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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영 전 의원 인터뷰 ─ 유신 선포 40년, YH 투쟁 33주년:
“여성 노동자의 힘으로 유신정권을 무너뜨렸죠”

1975년에 생긴 YH무역 노조는 사측의 폐업 조처에 대한 정부 대책을 요구하며 1979년 8월 9일 신민당사를 점거했고, 박정희는 여성 노동자 1백86명을 끌어내려고 1천 명이 넘는 경찰을 투입했다. 폭력 진압 과정에서 노동자 1백여 명이 부상하고 노조 대의원 김경숙 열사가 사망했다. 이 투쟁은 결국 부마항쟁으로 이어지며 유신정권 몰락의 신호탄이 됐다. 

당시 YH노조 최순영 지부장은 2004년 총선에서 당선해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지금도 부천 친환경급식지원센터 운영위원장을 맡아서 일선에서 뛰고 있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노동자들의 처지가 궁금합니다.

최순영 전 의원, 당시 YH노조 지부장 ⓒ고은이

그때는 국가가 농촌을 살기 힘들게 만들어서 사실상 도시로 쫓아냈어요. 입 하나 더는 식으로 올라왔으니까. 그때는 열일곱, 열다섯에도 공장에 왔어요. 우리도 열서너 시간 일했는데, 청계는 16~17시간을 일했대요. 잠도 제대로 못 잔 거죠. 일하는 데도 일어서면 머리가 천장이 닿아. [한 층을 나눠서] 밑에는 판매하고, 위에는 공장이었거든요. 화장실도 못 가고 뺑끼통(페인트통) 그런 거에 일 보고. 미싱하다가 손가락에 찔리고 이런 것도 많았어요.

박정희는 선성장 후분배 한다면서 수출하는 업체한테는 엄청난 특혜를 줬어요. YH도 1965년에 자본금 1백만 원으로 직원 열 명 데리고 시작했어요.

내가 1970년에 입사했거든요. 그때 노동자가 4천 명. 상상이 가요? 4년 만에. 2천 평짜리 공장을 지었는데, 누구 돈으로 지었을까? 그냥 돈을 준 거지, 국가가. 완전히 땅 짚고 헤엄치기지. 돈을 갈퀴로 긁었다 그랬으니까. 그 돈이 누가 번 거냐면 노동자들 피와 땀인거죠.

노동조합 만들기가 힘들었을 땐데, 그 과정을 좀 말씀해 주세요.

그때는 노동자라는 소리만 해도 빨갱이였어요. 그건 북한 용어다 해서, 노동자란 말도 못해.

당시 노동력을 쥐어짜서 나오는 돈이니까 노동조합 없을 때는 말도 못하게 일을 시켰어요. 일감 없으면 월급도 안 주고.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아 일 안 했으니까 돈 안 받는구나, 했어요.

내가 70년도에 YH에 입사했는데, 초봉이 2천에서 2천5백 원 정도 됐어요. 그리고 기숙사비가 1천5백 원 했으니까, 월급 받으면 반 이상은 나가는 거야. 그 돈으로 시골로 보내고, 자기 위해서 쓰는 돈이란 건 별로 없었어요.

그땐 모두 비정규직이나 다름없었어요. 노동조합 있는 데만 정규직이지, 아니면 다 비정규직이야, 나가라면 안 나갈 방법이 없으니까. 그런데 민주노조가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

노조 만들 때는 기숙사 이불 속에서 불 꺼 놓고 가입서 받았는데, 그걸 브래지어에 숨겨서 회사 밖으로 빼 왔어요. 2천 명 중에 9백 명을 받았어요. 그때 회사에서 회유책을 엄청 썼어요. 하청공장 차려 주겠다, 동생 학비 댄다니까 동생 학비도 대 주겠다, 시집 갈 밑천도 주겠다.

그렇게 해서 노동조합 결성을 해서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는 게 단체협약인 거예요. 전태일 열사가 다른 게 아니잖아요. 근로기준법 지켜달라고 자기 몸에 불을 지른 거잖아요. 그것도 안 되는 세상이었으니까.

그랬는데 노동조합이 되면서 근로기준법을 지키고, 그때는 그것만 해도 너무너무 좋은 거예요. 공무원들만 8시간 근무하고 일요일날 노는 줄 알았는데, 우리도 일요일마다 놀고 8시간만 일하고. 나머지는 근무외수당 받고. 퇴직금도 생기고, 상여금도 투쟁으로 받고. 그래서 노동조합이야말로 노동자에겐 생명과 같은 거구나. 정말 절실하게 느꼈어요. 노동조합 없던 데서 있던 애들이 YH에 오면, 아 노동자의 천국이구나 그랬대요. 겨우 근로기준법 지킨 게. 아이고 참.

그런데 1979년 3월에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이 난 거죠. 그때 우리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갔어요.

