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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방현석이 베트남 전쟁에 대해 말한다

소설가 방현석이 베트남 전쟁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왜 파병에 반대해야 하는가?

저는 《하노이에 별이 뜨다》라는 책에서 베트남이란 나라를 한 마디로 이야기하라고 하면 ‘비록 부자는 아니지만 자부심이 있는 나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고 쓴 적이 있습니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후로 미국은 20여 년 가까이 경제 봉쇄를 했습니다. 그래서 베트남은 종전 이후에도 굉장히 어려운 경제 사정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1991년에 가서야 비로소 미국과 베트남이 수교관계를 다시 회복합니다.

베트남의 자부심은 자기 역사로부터 비롯합니다. 베트남은 당대 최고의 무력을 가진 최강국들과 모두 한 차례씩 전쟁을 한 나라입니다.

베트남은 1천 년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서기 9백 년대가 돼서야 비로소 중국으로부터 독립해서 독립 국가를 이룹니다. 그리고 1859년까지 독립 국가를 유지합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프랑스 식민지가 돼 1백 년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습니다.

베트남은 중국, 프랑스, 일본 그리고 미국과 차례로 싸워서 이겼습니다. 미국과의 전쟁은 너무 잘 알려진 사실이죠. 미국은 전쟁을 해서 전승 1무 1패를 했죠. 1무는 한국에서 했고, 그 다음 1패를 베트남에서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베트남 전쟁은 흔히 두 차례의 전쟁으로 나뉩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 불리는 프랑스와 베트남 간의 전쟁이 있고, ‘2차 인도차이나전쟁’이라고 불리는 베트남과 미국 간의 전쟁이 있습니다. 한국이 참전했던 전쟁은 바로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었습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45년부터 시작한 전쟁입니다. 프랑스는 1백 년 동안 베트남을 지배하다가 제2차세계대전에서 독일에 패배하죠. 그러자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이 베트남에 진주합니다. 일본은 베트남을 1941년부터 실질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처럼 직접 총독부를 두고 지배하지 않고 식민지를 다스리고 있던 프랑스 총독부를 그대로 두고 프랑스 관리들을 앞세워서 식민지 통치를 계속합니다. 1944년 일본이 종전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프랑스를 몰아내고 직접 통치에 나섭니다. 그러다가 1945년에 베트남은 일본의 패전과 더불어 독립하게 됩니다.

이 독립의 과정은 한국과 매우 유사하지만, 좀 다른 점이 있습니다. 한국은 많은 무장투쟁을 했지만 일본으로부터 직접 권력을 접수하지는 못했죠. 반면, 베트남은 베트남 인민해방군이 직접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고 하노이를 접수했습니다.

전승 1무 1패

그러나 한국에서 1945년에 미군과 소련군이 일본의 무장해제와 독립정부 수립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삼팔선 양쪽으로 주둔한 것과 마찬가지로, 영국과 [중국의] 장개석 군대가 일본의 무장을 해제시킨다는 명분으로 베트남에 진주합니다. 17도 선을 중심으로 해서 남쪽에는 영국군이 들어오고 북쪽에는 장개석 군대가 들어옵니다.

그런데 북쪽의 장개석 군대는 중국 대륙에서 마오 정부와 싸우는 과정에서 패퇴하면서 궁지에 몰려 스스로 철수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북쪽은 호치민이 지도하는 인민해방군이 독립정부를 세웠고, 남쪽 영국 휘하에서는 바우다이를 앞세운 허수아비 정부가 들어섭니다.

한국에서도 그랬듯이 [영국군] 진주 당시 자유선거를 통한 통일국가를 수립한다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은 자유선거를 해야 할 의무를 지키지 않고 일방적으로 철수해 버렸습니다. 물론, 그냥 철수한 것은 아니고 프랑스군을 불러들여 베트남의 남쪽을 프랑스에 넘겨주고 철수했습니다.

프랑스와 영국이 아프리카와 아시아 국가들을 나눠 가질 때 영국은 프랑스가 베트남을 점령하는 데 대해 양해한 바 있습니다. 영국은 [프랑스에게] ‘이것[베트남]은 니꺼니까 니들이 가져’ 하고 나갔죠. 프랑스는 이게[베트남] 원래 자신들 것이었으니 되찾아야겠다면서 1945년에 다시 들어온 겁니다.

