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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전 종전 10년

부시 정부가 들어선 뒤 이라크에 대한 대규모 폭격이 네 번이나 있었다. 미국과 영국은 1998년 12월부터 이틀에 한 번 꼴로 이라크를 폭격해 왔다. 폭격과 경제 제제는 평범한 사람들을 죽음에 몰아 넣고 있다. 걸프전이 종전된 지 1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걸프전의 공포는 계속되고 있다.

10년 전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는 걸프전을 일으켰다. 이라크에 폭탄이 빗발치고 있을 때 그는 “새로운 세계 질서”의 여명에 관한 연설을 했다. 그 뒤 우리는 그 “새로운 세계 질서’의 시대를 살고 있다. 부시의 전쟁은 42일 동안 계속됐다. 2월 28일에 전쟁이 끝났을 때 이라크의 사망자 수는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보수당 소속의 당시 영국 총리 존 메이저와 노동당 지도자 닐 키녹이 전쟁을 지지하는 데는 한 치의 틈도 없었다. 우리는 이라크의 지배자 사담 후세인이 악마 같은 폭군이기 때문에 그 전쟁은 필요한 것이고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새로운 히틀러” 후세인을 제거해야만 한다는 말도 들었다.

그보다 여섯 달 전에 사담 후세인은 인접 국가인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미국 외교관들이 미국은 그런 침공을 전혀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라크 외교관들에게 말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다. 후세인이 이라크 내 소수 민족인 쿠르드족을 상대로 화학 무기를 사용한 것을 포함해 사담 후세인을 무장시키고 그를 지원한 세력이 바로 서방이었다는 사실도 알려지지 않았다.

후세인이 무례하게 굴고 서방이 그를 벌하기로 결정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가 서방과 거래해 온 무자비한 폭군이었다는 진실 또한 알려지지 않았다. 대신에 전쟁을 정당화하는 거짓말이 넘쳐났다. 이라크 병사들이 쿠웨이트 병원에서 인큐베이터 안에 있는 아기들을 살해했다는 말도 있었다. 그것은 거짓말이었고 쿠웨이트의 지배자였던 알 사바 왕가에서 지어 낸 이야기임이 나중에 밝혀졌다. 우리는 전쟁이 쿠웨이트의 민주주의를 복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쿠웨이트에는 애당초 민주주의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그런 거짓말들은 미국의 진정한 동기 ― 석유와 지배력 ― 를 은폐하기 위한 것이었다.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한 거짓말

1990년대는 소련의 붕괴와 함께 시작됐다. 미국은 이제 자신이 중동과 세계에서 최강의 지배자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 중동은 석유 때문에 중요했다.

이라크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서 세계 제2위의 석유 확인매장량[현재까지 발견된 기술을 통하여 저류층으로부터 회수 가능한 매장량 ― 옮긴이]을 자랑하는 국가다. 이라크는 세계 석유 공급의 11퍼센트를 좌우한다. 미국 국무부는 1945년에 석유가 “역사적으로 다른 어떤 상품보다 미국의 대외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고 기록했다.

미국 국무부는 아라비아 반도와 페르시아 만[걸프]이 “전략적 힘의 엄청난 원천이며, 세계 역사상 가장 큰 물질적 보상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의 진짜 이유는 정치가들의 입에서 매우 드물게 새어 나왔다.

군부와 정치가들은 이라크를 폭격하고 있는 죽음의 기술이 거둔 성공을 더 좋아했다. 미국 군부는 자신들이 내보낸 보도 자료와 꾸며 낸 이야기를 그저 되풀이하는 대부분 언론의 도움을 받았다. 텔레비전은 진짜로 끔찍한 장면을 내보내지 않도록 검열을 받았다. 죽음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나 몹시 충격적인 장면들은 금지됐다. 민간인 사상자들을 언급할 때는 “부수적 손실”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우리는 “외과 수술처럼 정확한” 공습과 “스마트한’ 폭탄이 그런 “부수적 손실”을 피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도 역시 거짓말이었다. 이라크의 주택들은 무너져 내리고 학교와 병원들은 치명적인 무기들로 타격을 입었으며 폭격을 맞은 건물에서는 토막난 사람의 몸이 끌려나오고 있었다.