그때는 노동자들은 전문서적 갖고 있으면 빨갱이 취급을 받았어요. 노동자는 무식해야지 책 읽으면 안 돼. 《전환시대의 논리》같은 책이 널리 읽혔는데, 노동자가 갖고 있으면 문제야.

잡혀간 날 조합원들이 눈치를 딱 채고, 조합원 사무실에 다 모인 거야. 그때 정보과 형사가 동향 파악하러 딱 온 거지. 그런데 조합원들이 다 모여서 지부장 내놓으라고 난리가 난 거야. 그러니까 형사가 너네 지부장 간첩이라서 잡혀 갔다고, 이러면 겁 먹을 줄 알았겠죠 그런데, 조합원들이 우리 지부장이 간첩이면 우리도 간첩이니 잡아가라 이랬대. 지부장은 우리를 위해 일을 했다, 그게 간첩이면 우리도 간첩 아니냐 그래서 정보과 형사가 도망가 버린 거야.

그 당시에는 파업을 못 했거든요. 단체행동권이 묶여 있었어요. 긴급조치와 국가보위에 관한 법률에 의해서. 노동조합은 파업이 생명이에요, 파업을 못 하면 아무 권리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하는 거는 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준법투쟁, 8시간 일하면서 생산량을 떨군다거나.

그러니까 조합원들이 밥을 안 먹은 거예요. 우리 지부장이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모르는데 우리가 어떻게 밥을 먹냐, 기운 없다고 일은 느릿느릿하고.

그 다음 날은 말을 안 했어요. 침묵시위를 한 거야. 말 안 한다고 잡아갈 순 없잖아요. ‘너 왜 말 안 해’ 하고 잡아가나. 너무 골치가 아프고 답답한 거지. 마지막 날은 까만 리본을 다 달았어요. 언니가 죽었는지도 모른다 이러면서.

굶지, 말 안 하지, 리본 달고 나오지, 얼마나 섬뜩해, 정말. 그런 정서가 [위로 보고가] 올라가는 거지.

우리만 그런 게 아니에요. 원풍은 못 잡아갔어. 남자 [조합원]들이 막 수위실에서 각목을 들고 지킨 거야. 중앙정보부고 뭐고 이 새끼들 들어오면 때려 죽인다고. 못 잡아가. 그래서 원풍 박순희 언니는 조합원 입회 하에 출퇴근하면서 조사 받았어. 그래서 조직이란 게 그렇게 중요한 거다, 조직이 있었으니 그나마 풀려나고 했던 거지.

신민당사를 점거한 YH 노동자들 이 투쟁을 부마항쟁으로 이어지며 유신 정권 몰락의 신호탄이 됐다. ⓒ출처 동아일보 1979년 8월 11일자 1면, 〈경찰 농성 여공 강제해산〉

신민당사 점거 과정은 어땠습니까.

풀려나서 조합원들하고 마지막 싸움을 준비했죠. 우리는 굉장히 끈끈해 결속력이 다져져 있어서. 가족처럼. 나는 완전히 큰언니야. 그래서 우리 조합원들이 내 생일 때 금반지 해 주면서 ‘노동조합하고 약혼식하라’고.

회사에 월급쟁이 사장이 와서 이 사람이 노동조합 때문에 회사가 망한 줄 알았어요. 그랬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닌 거야. 장용호가 미국에 있으면서 안 오니까 어떻게 해? 그 자료를 우리한테 다 준 거야. 그렇게 해서 우리가 안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배신감이 어땠겠어. 이 자료를 다 가지고 조합원들 다 교육하고. 이건 YH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전국 노동자들의 문제다.

그리고 민주노조를 깨겠다. 소문도 있었어요. 차례가 있었어. 동일이 깨져나갔지, 그 다음에 YH, 그 다음 … 그래서 우리가 이왕 깨질 거 왕창 깨지자, 소리를 크게 내자, 전국 방방곡곡에 알리자, 그리고 다른 노동자들을 보호하자, 민주노조 깨는데 피해를 줘야지만 쟤네들도 겁을 먹을 거 아니냐. 그래서 내가 그때 임신 6개월이었고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고.

동일방직 똥물 사건 일어나고 하는 걸 보면서 우리도 저기 동일방직처럼 할 거다, 구사대가 들어올 거다 이러면서 기숙사 안에 연탄집게를 다 모았어요. 기숙사에서 농성을 하는데 한 3백 명 됐어요. 그런데 기숙사 문 뜯는 놈이 발견된 거예요. 이제 올 것이 왔다. 기숙사에서 농성은 올 것이 왔고, 그래서 다른 데로 옮겨야겠다 그래서 총회를 하면서 신민당사로 결정했어요.