1945년에 프랑스군이 들어오자 당시 북베트남을 지도하던 호치민은 이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와 장기간 협상에 들어갑니다. 직접 프랑스에 가서 2개월 동안 섬에서 대기하는 모욕을 감내하죠.

호치민은 최종적으로 베트남이 상대적 독립성을 갖는 한 프랑스에 연방으로 편입되는 것까지 수용하는 양보안을 내놓았지만 프랑스는 그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두 달 동안의 협상은 무위로 끝나고 호치민은 베트남에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죠.

호치민은 베트남이 겪어야 할 비극과 희생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양보를 해서라도 이 전쟁을 피하고자 했죠. 그러나 프랑스는 양보하지 않고 1949년부터 17도 선을 넘어서 북베트남을 공격합니다. 결국 북쪽 정부를 유지하던 호치민을 수반으로 하는 지도부는 수도 하노이를 내놓고 다시 산악지대로 후퇴하게 됩니다. 이 때부터 시작된 전쟁이 1차 인도차이나 전쟁, 프랑스와 베트남 간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1954년까지 지속됩니다.

이 전쟁을 끝낸 전투는 디엔비엔푸 전투였습니다. 세계 10대 결전 중 하나로 전사(戰史)에 나오죠. 북베트남은 프랑스의 공격을 받아 산악지대로 후퇴하면서 산악지대에 근거를 두고 게릴라전을 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의 산악지대의 중심인 디엔비엔푸라고 하는 베트남 서북쪽 산악지역에 비행장 두 개를 가진 군사기지를 건설합니다. 여기에 접근할 수 있는 도로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병사와 보급은 모두 공중 수송을 통해서 조달했습니다. 여기에 1만 5천 명의 프랑스 최정예 부대가 주둔했습니다.

바로 이 철의 요새라고 했던 디엔비엔푸가 1954년 1월부터 베트남 인민해방군의 공격을 받아 3개월 만에 함락됩니다. 단 한 대의 헬리콥터도 가지고 있지 않던 북베트남이 공중 무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철의 요새를 공격해서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대포를 분해해 소와 사람의 힘만으로 산꼭대기로 가지고 올라가 폭격하고, 비행장 밑으로 땅굴을 파고 들어가 비행기가 출격할 수 없게 해 프랑스군을 괴멸시켰죠. 3개월 간의 전투 끝에 프랑스군 5천 명이 사살당하고 생존자 1만 명이 전원 항복했습니다. 드미트리 사령관을 비롯한 1만 명이 포로로 잡혔는데, 이것은 세계를 경악시켰죠.

프랑스는 이 전투에서 괴멸당해 철수했죠. 그것이 1954년이었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식민지 군대가 제국주의 본국의 군대를 물리치고 항복을 받아 낸 전쟁이었습니다.

프랑스가 물러난 다음 빈 자리로 찾아간 게 미국이었습니다. 1954년은 한국전쟁이 끝난 다음 해입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빼낸 군사력을 가지고 베트남전쟁에 개입합니다.

물론 프랑스와 베트남이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도 전비의 90퍼센트를 미국이 제공했습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도 실제로는 미국과 베트남의 전쟁이었고 그 수행을 프랑스가 대신했을 뿐이었죠.미국은 전쟁을 시작하면서 45일 안에 베트남을 완전히 접수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전쟁의 명분은 ‘통킹만 사건’이죠. 역사책에 나오는 이 사건은 베트남의 앞바다 비엔동을 항해하던 미국 함대를 북베트남이 어뢰로 공격했다는 사건입니다.

미국은 이를 응징하기 위해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이 만든 조작이었다는 것이 미국 자신의 문서를 통해 이미 다 폭로됐습니다. 북베트남은 어뢰로 공격한 적도 없었죠.

그것은 미국이 항상 전쟁을 시작할 때 쓰는 거짓 정보에 의한 사기극이었습니다. 이라크에 쳐들어갈 때도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한다고 했지만 지금까지 대량살상무기는커녕 ‘소량살상무기’도 발견한 사람이 없었죠.