바그다드의 병원을 빠져 나온 어떤 여인은 “나는 죽은 애를 꼭 껴안은 어머니들이 고통에 겨워 울부짖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이 먹을 우유도 없었고 약도 없었다. 내가 본 참상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미국이 우리에게 하고 있는 일은 비인간적인 짓이다.”라고 말했다. 이라크의 사회 기반 시설은 폭격을 맞아서 먼지가 됐다. 도로, 철도, 교량, 용수 처리 시설, 공장, 발전소, 모든 것이 그랬다. 그러나 전쟁에 관한 서방의 거짓말이 완전히 먹혀들 수는 없었다. 전쟁에 대한 반대도 있었다.

1991년 1월 12일, 폭격이 시작되기 나흘 전에 10만 명이 참가한 런던의 시위 행진을 포함하여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이 반전 시위를 벌였다. 영국 전역의 작업장과 주택 지구에서 사람들은 전쟁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고 언론 노동자들도 신문·라디오·TV에서 나오는 피에 굶주린 보도에 도전했다.

피비린내 나는 서방의 석유 전쟁

전쟁은 2월 28일에 끝났다. 미국과 영국과 그 연합국들이 취한 마지막 조치는 이미 항복하고 쿠웨이트에서 이라크 남부로 철수하고 있던 바스라 도상의 이라크 군대를 학살한 것이었다. 어떤 미국 병사는 그 학살을 “칠면조 사냥”이라고 묘사했다. 5마일에 걸쳐 줄지어 퇴각하던 이라크 병사들은 몇 시간 동안 흠씬 두들겨 맞았다. 머지사이드의 세인트 헬렌스 출신 걸프전 참전 병사인 존 캘러핸은 1996년 5월에 자기 신발 끈으로 목을 매 죽었다.

그의 사촌 레스는 존이 “바스라 도로 위에서 차량을 소각시킨” 기억 때문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얘기해 줬다. “그는 차량에서 몸통과 팔과 다리를, 그리고 어린애들을 끌어냈다. 그것은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는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기들이 이라크 포로 몇몇을 감시하고 있다고 했다. 너무 어린 그들이 너무나 애처로웠다. 그들은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실제 그들은 전혀 병사가 아니었다.”

작년에 미국의 언론인 시모어 허쉬는 바스라 도상의 학살에 관한 자세한 기사를 썼다. 그의 말에 따르면 미국의 장군 배리 먹캐프리는 전쟁을 끝내자고 한 휴전 이틀 뒤에 의도적으로 학살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바스라가 얘기의 끝이 아니다. 전쟁 끝 무렵에 이라크 남부의 시아파 이슬람 교도들과 북부의 쿠르드족이 사담 후세인에 맞서 봉기했다. 그들은 부시와 메이저가 전쟁의 원흉이라고 지목했던 “악마 같은 폭군”을 타도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민중 혁명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담 후세인이 두 봉기를 모두 잔인하게 진압하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기만 했다. 전직 국가안보회의 중동 국장이었던 리처드 하스는 “우리의 정책은 사담을 제거하는 것이지 그 정권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전쟁은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지 못했다. 폭격과 학살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후세인의 정권을 강화시켜 주었고 이라크 사회를 파괴했을 뿐이다. 어떤 이라크 사람이 〈유에스에이 투데이〉에게 말했듯이, “내가 사담에 대해 갖고 있던 의문은 사라져 버렸다. 이제 나는 내 힘과 내 수돗물과 내 딸의 어린 시절을 앗아간 미국에 대항하여 그가 일어서기를 바란다.”

전쟁의 목표는 “페르시아 만의 석유 공급이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뤄지도록 보장하려는 것이다. ― 로버트 키멧, 미 국무부 관리, 1991년.

“그것은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쿠웨이트에 민주주의가 정착되기를 바란다고 시사하는 것은 위선이다. 사담 후세인이 잔인한 지도자이기 때문에 개입이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정책이 잔인한 지도자들을 처벌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시리아의 아사드 대통령과 동맹을 맺지 말았어야 한다. 전쟁은 후세인이 우리의 석유 생명선을 쥐고 흔들지 못하게 막으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사활적인 경제적 이익을 지키는 것에 대해 사과해서는 안 된다.” ― 리처드 닉슨, 미국의 전 대통령, 1991년.

“석유는 전쟁을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 〈비즈니스 위크〉, 1991년.

“페르시아 만의 석유에 대한 접근권과 그 지역의 주요 우방국들의 안전은 미국의 국가 안보에 사활적이다. …… 여전히 미국은 그 지역에서 극히 중대한 자국의 이익을 수호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 조지 부시 대통령, 1991년 1월 15일의 국가안보 지령 54호, 걸프전의 목표와 목적을 요약하면서.

