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독자편지는 이연상 씨가 쓴 독자편지 '나의 자본가에 대한 이해'(글 보기)에 대해 몇 가지 의견을 덧붙이는 것이다. 


스탠포드 감옥 실험에 대해 이연상 씨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해석한 것은 타당하다. 즉 사회가 인간 행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그 실험이 시사하는 점을 잘 요약한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말처럼 “자본주의에서…감정은 물건을 팔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모든 가치와 생명들이…자본의 자기 확장을 위해 이용된다.”

한편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면” 안 된다는 이연상 씨의 말도, 실험 대상자들 중 죄수 역할을 한 사람들이 집단 행동을 한 것이나 실험 중간에 빠진 실험자의 행위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인간이 주어진 조건과 상황에 이런 저런 방식으로 반작용하는 주체라고 본다는 점에서 옳다. 그래서 우리는 이연상 씨의 말처럼 “생산수단의 공유를 통해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가들이 그들 스스로 자신의 지위를 포기하지 않을 텐데”, 굳이 우리가 “정상참작을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정상참작”은 이연상 씨의 불분명한 자본, 노동, 착취 개념에서 비롯한 것 같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노동은 무엇보다 먼저 인간과 노동대상 사이의 한 과정, 즉 인간이 노동대상과의 질료 변환을 그 자신의 행위에 의해 매개하고, 규제하고, 통제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계급 사회가 출현하면서 직접 노동하는 다수의 생산자와 스스로 노동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소수의 지배자들이 생겨났다. 인간의 노동은 착취의 대상이 됐다. 자본가들은 다른 사람의 노동을 착취하는 것이지 스스로 노동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들이 노동한다면 우리는 자본가들이 스스로 자신의 노동을 착취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경영이란 노동을 조정, 계획, 통제하고 군림하는 행위다. 즉 경영은 근본적으로 착취를 통해 얻는 이윤을 확대하기 위한 행위다. 이연상 씨의 생각과 달리 이런 행위는 ‘생산수단’을 ‘공유’하는 ‘이상적인 사회’에서는 필요하지 않다.

자본의 서로 다른 형태에 대한 이연상 씨의 진술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건희라는 자본가는 삼성전자로 “노동자를 고용하며 해고하고”, 또 삼성생명과 에버랜드를 통해서도 “노동자를 고용하며 해고하고” 금융과 부동산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 “불특정 다수를 우롱하며 이익을 챙긴다.” 금융자본가는 자본순환에 기여하면서 자본주의 사회가 착취를 통해 얻은 이윤의 일정한 몫을 챙기는 자들로 다른 부분의 자본가들보다 더 나쁘지도 덜 나쁘지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