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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익히는 마르크스주의:
사회 변혁 조직은 어떻게 운영돼야 하는가

오늘날 자본주의를 바꾸려는 젊은 반란자들 중 일부는 모든 종류의 집중주의적 조직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사상(자율주의, 아나키즘 등)에 매력을 느낀다. 이들은 운동을 특정 방향으로 이끌려는 노력(리더십, 한국말 옮김으로 ‘지도’)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기도 한다. 물론, 그 극단적 형태를 수용하기보다는 부분적으로만 수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자본주의의 비민주적 억압기구와 껍데기뿐인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반감이 이런 ‘연성 자율주의’의 한 배경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민주주의는 없고 집중주의만 있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실제로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에서는 모든 당원이 모스크바에서 결정한 노선에 복종해야 한 반면 민주주의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2007년 이랜드 점거 파업 당시 분임토론하는 노동자들 노동계급 투쟁의 본질 그 자체에 민주주의와 집중주의적 요소가 결합돼 있다 ⓒ임수현

그러나 진정한 혁명은 그 어떤 엘리트도 대신할 수 없는 노동계급의 자기해방 과정이므로, 민주주의는 필수적이다. 민주주의가 없다면 그 조직은 노동계급의 현재 의식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따른 적절한 전술을 내놓을 수 없을 것이고, 자신들의 주장이 옳았는지 입증할 수도 없을 것이다.

또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는 교조가 아니라 나날이 변하는 현실 속에서 원칙을 적용하는 가장 적절한 방식을 새롭게 찾아 나가는 활동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토론은 꼭 필요하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더불어 집중주의도 필요하다. 노동자연대다함께와 같은 사회 변혁 조직은 민주집중제 원리에 따라 활동한다. 이것은 완전한 토론의 자유에 이어서 분명한 행동 통일이 뒤따르는 것이다.

집중주의적 조직과 리더십 그 자체가 반민주적인 것은 아니다. 무엇을 위한 조직이고, 집중이며, 리더십인가가 중요하다.

노동계급 투쟁의 본질 그 자체에 맹아적으로 민주주의와 집중주의적 요소가 결합돼 있다. 자본주의의 심장인 이윤에 타격을 미칠 수 있는 노동계급의 힘은 그 집단성에서 나온다. 노동자들이 뭉치지 않고 자신이 일하는 공정만 떼 간다고 해서 사회주의를 이룰 수는 없다.

가령, 노조가 파업과 피켓팅(대체인력 투입을 저지해 파업 파괴를 막는 행위)을 하기로 민주적 토론을 통해 결정한 후에도 일부가 그 결정을 무시한다면 파업의 효과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때, ‘파업하지 않을 자유’는 ‘파업을 파괴할 자유’일 뿐이다. 따라서 투쟁이 승리하길 바라는 사람이라면 노조의 규율을 지지해야 한다.

단지 파업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 도전하는 운동 전반에도 이런 집중주의는 필요하다. 우리는 자본가 권력과 노동자·피억업자의 민주주의가 사이좋게 공존할 수 없다고 본다. ‘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자본가들의 이윤과 이를 수호하는 자본주의 국가권력에 도전해야만 가능하다. 착취와 억압이 없는 사회를 건설하려면 우리의 요구는 단지 “권력 반대”가 아니라, “자본가 권력을 노동자 권력으로, 자본가 민주주의를 노동자 민주주의로”여야 한다.

그리고 만약 집중주의가 없다면 우리는 고도로 집중된 자본주의 체제와 국가권력에 맞서 효과적으로 싸우기 어렵고, 우왕좌왕하거나 각자 다른 실천을 하느라 아무것도 효과적으로 해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혁명 조직은 활동가들이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서로 문제 삼지 않는 느슨한 연방적 조직이어서는 안 된다.

반면 역사적으로 ‘아나키즘의 아버지’ 프루동 같은 ‘무한 개인 자유 옹호론자’들은 노동계급의 조직된 세력을 혐오했다. 그들이 옹호한 자유는 노동자 계급이 집단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자유가 아니라, 조직의 민주적 결정조차 무시하는 개인적 ‘자유’였다. 그들은 정치적 자유를 옹호한 게 아니라, ‘정치로부터의 자유’를 원했다.

이렇게 조직과 리더십에 극단적 거부감을 갖는 개인주의자들이야말로 엘리트주의적이다. 그들은 어떤 집단적인 민주적 결정에도 종속받으려 하지 않고, 흔히 노동계급 투쟁의 역사나 다른 운동 참가자들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는다.

보고와 소통

행동 통일 없는 민주주의는 진정 민주적이지도 않다. 실컷 토론을 통해 결정해 놓고 행동 통일이 따르지 않는다면 토론은 무의미할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민주적 결정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게 된다. 토론에 따른 결정을 함께 힘을 모아 실천해 보지 않으면 과연 그것이 옳았는지 입증하기도 어렵고 제대로 배울 수도 없다.

또, 그저 각자 행동하면 그만일 뿐이라면, 소통과 피드백은 필요 없게 된다. 그래서 집중주의적 조직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보고에 대해서도 반감을 갖곤 한다. 이들은 보고가 ‘아래’에서 ‘위’로만 일방적으로 이뤄진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혁명 조직에서 보고는 상호 소통을 위한 수단이며, 이것은 여러 방향으로 이뤄질 수 있다.

보고 없는 조직은 혈관 없는 신체나 다름없다. 자신의 활동과 운동 관련 정보들에 대한 신속하고 정확한 보고, 조직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 다른 운동 참가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에 대한 평가는 꼭 필요할 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다. 이런 일이 없다면 도대체 조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직의 견해가 올바르게 입증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따라서 민주적 토론과 논쟁이 가능하지도 않다.

‘자율’ 사상은 지도가 일방적이고 관료적일 수밖에 없다고 여기지만, 지도는 충분히 쌍방향일 수 있다. 오히려 민주집중제 하에서는 조직원들이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그 결과가 자신의 실천을 규정하기 때문에, 이 모든 과정이 지도부만의 과제가 아니라 곧 자신의 과제가 된다. 그래서 혁명조직의 활동가들은 토론과 실천 모두에서 능동성과 자주성을 미덕으로 여긴다. 리더는 가만히 앉아서 지시만 내리는 게 아니라, 나날이 자신의 지도력을 입증받아야만 한다.

물론, 자본주의 체제가 가하는 압력 때문에 혁명조직에서도 수동성과 부문주의, 형식주의가 싹틀 수 있다. 따라서 혁명조직의 회원들은 민주적 토론과 그에 바탕한 활동을 활성화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나날이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도 개인주의적 조직관에 대한 논쟁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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