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돌아보기 ─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박근혜 세력이 연루된 또 하나의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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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사냥이 뭔지 궁금하다면,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 불리는 1991년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을 보면 된다. 당시 강기훈 씨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유서 대필 사건’은 1991년 4월 명지대 1학년생이던 강경대 열사의 죽음과 이를 계기로 폭발한 5월 투쟁과 깊은 관련이 있다. 당시 강경대 열사는 대학 민주화와 등록금 인상 반대를 위한 시위에 참가했다가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백골단’의 야만적 폭력에 살해됐다.
강경대 열사의 죽음에 항의하는 시위는 5월 1일 메이데이를 거치며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기 시작했다. 당시 고물가와 전세대란, 수서 비리 사건 등으로 민심도 노태우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다. 한홍구 교수의 말마따나 “정권이 흔들흔들했다.”
겨우 입학한 지 채 두 달도 안 된 신입생이 잔혹하게 살해됐다는 사실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찢어지게 했다. 분신이 연이었다.
분신 항거는 당시 사회의 위선에 대한 질문이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사회는 진정 민주화했는가? ‘시대에 역행하는 투쟁의 깃발은 이제 내려야 하는가?’ 노태우와 보수언론의 대답은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눈에 강경대의 죽음은, 노태우 정부가 실은 민간인의 옷을 입은 군부독재였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노태우 정권의 생명줄을 연장해 준 야당의 야합
저항이 커지자 지배자들은 마녀사냥으로 반격했다. “달라이 라마가 티벳인들의 분신을 사주하고 있다”는 중국 지배자들의 역겨운 적반하장과 꼭 마찬가지였다. 당시 한국의 지배자들도 “분신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세력이 있다”는 상상초월의 엽기 소설을 떠들어 댔다
서강대 총장 박홍은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어둠의 세력이 존재한다”며 조중동과 우익을 기쁘게 해줬다. 이런 ‘어둠의 세력’의 ‘사주를 받은’ 검찰은 “분신 배후 세력 수사”에 나섰고, 강기훈 씨가 희생양이 됐다.
낙인
당시 검찰은 고
거의 유일한 물적 증거는 국립과학수사대의 필적 감정뿐이었다.
그러나 각본과 결론은 이미 짜여 있었다. 반드시 운동권을 “동료의 생명까지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는 비인간적 반인륜적” 집단으로 낙인찍어야 했다. 법원은 검사가 ‘대필’한 듯한 판결문을 가지고 강기훈 씨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그 후 시간은 20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강기훈 씨는 세간의 편견에 시달리며 암을 얻었다. 강기훈 씨는 2007년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결과 무죄 판정을 받았고, 2009년 고등법원도 무죄 취지의 재심을 요청했다. 대법원은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야 재심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대법원의 재심 결정은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과거사위원회가 새로 발굴한 증거는 김기설 씨의 필적이라고 판단할 수 없다며 재심 사유로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검찰은 강기훈 씨가 조작했을 것이라고 망발했다.
결국 대법원의 메시지는 ‘사회 여론에 밀려 재심은 결정하지만, 최종 판정은 다음 정권에 가서 보겠다’는 것인 듯하다. 사실, 거의 ‘내전’ 수준의 좌우 격돌 끝에 무죄를 판결 받은 드레퓌스 사건 만큼이나, 강기훈 씨의 무죄 판결은 아직도 험난하다.
예를 들어, 그를 수사한 9명의 검사들은 승승장구했다. 게다가 이들 중 상당수는 현재 박근혜 캠프에 속해 있거나 그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당시 검찰총장이던 김기춘은 정수장학회 장학생 모임인 상청회 회장을 거쳐 현재 박근혜의 ‘7인회’에 속해 있다. 강신욱은 2007년 박근혜 대선캠프 법률지원특보단장이었다. 곽상도는 박근혜의 싱크 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 발기인이다. 남기춘은 박근혜 캠프의 클린검증 소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윤석만은 박근혜를 외곽조직에서 지원하고 있다. 여러 모로 박근혜 세력과 진실은 양립할 수가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