이렇게 미국은 1965년에 베트남에서 전면전을 시작했고 이 전쟁은 1975년까지 10년간 계속됐습니다. 미국은 이 전쟁이 동양과 서양의 전쟁으로 비치는 것을 굉장히 피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이 아닌 여러 국가들을 이 전쟁에 끌어들이고 싶어했죠. 특히 베트남과 똑같은 피부 색깔을 가진 사람들을 이 전쟁에 투입하고 싶어했습니다. 그 요청에 의해서 한국은 베트남전에 발을 들여놓았죠.

2.5배

이 전쟁에 참전했던 베트남 상주 병력은 오스트레일리아가 2백 명에서 1천 명 정도였습니다. 뉴질랜드가 30명에서 5백 명 정도 주둔했습니다. 대만이 30명 참전했습니다. 필리핀은 17명에서 가장 많을 때 2천 명이 참전했습니다. 태국은 1만 1천 명이 참전했습니다. 영국은 의장대 6명이 참전했습니다. 한국은 상시 5만 명이 주둔했고, 연인원 35만 명이 참전했습니다. 미국은 상시 주둔 35만 명이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미국 다음으로 전투부대를 실질적으로 파견해 운영한 국가는 한국뿐이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미국은 45일 안에 끝낸다는 전쟁을 10년 간 진행하면서 제2차세계대전 당시 사용된 폭탄의 2.5배에 해당하는 폭탄을 베트남에 퍼부었습니다. 그러고도 미국은 이 전쟁에서 지고 말았죠. 이 전쟁에서 왜 졌는지 미국은 지금까지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죠.

미국이 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선, 미국이 지원했던 남쪽 정부와 북쪽 정부의 성격 차이에서 비롯했습니다.

북베트남 지도부인 북베트남 정치위원 최고 지도부 11명은 전원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프랑스에 의해 베트남 최남단의 섬에 있는 꼰다오 감옥(한번 들어가면 살아나오기 어렵다는)에 수감됐거나 해외에서 독립투쟁을 벌였던 사람들로만 구성됐습니다.

반면, 미국이 지원한 ‘자유민주주의 세력’ 남쪽의 고 딘 디엠 정부의 각료 전원은 프랑스와 일본 총독부에 협력했던 친일·친프랑스 반민족 분자들이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베트남 국민들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었습니다.

고 딘 디엠과 호치민은 같은 고등학교 동창생들이에요. 그러나 그 두 사람이 걸어간 길은 정반대였죠. 고 딘 디엠은 프랑스 앞잡이가 돼서 프랑스의 장관으로 일하고 나중에 미국이 들어왔을 때는 다시 미국의 앞잡이가 돼서 대통령이 됐죠. 반면, 호치민은 평생을 해외로 떠돌면서 독립 투쟁을 했고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런 지도자가 이끄는 세력과 프랑스와 일본에 이어 미국에 자기 나라를 판 지도자가 이끄는 세력의 전쟁에서 어느 쪽이 이길지는 너무나 자명했던 것이죠.

그러나 이렇게 옳다고 해서 [늘]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죠. 베트남 전쟁을 수행한 주체들의 탁월한 전쟁 의식과 전술들이 베트남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보 구엔 지압 장군은 세기의 전술가로 꼽히고 있죠. 베트남 전쟁을 이해하려면 인민전쟁 전술을 이해해야 합니다.

지압은 베트남 전쟁의 성격을 제국주의 침략 전쟁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는 제국주의 침략 전쟁이 침략 자체가 아니라 침략해서 지배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봤습니다]. [또한] 그는 바로 이 점이 제국주의 전쟁의 무서운 점이고, 제국주의 전쟁의 피할 수 없는 약점 또한 이 속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지압 장군은 제국주의 군대가 지배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군대를 분산하지 않을 수 없고, 이렇게 되면 반드시 약점, 취약한 고리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점을 주목했습니다. 바로 그 취약한 고리가 공격의 대상이고, 그 곳으로부터 강한 부대를 붕괴시킨다는 것이 인민전쟁 전술의 핵심입니다.

