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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할 진보정치의 독자성:
미국식 양당정치는 왜 재앙인가

진보정당의 위기와 분열 속에서 독자적 진보정치를 강조하기보다는 민주통합당을 중심으로 계급을 뛰어넘어 단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되고 있다.

〈한겨레〉는 미국의 ‘뉴딜연합’ 사례를 들어 이런 주장을 뒷받침했다. “야권 후보들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을 하나로 묶고, 항구적인 다수 정치세력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개혁·진보 대연합’의 루스벨트가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2년에 당선해 ‘노동자 프렌들리’ 정책을 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그러한 계급연합과 독자적 진보정치의 실종이 미국 진보의 역사에 낳은 재앙적인 결과를 외면하고 왜곡하는 것이다.

1930년대에 접어들 무렵 미국 노동운동은 침체에 빠져 있었다. 당시는 1910년대에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좌절되고, 러시아 혁명에서 영감을 받아 거세게 일어난 파업이 패배를 겪은 지 얼마 안 된 시기였다. 이때 대공황이 세계경제를 강타했다.

미국 남성의 3분의 1이 실업 상태가 됐다. 물가가 폭등하고, 빈곤층은 기아에 허덕였다. 그런데도 공화당 대통령 후버는 긴축을 핑계로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민주당의 루스벨트는 이런 시기에 당선했다. 남부 노예주들의 정당으로 탄생했고, 대도시의 부패한 정치 기구들을 중심으로 조직됐던 민주당이 대공황을 이용해 정국을 장악했다. 후버와 공화당에 대한 광범한 불만은 ‘심판론’으로 이어졌고, 많은 미국인들이 루스벨트를 노동계급의 친구로 생각했다.

하지만 루스벨트 자신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자산가들은 내가 이윤 체제의 가장 든든한 친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며 불평했다. 루스벨트는 대공황이 사회 혁명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뿌리 뽑힌

그러나 루스벨트 임기 첫해부터 대규모 파업이 분출했다.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는 투쟁은 자동차를 비롯한 주요 산업을 거의 마비시키기까지 했다.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거대한 계급투쟁에 직면한 루스벨트와 사장들은, 노동자들에게 양보하고 사적 이윤을 규제하는 조처들을 시행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았다.

이것이 ‘뉴딜’의 시작이다. 사회보장제도와 고용보험으로 연방정부 복지의 기초를 닦고, 현장조직 건설을 합법화하는 듯한 몇몇 구절이 노동법에 포함된 것은 명백히 거대한 노동계급 투쟁의 성과였다.

1937년, 상황이 변했다. 공황의 폐해는 더 심해졌고, 사장들은 ‘뉴딜’에 대한 지원을 줄였다.

재선이 불확실해진 루스벨트는 노동조합의 보수적 중앙 지도부들이 민주당에 충성 경쟁을 하도록 조장했다.

노동조합 중앙 지도부들은 현장 노동자들의 전투적 파업이 루스벨트와 맺은 동맹에 해가 된다고 여겼다. 그들은 정부와 사장들이 제시하는 협상안을 받아들이고 파업을 자제하라며 노동자들을 설득했다. 루스벨트 재선이 투쟁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비극적이게도, 파업 건설을 주도했던 공산당도 뉴딜 정권의 ‘왼쪽 방’에서 ‘합법적’으로 운동을 건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공산당은 노동조합 중앙 지도부의 민주당과의 밀월을 전혀 비판하지 않았고, 독자적 노동자 정당 건설 요구도 거둬들였다. 1938년에 이르러서는 파업 조직의 핵심이었던 공장 활동가 조직과 공장 신문들도 없앴다. 몇 년 뒤에는 아예 당을 해산했다.

진보의 무비판적 지지에 힘입어 재선에 성공한 루스벨트와 민주당은 잔혹하게 반격을 펼쳤다. 파업 중인 남부 시카고 철강 노동자들을 학살하고,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하는 내내 모든 파업을 금지했다.

반공 캠페인

제2차세계대전 직후, 억눌려 있던 분노가 대규모 파업으로 폭발했다. 그러나 이미 민주당에 확고하게 정치적으로 종속된 노조 지도부는 파업을 억제하는 데 앞장섰다. 그들은 루스벨트의 뒤를 이은 민주당 트루먼 정부와 ‘3년 파업 금지’ 협약까지 맺었다.

그 다음 수순은 체계적인 탄압이었다. 1947년에는 부문을 넘어선 노동자 연대가 불법화됐다. 정부가 직접 주도하는 체계적인 반공 캠페인이 전국을 휩쓸었다.

1930년대에 파업을 건설한 공산당의 기층 당원들은 소련 간첩으로 몰렸다. 최소한 수백 명이 감옥에 갇혔고, 2만 명 가까이가 작업장에서 쫓겨났다. 민주당 정권의 탄압이 얼마나 체계적이었는지, 공화당 상원의원 매카시는 더 공격할 사람이 없어서 무고한 사람을 마녀사냥 해야 했다. 노동조합은 심각하게 약화됐고, 진보운동 전체가 극도로 위축됐다.

1960년대 공민권 운동, 반전운동, 여성운동 등도 민주당을 벗어나 독자적 정치세력화로 나아가진 못했다. 공민권 운동 덕분에 당선한 민주당의 케네디와 그 후임인 린든 존슨은 흑인들의 폭발적 투쟁에 밀려 마지못해 공민권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 둘은 베트남 전쟁과 폭격을 확대하며 진보를 배신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 진보운동은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이루지 못했고, 민주당은 공화당과 함께 우경화했다. 공화당이 결사반대하고 민주당이 찬양하기 급급한 오바마의 의료보험제도(이른바 ‘오바마케어’)는 사실 미국 최악의 부패 우파라는 공화당 대통령 닉슨이 1970년대에 제시한 내용과 똑같다.

미국이 서방 선진국 중에서 가장 복지가 형편없고 경제적 양극화가 심각한 이유는 간단하다. 노동계급 정치세력화의 노력이 중단된 이후, “싸우는 형제들”인 두 자본가 정당이 전국 정치를 지배해 왔기 때문이다. 진보운동이 민주당의 ‘왼쪽 방’에 들어가 버린 대가다. 이것은 한국의 진보운동이 절대 가지 말아야 할 길이다.

그 점에서 이 나라 진보진영의 일부가 민주당과 ‘묻지마 야권연대’나 연립정부까지 추구하는 것은 매우 우려스럽다. 이미 그 과정에서 온갖 불미스러운 일과 비판받을 일이 벌어졌는데도 말이다.

옳게도, 민주노총은 최근 일부 노동조합 상층 관료들의 문재인·안철수 캠프 합류를 비판하며, “노동중심의 진보정치는 결코 멈출 수 없는 민주노총의 중요한 과제”이며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방향은 여전히 굳건하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 다짐은 결코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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