몰래 가야 하니까, 기숙사에 사람이 있어야 하잖아요. 위장을 해야 하니까. 1백86명이 가고 남은 사람이 적으니까 많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려고, 녹음해 놨던 노래 녹음기를 같이 틀어놨어요. 그리고 새벽 6시에 목욕 가는 것처럼 해서, 그때는 플라스틱 작은 대야에 이렇게 해서 목욕탕을 다녔어요. 그런 거를 다 들고 목욕 가는 것처럼 들고 나갔어요.

쟁의기금으로 택시 타고 해서. 그때 조합비를 쟁의기금으로 모아 놨어요. 내가 그것 때문에 매번 감사 때마다 지적을 받았어요. 너네 쟁의를 할 수 없는데 왜 쟁의기금을 모아 놓느냐, 서울시가 오면, 그때는 노조 감사를 서울시에서 했어요. 그래도 이런 건 힘이 아니냐. 그걸로 투쟁 때 다 쓴 거죠.

암튼 그때 공화당도 생각을 했고, 조흥은행, 미대사관, 명동성당을 모두 생각했어요.

공화당 이 놈들한테 가 보면 어떨까 생각을 다 하다가, 신민당사로 갔어요. 그때 신민당사 위치가 마포대교 옆이고. 그때 [미국 대통령] 카터가 온단 말도 있고. 그 길로 지나갈 텐데 우릴 보게 되지 않을까. 이걸 다 토론하면서, 얼마나 토론을 했겠어요. 그 시절에 그렇게 세밀하지 않으면 힘들어요.

그땐 노동자 문제가 보도가 안 됐어요, 검열로. 그런데 기독교방송에서 처음 해 준 거야. 그리고 신민당사에 가면서 〈동아일보〉 석간에 난 거예요. 희망이 생긴 거죠.

우리가 들어가면서, 끌어내면 다 죽는다고 하자, 마포 다리에 다 빠져 죽는다고 하자, 그랬어요. 사실 그때는 해고되면 갈 데가 없었어요. 사양산업이고, 일자리도 없고, 그때는 가는 게 술집 이런 데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플래카드가 “배고파서 못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 이런 거였던 거죠.

그러면서 신민당사에서 마지막 종결대회 하고, 기동대가 열 대도 넘게 들어오는 거 보고, 우리 조합원들이 너무 억울하고, 이제 다 끌려 가겠구나 해서 4층 난간에 다 매달렸어요. 올라오면 죽겠다고.

그래서 김영삼이 올라와서 오늘 저녁에는 안 들어올 거다, 우리가 지킬 거다, 안심하고 자라 이랬는데, 그날 들어온 거예요. 그리고는 관광버스에 나눠 경찰서로 태워서 갔다. 강남서는 물까지 먹이고 이 지랄 했대.

내가 임신을 하고 이러니까, [밖에서] 유산 되면 큰일 난다 떠든 거죠. 그 당시에는 교회가 많이 활동을 해 줬어요. 나를 그래서 못 때리니까, 다른 사람들 부지부장이랑도 못 때린 거죠. 조사관 하나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시작해 보자” 이러고 조사를 시작했어요.

경찰서 조사 받으면 관광버스가 와서 데리고 기숙사에 가서 짐을 챙기는 걸 보고, 경찰 입회 하에. 그 다음에 집에 데려다가 인수인계를 하는 거야, 그 지역 경찰서에. 그 지역 담당이 하는 거야. 만약에 끝나면, 다시 만나자 이렇게 약속을 하니까, 그걸 못 만나게 하려고. 만날까 봐.

집에 인수인계를 하는데 깜짝 놀란 거지. 얘가 돈 벌러 갔는데, 난리가 난 줄 안거야. 경찰이 맨날 집 앞에 와 지키고 이러니까. 그러고는 당신 딸 빨갱이 되니까 조심해라 하고, 경찰이 계속 미행하고 그러니까 재취업도 힘들고.

그래서 그때 뭐 복직은 못했지만, 성공했다, 그걸로 해서 노동자의 억울함을 세상에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당시에 공장을 해산하면 융자가 우선[순위 채권]이었어요, 임금이 아니고. 은행에 갚아도 돈이 부족하니까. 그런데 이제 임금이 우선으로 돼요. 그나마 그런 것도 달라졌고. 노동자 억울함 이런 것도 알려지고. 학생들도 현장으로 들어가고, 관심을 더 갖게 되고.

이제 부마항쟁도 일어나면서 바로 박정희 유신 독재 정권이 무너지게 됐죠.

그때 우리가 [민주노조 활동가들] 토론 모임이 있었는데, 투쟁 전에 술자리에 가면 무슨 말들 하는지 알아요. 야, 유신정권이 언제 무너지냐, 박정희가 언제 무너지냐 하면 박정희가 무너지겠냐, 지만이가 육사 갔는데, 우리 살아 생전에 유신이 무너지는 걸 볼까, 이랬어요. 그렇지만, 노동운동은 해야 한다, 내 자식을 위해서라도.

