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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마트로 이어진 미국 노동자 투쟁 물결

미국 국제사회주의조직(ISO) 활동가이자 한국계 미국인인 크리스 킴이 〈레프트21〉에 미국 월마트 노동자들의 파업 소식과 그 의의를 정리해 보내 왔다.

미국에서 제일 큰 소매점이자 노동자를 가장 많이 고용한 월마트가 미국 최대 쇼핑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블랙 프라이데이”에 노동자들의 도전을 받았다.

월마트 노동자들은 10월 초에 12개 주에서 강도 높은 착취와 열악한 노동조건에 항의하며 파업을 한 바 있는데, 무노조 기업인 월마트는 노동자들에게 보복을 했고, 노동자들은 이런 사측에 맞서 “블랙 프라이데이”때 파업에 돌입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올해에는 특별히 추수감사절 밤에 시작한 세일에 맞춰 파업을 시작한 노동자들은 전국 1백 개 도시, 1천 개 상점에서 시위를 벌였다. 식품 산업 노동조합(UFCA)의 지지와 ‘우리 월마트’(OUR Walmart)의 협조로 조직돼, 서비스 노동조합(SEIU), 팀스터즈(Teamsters), 시카고 교원노조(CTU), 정의를 위한 창고 노동자(WWJ), 미국 교사 연맹(AFT), 흑인 노조연합(CBTU), ‘점거하라’ 운동가와 LGBT 활동가 등의 연대 속에서 파업이 벌어졌다.

적게는 1백 명, 많게는 1천 명 이상 참가한 이 파업은 캘리포니아주의 여러 도시들을 포함해 달라스, 시카고, 디트로이트, 위스콘신주의 메디슨 등에서도 벌어졌다. 지나가는 자동차에서 격려의 뜻으로 경적을 울려 주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 투쟁은 7월에 벌어진 시카고 교원노조 파업에서 영감을 얻어 9월 15일에 일리노이주 엘우드에서 월마트 창고 노동자 38명이 벌인 파업에서 시작됐다. 여러 노동조합들을 포함해 6백 명 정도의 활동가와 조직 들의 연대 속에서 그들은 3주 동안 싸워 승리를 거뒀다.

파업시간도 포함해 전체 임금 지불을 약속받은 이 승리를 통해 10월 초에 월마트 노동자들의 파업은 로스엔젤레스, 달라스,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마이애미, 워싱턴 DC 등 전국 12개 주에 있는 25개 상점으로 확산됐다.

월마트는 “블랙 프라이데이” 일주일 전부터 노동조합이 “불법”적으로 월마트의 사업을 혼란시키려 한다며 식품 상업 노동조합을 ‘불공정노동행위’로 신고했을 뿐 아니라, 중앙 노동 위원회 게시판을 통해 “블랙 프라이데이” 파업을 금지해 달라고 고소했다.

직원들에게 파업에 참여하지 말 것을 강요하는 강연까지 열었다. 미국 노동법에는 비노조 노동자들의 파업권도 인정돼 있지만, 고용주가 파업한 노동자를 해고시킬수 있는 권리도 인정돼 있다. 다시 말해 법적으로는 사측과 노동자 양쪽이 서로 “평등”한 “권리”를 갖고 있는 셈이지만 실제로 작용될 때는 사측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반노조 탄압

월마트의 노동현장은 어떨까? 매일 2백70파운드 무게의 그릴을 트럭으로 운반하는 다니엘 미도스는 〈레이버 노트스〉와 인터뷰에서 “일과 후에는 [너무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다. 무릎팍은 항상 멍이 생길 정도다”, “[사측은] 매일 해고하겠다고 협박한다. 그들은 일하는 사람을 언제든 바꿀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 한다”고 하소연했다.

월마트 창고 노동자인 마이크 콤튼은 “우리는 그저 '몸뚱아리'일 뿐이다”, “저들은 우리의 안정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다. 항상 더 세게 밀라는 요구밖엔 없다”고 했다. 창고에서 일하는 욜란다 디커슨은 “일상적으로 성회롱을 당한다”고 고백했다.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착취의 강도와 반노조적 탄압은 다른 회사들도 참고할 정도로 악명 높다.

“2007년에서 2010년까지 대부분의 일반 가구의 부는 38.8퍼센트 줄어든 반면, [월마트의 창립자] 월튼 가문의 부는 7백33억 달러에서 8백95억 달러로 늘었다.”(경제정책연구소(EPI)의 연구 및 정책 이사 죠쉬 비벤스)

2007년 월튼 가문의 전체 부는 미국 가구 하위 30.5퍼센트의 부를 합친 것과 같았는데 2010년에는 하위 41.5퍼센트의 부를 합친 것과 같아졌다. 또, 월마트 CEO 마이크 둑의 시간당 소득은 월마트 노동자들이 1년 동안 얻는 소득보다 많다. 월마트의 일반 노동자들은 시간당 8달러 81센트밖에 못 받고 노동자 중 3분의 1은 주당 노동시간이 28시간 이하인 이유로 사측의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한다.