공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라크를 상대로 한 전쟁은 경제 제재 조치를 통해 계속되고 있다. 전쟁 전의 이라크는 현대적인 학교가 있는 세련된 나라였다. 이라크의 의료 서비스는 그 지역의 부러움을 샀다. 이라크는 세계에서 유아 사망률이 가장 낮은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은 유아 사망률이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한다. 전쟁과 경제 제재는 초인플레, 대중 빈곤, 사회적·경제적 혼란과 해체를 가져왔다.

1991년 이래 계속된 경제 제재는 달마다 5천에서 6천 명의 이라크인을 살해했다. 정화되지 않은 생활 하수를 그대로 수로에 버리기 때문에 콜레라와 장티푸스가 풍토병이 됐다. 현대적인 병원에는 기본적인 응급 약품은커녕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경제 제재는 종이를 이라크 국내로 반입하는 것을 금지해 왔고, 고무·타이어·연필·위생 수건·주사기 …… 그 목록은 끝이 없다. 1998년에 유엔의 이라크 인도주의 조정관인 데니스 핼리데이는 경제 제재 때문에 사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하나의 사회를 통째로 파괴하고 있다. 그것은 간단하지만 끔찍한 일이다. 그것은 불법적이고 부도덕하다.” 핼리데이의 후임자 역시 사퇴했다.

클린턴의 국무장관이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1996년에 TV에 출연했을 때 경제 제재의 결과로 이라크 어린이 50만 명이 죽은 것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그녀의 대답은 “우리는 그 희생이 치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영국 노동당도 경제 제재를 굳건하게 옹호한다.

영국 외무장관 피터 헤인은 지난 1월 〈가디언〉과의 회견에서 “식량, 의약품, 농산물, 교육 기자재, 물, 위생 관련 제품들을 포함하여 많은 재화를 이라크에 수출하기 위해서는 그저 유엔에 통보하기만 하면 된다.”고 뻔뻔스럽게 거짓말했다.

후세인에 대한 복수심은 경제 제재로 그치지 않았다. 1998년 12월에 4백 기의 크루즈 미사일을 발사한 것을 포함해서 이라크에 대한 폭격은 계속 되풀이됐다.

미국과 영국은 이라크 북부와 남부에 ‘비행 금지 구역’을 설정했다. 그 구실은 그들이 1991년에 포기했던 쿠르드족을 보호한다는 것인데, 바로 그 쿠르드족을 미국의 동맹국인 터키 정부는 학살하고 있다. 비행 금지 구역을 위반하는 이라크 비행기들은 격추당한다.

미국과 영국은 1998년 12월 이래로 사실상 이틀에 한 번 꼴로 이라크를 폭격해 왔다. 그것은 언론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1999년 3월에 〈가디언〉이 사설에서 “영국 비행기들은 2차대전 이후 최장 기간의 폭격 작전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사담 후세인은 여전히 권좌에 남아 있다. 고통받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뿐이다.

〈워싱턴 포스트〉가 1998년에 썼듯이, “승리의 도취감은 8년이 지나면서 잿더미 같은 공허함으로 바뀌었다. 1992년 중반에 CIA는 사담 후세인이 이라크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걸프에서 군사력의 사용은 걸프전 이래 줄곧 끊임없는 재평가의 대상이었고, 가장 최근에 폭탄과 미사일을 발사한 것은 논쟁을 더 심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열화 우라늄 지옥

미국은 치명적인 열화 우라늄으로 만든 무기들을 엄청나게 많이 투하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식량을 얻는 비옥한 토지인 바스라 시 남부의 들판이 특히 심한 타격을 입었다. 열화 우라늄은 이라크 병사들의 폐 속으로 침투하여 그들이 처음으로 병에 걸리게 됐다.

토마토, 양파, 감자, 고기도 우라늄 찌꺼기에 오염됐다. 1998년에 언론인 로버트 피스크는 “똑같은 독성 잔류물이 바스라의 강과 하수도로 스며들었음에 틀림없다.”고 썼다.

전투가 끝난 뒤에 전진하여 이라크 기갑 부대의 오염된 잔해를 파괴한 미군 병사들도 그 우라늄 찌꺼기에 노출됐다. 오늘날 이라크 남부에서는 암이 4배로 증가했고 어린이들은 백혈병과 임파종 암으로 죽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