미국이나 유럽 노동운동사에 총 쏴서 죽고 이러면서 발전하는 걸 보면서 단체행동을 어떻게 할건가. “파업만 할 수 있다면!” 그게 우리 꿈이었어요. 나중에 모여서 우리 힘으로, 여성 노동자의 힘으로 유신정권을 무너뜨렸구나, 우리 싸움은 성공이다, 이랬어요.

2008년에 김경숙 열사 사망 원인이 타살로 밝혀졌습니다.

나중에 노동부 어떤 사람이 글을 썼는데, 어린 여성이 보름달을 보면 충동이 생긴다 뭐 어쩌고 썼다더라. 미친 놈이.

당시에 조합원 50명을 모아서 김경숙을 본 사람을 알아내려고 노력했는데 본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자살인지 타살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자본가와 국가가 우리를, 김경숙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이렇게 정리했어요. 그런데 30년 지나서 알고 보니 지네가 죽였어. 떨어진 곳도 세 번이나 바뀌고. 지네들이 떨어졌다고 한 곳엔 창문도 없어. 동맥 절단도 안 했고.

아무튼 그때 외부 차단하고 못 만나게 하고, 시골에 경숙이 남동생, 엄마 등등 이렇게 있는데 삼촌이 경찰 회유책에 넘어간 거예요. 서울 못 오게 엄마를 수원 여관에 있게 하고는 바로 화장시킨 거야. 장례식도 못 하고. 우리는 감옥에 있으니까 알지도 못하고. 석방되고 나서는 바로 5·18 항쟁 나고 그러니까 추모를 못 하고. 새문안교회 지하에 모여서 하고.

1989년 그러니까 우리 투쟁 10주년에 모란공원에 가묘를 만들었어요. 모란공원에 전태일 열사, 김경숙을 보면서 노동의 역사를 보게 해야겠구나 했는데, 그것도 또 정부가 못 들어가게 했어요. 그래서 납골당으로 임시로 갔다가 나중에야 [정식으로 묘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모란공원에 가면 다 역사를 볼 수 있어요. 모든 게 다 그냥 이루어진 게 아니라 투쟁에 의해 얻어진 결과예요. 수많은 노동자들이 그런 희생들이 쌓여서 이루어진 거거든. 이름도 빛도 없이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박근혜가 최근에 박정희 시대에 대해 사과 비슷한 걸 했는데요.

경제 성장과 YH 특혜는 우리 나라 기업들이 다 그래요. 그러다가 바람만 불면 후르르 넘어지고, 피해는 노동자가 보고. 박정희 시대란 게 인혁당이나 장준하 선생의 사건들을 보면 얼마나 사람들의 희생을 담보로 한 것이냐고요. 우리도 당시에는 정말 인혁당 사건이 정말 간첩 사건인 줄 알았어요. 노동운동하면서 알았지만 쉬쉬하니까 자세히 모르고.

그 가족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면서 이것은 그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당시에는 애를 낳지 않겠다 그런 각오를 하지 않으면 노동운동을 한다는 것이 어려웠어요. 중앙정보부 놈들은 인혁당 사건처럼 애를 볼모로.

정말 진정으로 사과하려면 인혁당 평가를 제대로 해내는 것이 할 일이죠. 또 아버지가 만든 경제의 잘못된 구조와 성장, 이런 부분에 대해서 제대로 평가해야 해요. 박근혜가 후보를 사퇴하면서 ‘정말 죄송합니다’ 하면서 반성하고 역사를 제대로 평가하겠다고 한다면 진정한 반성이고 제대로 된 평가라고 할 수도 있어요.

근데 이거는 지지율이 떨어지니까, 인혁당을 민혁당이라고 하는 정도의 말도 안 되는. [박근혜가] 자기 아픔을 그 사람들 아픔과 비교하면 안 된다, 그건 비교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절대 박근혜는 안 돼요.

올해 7월에 YH 투쟁과 관련해 국가 배상을 받으셨죠?

작년에 시작했는데, 국가배상 1심이 끝났어요. 국가가 항소를 했어요. 처음에 재판을 가니까, 우리 건이 없어. 그래 주욱 보니까 피고가 ‘대한민국’이래요.

아 우리가 대한민국 상대로 싸우는구나. 그 돈 받아서 뭐하겠어요? 지금도 노동자들이 당하고 있으니까 우리 선배들이 이런 거라도 해서 도움을 주자. 언젠가 진실은 밝혀진다. 국가가 그런 짓거리 하는 것들은 결국은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 지금도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우리 선배들이 좀 싸우면 희망을 줘야 되고. 국가에게는 언젠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걸 보여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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