월마트의 통신 부회장 데이비드 토발은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소수고 종업원 대부분을 대표하지 않는다며 “우리는 지난 몇 년 사이 종업원 설문조사와 관련자 만족도 점수가 상승하는 것을 보았으며 그것은 노조들이 준비한 이벤트에 참여한 몇몇 노동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을 “몇몇 노동자”라고 하는 것은 월마트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노동 언론가 죠쉬 아이델슨은 〈데모크라시 나우!〉에서 “이들[파업 노동자들]은 역설과 좌절에 의해 아주 격렬한 행동을 택했으며 이것은 분명히 많은 노동자들도 공감하는 것들이다. 어떤 대변인이나 설문조사도 그 좌절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설명해 줄 수는 없다” 하고 지적했다.

〈허핑턴 포스트〉도 “파업 참가자들에 의하면, 참여한 동료들의 수가 적은 이유는 사측이 노동조직에 참여하는 종업원들을 자주 협박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파라마운트에서 만난 노동자 세 명도 파업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저임금, [복지] 혜택의 삭감 그리고 보복에 대한 파업 참가자들의 요구에 동의했다. 하지만 해고될까 봐 파업에는 참여하지 못했다고 〈허핑턴 포스트〉에 고백했다”고 했다.

전국적 투쟁

주류 언론들은 “블랙 프라이데이” 파업의 결과에 대해 월마트에 타격을 주지 못했으며 파업 자체는 “실패”했다는 기사들을 실었다.

월마트도 “블랙 프라이데이” 아침에 텔레비젼 1백30만 개, 수건 1백80만 장, 그리고 자전거는 25만 개나 팔았다고 과시했다. 실제로 파업을 지지한 많은 소비자들도 월마트의 “블랙 프라이데이” 세일 자체를 거부하지는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마음은 “블랙 프라이데이” 파업에, 몸은 “블랙 프라이데이” 세일로 향한 그들 역시 저임금 노동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랙 프라이데이” 파업은 미국에서 가장 크고 노조도 없는 월마트의 50년 역사상 처음으로 일어난 역사적인 파업이 전국으로 번진 투쟁이라는 의미가 있다.

6월 월마트의 공급 업체인 CJ씨푸드 매점에서 노동자 8명이 파업을 한 것을 계기로 9월에 일리노이주에서 노동자 38명이 파업을 벌였고 캘리포니아주에서 60여 명이 참가한 파업으로 이어져 결국 전국에서 수백 명이 파업에 나선 것이다. 이들의 투쟁은 끝이 아니라, 앞으로 더욱 커질 수 있는 투쟁의 시작을 보여 주는 것이다.

월마트에 대한 저항은 2001년 1백50만 명이나 되는 전현직 월마트 여성 노동자들이 월마트를 상대로 임금과 승진 차별을 받았다며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집단 소송을 신청한 일로 시작해 여러 노동자 조직들과 페미니스트들, 환경주의자들의 저항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월마트 노동자들의 저항은 지난해 위스콘신 노동자 투쟁, 버라이즌 노동자 파업 그리고 월가 점거 운동에 이어 몇 달 전에 승리한 시카고 교원노조 파업과 함께 10년 전에 비하면 더욱 강화되고 급진화하는 노동운동의 중심이 돼 있다.

9월에 시카고 교원노조는 “안전한 노동조건을 위한 권리를 위해 싸우며 일리노이주와 캘리포니아주에서 파업하고 있는 창고 노동자들에게 연대를 보낸다” 하며 월튼 가문의 ‘월튼 페밀리 파운데이션’이 “교육 개혁”에 수백만 달러를 투자한 사실에 대해 “교육자들로서 우리는 공교육을 민영화시키고 차터스쿨[자립형 공립학교]를 늘리려는 월튼 가문 기금도 반대한다” 하고 선언했다.

시카고 다운타운에서는 “블랙 프라이데이” 파업에 연대한 시위대 50여 명과 시카고 노동자 조직위원회(WOCC) 회원들이 매이시 백화점 내부를 일시적으로 점거해 다운타운 소매점과 식당 노동자들의 생활임금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는 등 투쟁의 연대와 확산의 잠재력을 보여 줬다.

“블랙 프라이데이” 파업은 월마트 노동자들이 투쟁의 “첫 단추”를 제대로 채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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