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박근혜는 박정희의 5·16 쿠데타를 두고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자신이 박정희의 생물학적·정치적 자식임을 다시 일깨워 줬다. 그런데 박정희가 당시 “불가피”하게 쿠데타를 해야 할 상황은 무엇이었을까? 박정희의 ‘최선의 선택’은 누구의 입장에서 최선이었을까?

흔히 박정희의 쿠데타를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나 이집트의 나세르 쿠데타와 비교하기도 한다. 이들은 모두 위로부터 근대화 프로젝트라는 데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박정희의 쿠데타 역시 위로부터 근대화 프로젝트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5·16 쿠데타는 메이지 유신이나 나세르의 그것과는 성격과 역사적 맥락이 꽤 다르다. 예를 들어 메이지 유신은 낡은 봉건제를 타파했다는 점에서, 또 나세르는 토지개혁 등 ‘봉건 잔재’를 청산하고 공공연하게 반제국주의를 표방했다는 점에서 진보적인 성격이 있었다. 

이에 비해 박정희 쿠데타에는 진보적 요소가 전혀 없었다. 5·16 쿠데타는 ‘봉건 잔재’를 청산한 것도(남한에서 토지개혁은 이미 완수됐다), 반제국주의를 표방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더욱 급속한 자본축적을 위해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쥐어짜고, 제국주의에 편승해서 남한의 세계적 지위를 향상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박근혜는 자신의 뿌리인 5ㆍ16을 부정할 수 없다. ⓒ사진 출처 박근혜 플리커

5·16 쿠데타의 반동적 성격은 4월 혁명기 동안 분출했던 요구들과 비교해 보면 더욱 분명하다. 4월 혁명은 대체로 ① 정치적 민주주의,  ② 평등하고 부정부패 없는 정의로운 사회, ③ 서민에게 유리한 공정하고 자립적인 경제, ④ 제국주의 열강이 강요한 냉전체제 반대와 민족통일을 요구했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의 쿠데타는 이런 아래로부터 열망을 짓밟는 것이었다. 박정희와 미국은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움직임을 불온시 했다. 박정희가 쿠데타 당시 발표한 ‘혁명 공약’ 6개 중, 첫째 공약을 포함한 세 공약이 반공과 한미동맹 강화에 관한 것들이었다. 결국 박근혜가 말한 “최선의 선택”은 남한 자본주의와 미국 제국주의 편에서 아래로부터의 개혁 움직임을 박살내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다.

어쨌든 박정희는 쿠데타 이후 국가가 주도하는 급속한 경제발전을 도모했다. 그나마 박정희식 경제전략에 진보적인 점이 있다면, 국가 개입이 경제를 망친다는 신고전파 이론들을 조롱거리로 만들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이 성장의 계급적 본질이 무엇인가가 중요하다. 

얼마 전 미국의 투자전문가 짐 로저스는 오바마 정부의 은행 구제책을 두고 “부자를 위한 사회주의”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가 박정희의 8·3조치를 봤더라면 틀림없이 ‘자본가을 위한 지상낙원’이라고 했을 것이다. 박정희의 고도성장에 관한 신화가 널리 퍼져 있지만, 그의 집권기간 동안 경제는 두 차례의 커다란 위기를 겪었다(마지막 위기는 박정희의 저승사자가 됐다). 박정희는 위기에 빠진 기업을 살리려고 기업이 진 빚(특히 사채)을 사실상 갚지 않아도 되도록 명령했다. 박정희의 ‘계획경제’는 철저하게 수출 재벌을 위한 것이었다. 재벌들은 국가의 ‘지도’가 성가시긴 했지만 온갖 특혜를 누리며 몸집을 불릴 수 있었다. 

박정희는 급속한 자본축적을 가로막는 모든 종류의 활동을 억압하려 했다. 이에 따라 정치적 민주주의는 심하게 억압됐고, 반동적 보수주의 이데올로기가 사회분위기를 다잡았다.

그래서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민주주의도 거의 자동적으로 확립된다는 부르주아 근대화 이론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경제가 성장하면 할수록 박정희 정권은 더욱 권위적이고 야만적이 돼 갔다. 사회는 군대처럼 운영됐다. 경찰은 ‘바리깡’을 들고 다니며 백주대낮에 청년들의 머리를 밀어 버렸고, 자를 들고 다니며 여성들의 무릎과 치마 사이 길이를 측정했다.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는 수만 명의 요원을 동원해 사회를 감시했다. 반정부 인사뿐 아니라 술김에 박정희를 비난한 평범한 사람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됐다. 온갖 고문과 납치, 암살, 처형이 일상화했다. 재일청년 문세광이 박정희를 암살하려 한 총탄에 운 나쁘게 육영수가 사망한 사건의 배경에도 김대중 납치 등 박정희의 야만적 행태에 대한 분노가 깔려 있었다.

박정희는 18년 집권 기간에 계엄령, 위수령, 국가비상사태 선포 등 군대를 발동하거나 그에 준하는 억압 조처를 8번이나 취했다. 거의 2년에 한 번 꼴로 군대를 풀어 체제를 유지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런 점은 박정희 체제에 대한 대중적 동의 기반이 취약했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급속한 자본축적을 하기엔 국내 자원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박정희는 외국 자본과 외화 획득에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정의란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일회담과 베트남 파병이 대표적이다. 박정희는 일본 자본을 유치하는 대가로 과거 일본이 저지른 악행들을 사면해 줬다. 이는 대중의 정당한 민족주의적 감정을 정면으로 거스른 것이었다. 박정희의 ‘조국근대화 프로젝트’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좌파 민족주의가 반체제 세력의 주류로 부상한 것은 바로 박정희 식 민족주의의 반동적, 친제국주의적 성격 때문이었다. 

