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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처벌법 합헌 판결 규탄 성명:
여성의 낙태 결정권이 우선이다

8월 23일, 헌법재판소는 여성의 요청으로 임신 6주 된 태아를 낙태한 한 조산사가 낸 낙태처벌법(형법 270조 1항)에 대한 헌법소원에 대해 결국 합헌 판결을 내렸다. 이것은 여성의 결정권을 무시한 낙태 처벌법에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준 여성차별적 판결이다. 이 글은 '여성의 임신·출산 결정권을 위한 네트워크'가 8월 24일에 발표한 규탄 성명이다.
 

여성의 몸은 국가의 통제 대상이 아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행복추구권을 무시하고

형법 270조 1항 합헌 결정을 내린 헌법재판소를 규탄한다!

어제(23일) 헌법재판소는 여성의 요청에 의한 낙태 시술자를 처벌하는 형법 제270조 1항에 대한 합헌 판결을 내렸다. 우리는 국민 모두가 지니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과 그 불가침의 권리를 국가가 보장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는 헌법 제10조에도 불구하고, 결국 국가에 의한 낙태 통제가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행복추구권에 우선한다는 판결을 내린 헌법재판소를 강력히 규탄하는 바이다.

특히 이번 위헌 소송은 여성의 요청에 의한 낙태 시술에 대해 상대 남성이 고소를 한 것이 계기가 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가 더욱 크다. 이 사건은 지난 2010년부터 한국프로라이프의사회가 낙태 시술을 한 병원과 의사들을 고발하면서 수많은 여성들이 원치 않는 임신에도 불구하고 이 사례와 같이 상대 남성 등으로부터의 폭력과 협박, 고소에 시달려야 했던 시기에 발생한 일이기 때문이다.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몸과 삶에 직결된 문제임에도 결국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국가와 타인의 통제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헌법재판소가 이번 판결로서 명백하게 승인하고 있는 셈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번 합헌 판결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유에 더욱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사익인 임부의 자기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 보호라는 공익에 비하여 결코 중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을 판결의 중요한 근거로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헌 결정 요지에서 헌법재판소가 언급하고 있듯이, ‘인간의 생명은 고귀하고 존엄’하며 ‘생명에 대한 권리는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라고 본다면 임신과 출산에 대한 여성의 결정권 역시 이에 배치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생명은 태어나 숨을 쉬는 것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과정으로서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임신과 출산은 하나의 단절된 사건이 아니라 여성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과정이며 동시에 매우 구체적인 사회적 상황들 속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삶을 무시한 채 출산이 강요될 수밖에 없다면 이 역시 생명으로서의 여성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임부의 자기결정권을 ‘사익’으로, 태아의 생명권은 ‘공익’으로 해석하는 헌법재판소의 태도는 ‘생명존중’이라는 윤리적 가치를 협소하게 해석하는 것에 불과하며, 결국 여성이 지니는 사회적 역할과 가치, 존엄성을 무시한 채 여성을 재생산을 위한 도구이자 통제의 대상로만 여기는 인식수준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낙태를 처벌하지 않거나 가볍게 제재한다면 낙태가 만연하고 생명경시 풍조가 확산될 것’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유는 완전히 잘못된 판단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낙태율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낙태를 불법화하고 있는 나라에서 더 높으며, 안전하지 못한 낙태로 인한 여성 사망률 또한 매우 높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낙태에 대한 통제는 사회적 낙인과 규제를 통해 결국 여성의 행위규범과 사회적 위치, 권리 전반에 대한 통제로 이어지기 때문에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평등권, 건강권, 행복추구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수밖에 없다. 최근 몇 년 동안 낙태 시술에 대한 신고와 단속이 강화되면서 낙태 처벌을 빌미로 여성들에게 폭력적인 관계 유지를 강요하거나 협박을 하는 사건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현재 OECD 30개국 중 23개국이 낙태를 합법화하고 있으며, 이 중 다수의 국가들이 공공 의료체계를 통해 여성이 필요한 경우 안전하게 낙태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또한 같은 이유에서 제49차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 역시 ‘낙태와 관련된 법, 특히 형법을 검토할 것을 고려하고, 안전하지 않은 낙태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 관리를 위해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것’을 한국 정부에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이러한 사실들은 고려하지 않은 채, 근거 없는 판단으로 낙태 통제를 위해 낙태죄를 유지하는 것이 옳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결국 여성의 기본권을 국가의 통제 목적의 하위에 두고 만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이번 판결이 비록 합헌으로 결정되기는 했으나 합헌 의견을 제시한 네 명의 재판관과 동수의 재판관들이 위헌 의견을 제시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위헌 의견에서 초기 낙태의 경우 모성 건강을 고려하여 임부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점, 따라서 자기낙태죄가 침해의 최소성 원칙에 위배된다고 판단한 것과 임부의 요청에 의한 낙태 시술 역시 위헌이 아니라는 의견을 제시한 것은 낙태죄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할 수 있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러나 판결문을 통해 판단해 볼 때, 결과적으로 이번 판결의 과정에서 임신·출산의 사회적 의미와 여성들의 삶에 대해 진지하고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헌법재판소의 안이한 판결에 매우 깊은 실망을 표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낙태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고, 낙태가 음성화 될수록 여성들은 자신의 삶과 직결된 임신의 유지여부와 건강 문제 등에 대해 상담을 하거나 의료적 도움을 받기도 어려워지며, 의사들 또한 여성의 건강권을 전반적으로 고려할 수 없게 된다. 저소득층과 청소년들은 비용이 높아지고 의료 접근성이 낮아질수록 더욱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다. 불법시술로 인한 피해와 낙인이나 편견으로 인한 사회적 폭력 역시 온전히 여성이 감당해야할 몫이다. 그 어떤 추상적인 명분들 보다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이 모든 현실들이 낙태죄의 위헌성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여성의 삶과 기본권에 대한 아무런 고려 없이 이토록 무책임한 판결을 내린 헌법재판소를 강력히 규탄하며, 이번 판결을 계기로 더 많은 이들과 함께 여성의 임신출산 결정권이 온전히 보장되는 법적, 사회적 조건들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계속해서 싸워 나갈 것이다.

2012년 8월 24일

여성의 임신·출산 결정권을 위한 네트워크

(건강과대안 젠더와건강팀, 노동자연대다함께, 동성애자인권연대, 민주노총 여성위원회, 붉은몫소리, 사회진보연대,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공동실천위원회, 전국여성연대, 전국학생행진,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진보신당 여성위원회/성정치위원회, 통합진보당 여성위원회/성소수자위원회,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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