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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마드리드 테러:
“너희가 벌이는 전쟁에서 우리가 피를 흘린다”

지난 3월 14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사회당 지도자 사파테로가 [총리] 수락 연설을 하고 있을 때, 군중은 “전쟁 반대! 전쟁 반대!” 하고 외쳤다.

스페인의 충격적인 선거 결과로 우파인 아스나르의 국민당이 정권을 잃게 됐다. 아스나르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열렬하게 지지한 핵심 지도자 중 한 명이었고, 1년 전 이라크 전쟁 직전에 아조레스 군도에서 부시·블레어와 함께 폼을 잡던 자다.

국민당은 지난 주에 발생한 마드리드 폭파 사건을 바스크 [분리주의] 조직인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의 소행으로 몰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3월 13일 밤에 ETA가 폭파 사건과 무관하다는 뉴스가 보도되기 시작하자 대규모 시위들이 터져나왔다.

사람들은 정부의 거짓말에 분노했고, 정부가 이라크 전쟁을 지지한 대가를 평범한 사람들이 치르게 됐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수도 마드리드에서는 수천 명이 밤새 시위를 벌였다. 겁에 질린 정부는 감히 시위를 진압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바르셀로나에서도 엄청난 분노가 폭발했다. 사람들은 완전히 속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번 폭파 사건 때문에 [이라크] 전쟁 문제가 논쟁의 전면으로 떠올랐다.

사회당은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전쟁 문제를 언급하기는 했지만 별로 부각시키지는 않았다. 심지어 3월 12일의 관제 시위에서조차 사람들은 “전쟁 반대”를 외쳤다.

그러나 토요일에 분위기는 완전히 분명해졌다. 이런 구호가 터져나왔다. “이라크에서 부시·블레어와 맺은 동맹 때문에 우리가 피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

몇 시간 뒤 스페인 전역의 투표장으로 줄지어 모여든 사람들이 거짓말쟁이들과 전쟁광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투표율은 지난 번 선거보다 약 8퍼센트 상승했다.

스페인에서는 대체로 선거 기권율이 높았고 기권한 사람들은 흔히 좌파였다. 스페인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신들을 대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투표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젊은이들이 국민당에 반대표를 던졌다.

테러를 이용하려 했던 스페인 우파

마드리드에서 G 버스터

지난 3월 11일 스페인 마드리드의 기차역 세 곳에 대한 테러 공격이 오전 약 7시 30분에 벌어졌다. 피해자들의 대다수는 직장이나 학교에 가던 중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테러리스트들의 목표는 아토차 역 내부의 기차들을 날려버리고 역사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 마드리드 시민들의 연대감을 무시한 채, 우파의 국민당 정부는 대중의 정서를 조작하기 위한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공격이 발생한 지 몇 시간 뒤에 내무장관 아세베스는 폭파 사건의 배후에 ETA가 있음에 틀림없다고 말했다. 보수파 정부에게 범인은 반드시 ETA여야 했다.

국민당의 선거 강령은 두려움에 기초한 것들이었다. 바스크 지방, 카탈루냐, 갈리시아에 전면 자치 정부를 허용하지 않는 헌법의 지위가 변화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신자유주의적이고 중앙집중적인 정책들에 문제를 제기하는 새 지방 정부들에 대한 두려움. 반전 운동에 대한 두려움. 반동적인 대학 개혁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에 대한 두려움. 또, 값싼 노동인구를 갖춘 신설 지구로 공장을 이전하는 데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노동쟁의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ETA 자체가 두려움이다. 그 덕분에 우파 정부는 “반(反)테러 협약”을 통해 야당인 사회당(PSOE)을 자신의 지배력 아래 굳건히 묶어 둘 수 있었다. 그것은 스페인 국가에서 억압에 기초하지 않은 민족 문제 해결책을 일절 배제했다.

그 목표는 분명했다. 우파적인 유권자들을 동원하고, 좌파를 마비시키거나 적어도 그들의 선거 운동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9·11 직후에 부시 정부가 그랬듯이 테러 공격을 이용해 근본적으로 대중 정서를 바꾸고 싶어했다.

그들은 스페인에서 프랑코 독재의 종식 이후 등장한 가장 큰 대중 저항 물결의 동력을 분쇄하고 스페인 정치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력을 새롭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강화하고 싶어했다.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의 기원

크리스 하먼

스페인의 우파 정부는 정권 유지 방안의 일환으로 스페인 민족주의를 완전히 반동적인 방식으로 이용하기 위해 마드리드 폭파 사건을 ETA의 소행으로 몰아붙이려 했다.

1931년에 수립된 스페인 공화국 치하에서는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방에 독자적인 정부들이 들어설 수 있었다. 프랑코의 파시스트들은 1936∼39년의 내전에서 공화국을 타도한 뒤 이 독자성을 완전히 파괴했다.

모든 공공 활동에서는 스페인어만 사용해야 했고 지방 언어들은 금지됐다. 공공 장소에서 지방 언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체포될 수 있었다.

이런 억압 때문에 스페인 국가에 대한 민족적 반감이 심화했다. 바스크 지방에서 특히 그랬다.

1970년대 초에 사람들이 프랑코주의에 공공연하게 반기를 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됐을 때, 그들은 반파시스트 슬로건과 함께 민족적 권리를 요구하는 슬로건도 내걸었다. 노동계급 지역에서는 흔히 민족주의적 요구들이 반자본주의적·사회주의적 요구들과 뒤섞였다.

바스크 독립을 표방한 주요 정당인 바스크민족당(BNP)은 기독교민주당 부류의 보수 정당이었다.

1960년대에 한 무리의 젊은 활동가들이 그 당을 뛰쳐나와 반파시스트 좌파 게릴라 조직인 ETA를 결성했다. ETA의 행동은 바스크 지방뿐 아니라 스페인 전역에서 저항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프랑코에 맞선 이런 연대감이 1975년 프랑코 사망 이후 바스크 지방에서는 배신감으로 바뀌었다. 그 뒤 5년 동안 정부 권력은 프랑코의 파시스트 운동 출신 장관들의 수중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새로 합법화된 사회당과 공산당 지도자들이 그들과 협력해 새 헌법을 만들었다. 이 헌법은 바스크 지방과 카탈루냐가 여전히 스페인의 일부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바스크 지방 사람들의 약 65퍼센트가 이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정한 독립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바스크 민족당은 자신들이 동의하지 않는 헌법 안에서 활동하기로 결정했고 그 후 바스크 지방 정부를 운영해 왔다.

ETA의 분파들은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을 계속했다. 그들은 바스크인 약 10퍼센트의 느슨한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스페인의 다른 지역 좌파나 노동자 운동에서 완전히 분리했다.

스페인의 역대 정부, 사회당, 국민당 모두 계속해서 탄압 수준을 높여 왔다. 더 강력한 탄압에 직면할수록 ETA의 투쟁 방식도 더 폭력적으로 돼 갔다. 그러나 결코 지난 주 폭파 사건처럼 의도적으로 평범한 대중을 표적으로 삼지는 않는다.

국민당은 바스크인들에 맞서 스페인 민족주의를 부추김으로써 의식적으로 위기를 고조시켰다. 국민당은 자결권에 기초한 바스크 문제 해결책은 모두 배반이며 “테러”라고 비난했다. 지난 주말에 사람들은 그런 거짓말들을 꿰뚫어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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