그런 전쟁은 게릴라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게릴라 부대는 기지가 없어 상대가 공격할 수 없는 부대입니다. [그래서] 미국은 [자신들이] 전투를 하고 싶을 때 [맘대로] 하기 어려웠고, 전투의 선택권은 항상 베트남 쪽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공격하고 싶은 약한 고리가 발견되었을 때, 그 곳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1968년 ‘구정공세’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1968년은 미국에서 반전 운동이 굉장히 드높아질 때였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반전 운동에 맞서서 6개월 이내에 베트남 전쟁을 끝내겠다고 공언했습니다. 그 때 지압 장군은 전 병력을 동원해서 주요 도시들에 대한 공격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비록 단 한 시간이지만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점령해 미국을 경악에 빠뜨렸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미국이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는 얘기가 모조리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미국 내에 보여 주게 됐습니다. [그 결과] 미국은 내부에서 패배하기 시작합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에서 처음으로 전쟁에 나간 아이들이 바보 취급을 받는 전쟁이 돼 버렸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나갔던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더러운 전쟁에 참전한 사람들이라는 낙인이 찍혔고, 미국에서 반전 운동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 미국은 더는 전쟁을 수행하기 불가능할 지경이 됐습니다.

한국군은 이러한 미국을 궁지에서 탈출시켜 주는 데 가장 주요한 역할을 한 군대였습니다. 한국군[파병]은 1964년에 이동 야전병원을 파견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군대를 파견하는 순서는 언제나 정해져 있습니다. ‘인도적 차원’에서 의료부대를 파견합니다. 그 다음, ‘재건을 지원하기 위해’ 공병대를 파견합니다. 그 다음에 그 공병대를 지키기 위해 전투병을 파견합니다. 그리고 전투병이 희생되면, 그 전투병을 보호하고 [적을] 응징하기 위해 정규 전투부대를 파병하죠.

1965년에 이어서 비둘기부대라는 공병대가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 비둘기부대를 보호하기 위한 경비적 성격을 띤 전투부대가 들어가고, 이어서 바로 해병대가 들어갑니다. 청룡부대라는 이름으로 편성된 해병대가 베트남 중부에 진입하고 이어서 육군인 맹호부대와 백마부대가 차례로 베트남에 들어갑니다.

평균 5만 명의 병력이 베트남에 주둔했습니다. 1973년까지 한국군은 총 35만 명이 베트남에 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은 4천9백50명이 전사했고 1만 명이 불구가 됐습니다. 그리고 지금 6만 명이 고엽제 후유증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 전쟁에서 미국 다음으로 많은 희생을 치른 나라가 한국입니다.

물론 베트남이 치른 희생은 말할 것도 없지요. 베트남은 이 전쟁에서 민간인 1백50만 명이 죽었습니다. 군인들보다 민간인들이 훨씬 많이 죽었습니다. 군인은 남베트남 정부군 20만 명, 북베트남 정규군과 민족해방전선 소속 군인 90만 명을 합친 1백10만 명이 죽었습니다. 사망자 수는 당시 베트남 인구의 10퍼센트에 해당합니다. 베트남 사람 10명에 한 명이 죽고 10명에 한 명이 불구가 된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희생당한 것은 베트남뿐이 아니었습니다. 베트남 인근 라오스, 캄보디아도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라오스 국민 1인당 5백 그램의 폭탄이 라오스에 투하됐습니다.

반공주의와 공포

한국이 베트남에 간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한국 내의 반공주의를 더 강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알다시피 박정희 정권은 1961년 4·19혁명을 통해 등장한 민주정부를 무력으로 전복하고 강제로 정권을 탈취한 정통성 없는 친일파 출신의 군사정권이었습니다. 이 정통성 없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국민들을 통제해야 했고, 그 통제의 강력한 수단은 반공주의였습니다.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자들을 빨갱이로 몰아서 탄압하고 정권을 공고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베트남에 파병하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두번째로는 이 정통성 없는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특히 미국의 강력한 지지가 필요했습니다. 박정희는 자발적으로 미국이 가장 아쉬워하는 것, 가장 가려운 곳을 긁어 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베트남전에 참전하겠다는 제안을 [미국보다] 먼저 하게 됩니다.

