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네티즌과 경향신문 산하 ‘웹장’이 아주 불쾌하게 제기한 맑시즘 행사 강연료 논쟁을 보며, 몇몇 마르크스주의 기본 개념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그들의 문제제기는 노동과 노동력, 착취 개념에 대해 잘못된 이해가 깔려 있고, 마르크스가 상품의 물신숭배라고 부른 것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자신의 의식에 따라 외부 물질세계를 변화시키는,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으로 보았다.

“노동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자연 사이에 이뤄지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 자신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를 중재하고, 조절하고, 통제한다. 자연의 물질들은 인간에게 자연이 가하는 힘으로서 작용한다. 인간은 자신에게 속한 자연의 힘인 그의 팔, 다리, 머리와 손을 사용해서 자신의 필요에 맞게 자연의 재료들을 전용한다.”(《자본론》 1권)

“무엇보다도 노동은 인간만의 특성이다. 거미는 방직공과 비슷한 일련의 작업을 수행하고, 벌이 짓는 벌집 구조는 많은 인간 건축가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그러나 머릿속에 먼저 집의 구조를 생각해놓은 다음에 실제로 짓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가장 형편 없는 건축가조차도 가장 뛰어난 벌과 차별화된다. 모든 노동 과정은, 노동자가 처음에 머릿속으로 그렸던, 즉 관념적으로 이미 존재했던 결과가 등장하는 것으로 끝난다.”(《자본론》 1권)

노동의 소외

자본주의는 엄청난 생산력을 발전시켰지만 노동에 대한 통제권을 당사자(노동자)로부터 박탈했다. 생산과정에 실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도에 있어서 자본주의 하 노동자는 중세 농노보다도 못하다. 즉, 노동자는 노동을 할 수 있는 능력(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유로운” 처지로 내몰렸다. 그 결과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서 노동자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노동은 노동자 외부에 있다. 즉, 그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일터에서 자기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한다. 행복이 아니라 절망을 느낀다. 정신과 물리적 에너지를 발달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육체를 혹사시키고 정신을 황폐화시킨다. 따라서 노동자는 그가 노동하고 있지 않을 때에만 그 자신을 느끼고, 일하고 있을 때에는 그 자신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일하고 있지 않을 때 비로소 안식을 취하고, 일할 때에는 전혀 안식을 느끼지 못한다. 그의 노동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압에 따른, 강요된 노동이다. 그래서 노동은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 외부에 있는 무언가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일 뿐이다. 노동이 노동자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가장 뚜렷한 증거는, 물리적이나 다른 형태의 강압이 사라지기만 하면 노동을 마치 전염병과 같은 것으로 여기며 피하려고 든다는 사실이다.”(《경제철학수고》).

18세기의 많은 사상가들이 자본주의의 끔찍함에 몸서리를 쳤지만, 그들은 관념적이거나 기계적 유물론에 빠졌기 때문에 이런저런 따위의 숙명론에 빠지거나 맹목적으로 교육과 계몽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오늘날에는 “좌파=노동운동”이라는 식의 등식을 조선일보조차 널리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 당시의 많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을 단지 불쌍한 존재, 자본주의에 물들어버린 존재 등으로만 봤다. 마르크스는 이들을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비판하며, 자연과 인간의 관계의 핵심을 노동이라고 봤고, 바로 그 때문에 노동자들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포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노동자가 노동을 수행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 과정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노동과정과 노동 결과물 양쪽으로부터 소외를 겪는다. 게다가, 노동은 앞서 말했듯이 인간의 고유한 본성이기도 하기 때문에 노동자는 인간의 본성으로부터도 소외된다. 그리고 이러한 세가지 형태의 소외는 단지 자본가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그가 사회에서 맺는 모든 관계를 변화시키기 때문에 소외의 네 번째 형태인 다른 인간들로부터 겪는 소외를 낳는다.

상품 물신숭배

이러한 소외의 결과로 사람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왜곡된 형태로 인식하게 된다. 계급사회가 등장한 이래 일하는 사람들은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권을 지배계급에게 빼앗겼으며 그래서 사회 전체가 소외를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중세 시대의 농노는 자기가 일해서 거둔 농산물의 일부분을 지주나 영주에게 빼앗길 때, 그것이 불가피하고 자연의 순리이고 신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꼭 그만큼 영주 역시 그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적어도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는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착취한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즉, 중세 시대 농노는 일 안하고 놀기만 했던 영주가 자신의 노동 생산물을 가져간다는 것은 자신의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는 물론, 모든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상품의 거래(시장)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러한 착취가 은폐되어 있다. 즉, 사장이든 비정규직이든 밥을 먹기 위해서는 마트에 가서 쌀을 사야 하기는 마찬가지다.