박정희는 베트남 파병을 자청했다.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 참전을 두고 “한민족이 반도 생활의 울타리를 타파, 처음으로 해외에 웅비한 가장 특기할 만한 일대 전환점을 기록한 역사적 이벤트”라고 아류 제국주의적 야심을 내비쳤지만, 당시 국내외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미국의 용병에 불과했다. 한국군은 1964∼73년에 연인원 32만 명이 참전했다. 4천6백87명이 전사했고, 1만 명 이상이 부상했다. 그리고 “4만 1천 명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고, 민간인 9천여 명을 학살했다. 결국 가난한 한국군 병사들과 베트남 민중의 피를 대가로 경제성장의 종잣돈을 마련한 것이다.

심지어 박정희는 ‘무공해 외화획득사업’의 일환으로 매춘관광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은근히 조장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72년 국제관광공사는 “관광진흥5개년계획의 일환으로” “한국 고유의 풍류인 기생촌과 누드쇼 등을 볼 수 있는 누드촌”을 만들어 “보다 많은 외화를 획득”하고자 했다.

박정희 시절 고속성장은 노동자들의 막대한 희생을 바탕으로 했다.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최고의 산업재해율, 극단적으로 낮은 저임금은 박정희식 성장 전략에 필연적이었다.

브루스 커밍스는 박정희 시대 어린 여공들이 “수출업자들에게 정말 황금광산을 만들어 [줬다]”고 평가했는데, 이들의 지옥 같은 노동조건은 전태일의 분신 항거에 배경이 됐다. 전태일은 “때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묻고 부한 자의 거름이 되는” 상황에 항의했다. “대통령 각하 …… 시다공들은 평균 연령 15세의 어린이들로서 …… 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1일 16시간의 작업을 합니다. …… 저는 도저히 이 참혹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박근혜는 박정희가 복지국가를 꿈꿨다고 했지만, 그의 아버지가 복지 확충에 진지했다는 증거는 없다. 1965년 보건부분 예산 비율은 0.1퍼센트로 베트남 0.6퍼센트, 인도 0.7퍼센트보다도 형편없이 낮은 수준이었다. 게다가 정부 예산 중 전체 보건복지비 비중은 1962년 2.28퍼센트에서 1976년 1.83퍼센트로 계속 줄었다. 

의료보험법은 1963년에 제정됐지만, 그 뒤 10년이 지난 1973년에도 가입자 수는 4천 명에 불과했다. 1976년 들어 의료보험 가입 대상자가 5백 인 이상 사업체로 확대됐지만, 전국민 의료보험에는 한참 못 미친 것이었다. 뻔한 결과지만 사람들은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질 못했다. 심지어 1972년 대도시 주민들조차 질병 치료를 위해 병원을 이용하는 경우는 21.8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농촌의 경우는 2∼3퍼센트였다).

박정희 정권 시절 그나마 제대로 기능한 복지는 체제 유지와 관련된 공무원연금과 군인연금뿐이었다. 

박정희는 ‘선성장 후분배’를 운운하면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분배를 억압했지만, 가진 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아무리 일해도 실제 생활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생산성 증가율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이는 노동자의 몫보다는 자본가의 몫이 더 빠르게 증가했음을 암시한다. 제조업 노동분배율은 1962년 26.1에서 1970년 25.0, 1973년 23.0으로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게다가 실질임금이 상승했다 하더라도 워낙 초저임금이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질 못했다. 노동자들은 ‘공돌이’ ‘공순이’라는 사회적 멸시와 천대 속에서도 정말로 개처럼 돈을 벌었지만, 정작 정승처럼 산 자들은 따로 있었다.  

우익들이 박정희가 부정부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두환이 자기 재산이 29만 원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쿠데타 직후부터 박정희 정권은 4대 의혹 사건 등으로 “신악이 구악을 뺨친다”는 비난을 들어 왔다. 사실 부정부패는 박정희식 경제모델, 즉 국가와 재벌의 유착과 상호의존을 유지시키는 핵심 메커니즘 중 하나였다. 수출재벌은 국가의 막대한 특혜를 입어 돈을 긁어모았고, 박정희 정권은 이들에게서 막대한 정치자금을 뜯어냈다. 정권과 유착한 부유층들은 각종 투기로 불로소득을 쌓아갔다. 한홍구의 추산에 따르면 박근혜 일족이 물려받은 재산만도(정수장학회, 영남대, 육영재단 등) 현재 가치가 10조 원에 가깝다. 

극우파들은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며 박정희식 독재체제를 옹호하지만, 사실 박정희식 경제성장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밥을 준 것은 아니었다. 노동자들의 실질 소득이 향상되고, 그나마 최소한의 보편적 복지가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민주화 운동과 노동자 대투쟁을 겪고 난 뒤였다. 결론적으로 박정희의 쿠데타는 급속한 자본축적을 위해 노동계급을 공격하는 일종의 반동적 계급투쟁이었다. 그리고 박근혜는 박정희 재임 시절이나 지금이나 이를 적극 옹호하는 구실을 해 왔다. 

박정희가 추구한 경제성장 방식의 몇몇 특징들(특히 국가-자본 관계)은 지금은 사라졌지만, 이 체제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이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근본적 문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안은 자본주의 자체에 문제를 제기해야만 나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