 끌고 간 도킨스 등의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비판자이기도 했다. 

사실 그가 더 격렬하게 싸웠던 것은 전자가 아니라 다윈의 수혜를 받았으나 과도한 결정론으로 나아간 후자들이었다. 지적설계론이 아무리 과학의 옷을 입고 싸우자고 덤벼도 현대의 “상식”이 다윈이 진화론을 쓰던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수준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다윈 덕에 신의 손바닥 대신 유물론의 토대 위에서 자연과 인간을 논할 수 있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서 벌어진 상황을 이런 관점에서 다시 정리해 보면, 다윈의 어깨에 올라 더 잘 보이는 망원경을 고르기 바쁜데, 난데없이 지적설계론이 어깨를 두드리며 성가시게 한 상황이다. 그런데 교과부가 이 훼방에 넙죽 망원경을 내주고, 다윈의 어깨에 고이 잠든 굴드마저 자기네 편이라고 우기는 망언에도 솔깃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어찌 해외 학자들이 보기에 우습지 않았겠는가.

옳게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진화론을 제대로 보완해야 한다는 학계의 자성이 담긴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진보운동 진영 역시 다윈의 진화론이 가지는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결코 이번 사건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제기될 지적설계론에 대한 대응 준비와 더불어 반편향으로 강화될 수 있는 생물학적 결정론에 대한 경계도 다잡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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