게다가 지배계급인 자본가들조차 서로 경쟁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자본가는 물론 집단으로서 자본가들 전체조차도 시장을 통제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는 공평무사하고, 계급이 없는 듯 보이고, 정의롭고 영원할 것처럼 보인다. 마르크스는 이를 “상품 물신숭배”라고 불렀다. 이전의 그 어떤 사회보다도 자본주의에서는 소외가 완성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마르크스가 “만약 겉으로 드러난 현상과 사물의 본질이 일치한다면 과학은 쓸모 없게 될 것이다(《자본론》 3권)”라며 자본주의의 구체적 동학에 대해 깊이 탐구한 것도 그 때문이다.

“연사에게 강사료를 지급하지 않는 것이 노동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맑시즘의 취지에 부합하는가”라는 것은 정확히 이런 상품 물신숭배에 빠진 것이다. 이들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시장에서 거래되는 노동력 판매 관계 이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거나, 종파적인 이유 때문에 일부러 보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조차 모든 노동력이 상품화된 것은 아니다. 물론 사회 관계를 결정하는 대부분의 핵심 노동력은 상품화 되어 있다. 가사 노동은, 핵심적이면서도 상품화되지 않은 대표적 노동 부문이다. 그러나 이는 자본가들이 여성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 재생산 비용을 노동계급에게 떠넘기기 위해 그런 것이다. 종종 진보진영은 가사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수단의 하나로 그것의 금전적 가치를 계산해 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사 노동의 전면적인 상품화를 여성해방의 대안으로 요구하지는 않는다.

친한 이웃과 친구들에게 정성을 다해 만든 요리를 대접하고, 손수 제작한 선물을 주는 행위 역시 숭고한 의미를 갖는 노동이지만, 그것을 받는 당사자가 “덕분에 얼마만큼의 금전적 이득을 얻었다” 하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도 모든 노동이 상품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강요된 노동?

이제 맑시즘에 오는 연사들의 문제로 보자. 맑시즘에 오는 연사들은 맑시즘 주최 측에 고용된 노동자들인가?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첫 번째는, 그들은 맑시즘 주최 측에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내몰려 있는지 보는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나 자신도 연사 섭외에 참여했지만, 섭외 과정에서는 연사들이 휴가나 다른 행사와 일정이 겹치지는 않는지, 그/그녀가 맑시즘에 와서 공개적으로 강연하고 청중토론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등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된다.

두 번째로, 연사들은 맑시즘에서 연설을 하면서 마르크스가 위에서 말한 자본주의 노동의 고역을 겪는가? 즉, 연설하는 동안에 자신의 능력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느끼는가? 아니다. 오히려 맑시즘에 온 연사들은 자신의 주장에 귀 기울이는 청중들을 만나서 호소하고 행동을 촉구하기 위해서 온다. 연사들이 밥벌이를 위해 저런 주장을 하고 다닌다고 간주하는, 가장 무례한 청중만이 감히 그런 생각을 가질 것이다. (연사였던 내가 불쾌했던 까닭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내가 이런 주장을 하자, 애초 문제제기한 네티즌들과 논쟁을 하던 어느 가까운 동지가 그럼 대규모 집회에서 공연을 하고 돈을 받는 민중가요 노래패나 율동패 문제는 어떻게 봐야 하느냐고 내게 물었다. 이에 대해서도 답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일단, 집회에서 참가자들의 사기를 높이고 투쟁 의지를 고무하는 노래패는 당연히 노동을, 그것도 역사의 발전에 합치하는 숭고한 노동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들이 없다면 집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단조로울 것이고 시위 참가자들이 일체감을 느끼는 것이 지금보다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노동이, 마르크스가 위에서 말한 강요된 노동인가?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은 돈벌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집회 주최 측은 그들을 고용한 고용주이고 그들에게 노래하라고 강요하고 있는가? 무엇보다도 그들의 노래가 창출하는 경제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집회 주최 측은 가져가는가?

노래패의 노래가 투쟁을 고취시키고, 그 결과로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임금인상을 따내고, 그 임금인상 금액이 노래패에게 주는 수고비보다 높기 때문에, 집회 주최 측이 그 차액을 노리고서 그들을 고용한다고 보는 가장 천박하고 모욕적이고 물신숭배적인 설명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면 노래패가 집회에서 활동하고 받는 금전적 대가를 임금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비록 종종 민중가수와 노래패들이 노동자 운동에 연대를 표현하기 위해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말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지급하는 수고비는, 투쟁이 승리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이 모아 놓은 조합비에서 연대의 의미로 지급하는 돈으로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노동의 가치를 존중한다면 노동에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혀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고, 오히려 반박 당해야 한다. 강연료 논쟁을 보면서 그것을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 설명하고 싶었을 동지들에게 이 글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