일부 학자들이 밝혀 낸 자료만 봐도 한국군이 베트남전에서 학살한 양민 숫자가 9천 명이 넘습니다. 이것은 드러난 숫자일 뿐입니다.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한국이 강고한 반공주의 교육을 받은 나라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군이 때로는 미군보다 더 잔인했다고 말했습니다.

한국군과 직접 전투를 했던 판반꾹이라는 유격대장을 베트남 중부에서 만났을 때 그에게 들은 얘기는 이렇습니다.

당시 그는 15살 소년이었는데 한국군이 처음 들어올 때 상부로부터 이렇게 배웠습니다. ‘한국군은 미국의 용병이고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끌려온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적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국군을 적으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싸우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한국군들이 자기 마을에 들어왔고, 당시 집에 있던 사람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학살당했습니다. 그는 숲 속에 숨어서 학살 장면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끝까지 지켜보았고 자원입대해서 산에 들어갔습니다. 그 사건 때문에 그 부대의 당시 슬로건은 ‘청룡을 찢어죽이자’가 됐습니다. 그는 한쪽 발목을 잃은 후 다행히 살아남아서 여생을 보내고 있지만 지금도 한국군의 죄상에 대해서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한국군이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베트남 땅에 가서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한 이유는 ‘빨갱이는 사람도 아니다.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는 강고한 반공 교육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공포였죠. 이 전쟁에서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들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총 들고 전선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베트남에 갔더라도 전부 후방에 있었습니다.

시골 출신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들, 국민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사람들이 전방에 총알받이로 나갔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베트남은 낯선 땅이었고 우리 편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어떤 베트남 사람들이 자기 나라에 들어 온 남의 나라 군대를 환영하겠습니까? 모두가 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나를 공격할지 알 수 없는 공포. 그렇기 때문에 흔들리는 것은 나뭇잎이라도 없애 버려야 안심이 되는 이런 공포 속에서 그들은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 속에서 양민들이 희생당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것은 외국군이 어느 나라에 파견되더라도 동일하게 반복될 수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한국은 베트남에 사과하고 보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 조건 없이 이 피해자들에게 배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갚은 배상에 대해서 미국에 배상할 것을 요구해야 합니다.

전쟁 교본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평화적 방법으로 강요할 수 없는 정치적 의지를 상대에게 강요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해서 정치 행위를 벌이는 것’. 이것이 전쟁입니다.

전쟁은 정치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전쟁은 전면적인 정치 행위입니다. 남의 의지를 꺾고 나의 의지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이 전쟁입니다. 미국은 베트남과 이라크에서 그 의지를 강요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였습니다. 한국은 베트남에 강요해야 할 어떤 의지가 있었습니까? 우리가 이라크에 강요해야 할 어떤 의지가 있습니까?

이것이 없다면 전쟁의 당사자일 수 없습니다. 다만 용병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베트남으로부터 배우고 베트남에 진정으로 사과하는 길은 베트남에 가서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시는 그런 역사적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라크에 파병하면서 베트남에 미안하다고 하는 말은 전부 거짓말일 뿐입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계와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반전운동을 하는 것은 전쟁을 반대하기 위해서라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세계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지를 공부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는 사회의 다른 문제들과 연관돼 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을 대하는 한국 정부의 태도를 보면, 도대체 한국의 정치인들은 미래의 한국을 어떤 나라로 만들려고 하는지 아무런 구상도 없습니다.

미국은 무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 방법에는 희생이 따르죠. 9·11테러가 괜히 일어났습니까? 미국인들은 이제 앞으로 세계 어디서도 마음 놓고 거리를 활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비록 부자일지 모르지만 어디서나 테러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은 더 큰 테러들을 통해 그 테러를 응징하려고 할 겁니다. 그것이 미국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면 한국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한국도 세계에서 테러의 대상이 되고 싶은가? 그리고 그 테러를 한국은 더 큰 무력을 동원한 테러로 응징할 수 있는가?

한국은 평화로운 방법으로 세계와 진정한 친구가 되는 길을 통해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 이익도, 이해관계도 없는 나라에 총부리를 겨누는 전쟁에 파병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들, 특히 약자에 해당하는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정리 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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