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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노동자 강라이가 코리안 드림에 대해 말한다

이주 노동자 강라이가 코리안 드림에 대해 말한다

“31일 단식에도 끄떡 않는 한국 정부, 제2 제3의 사마르 타파 만들 것”

강라이. 30대 초반의 네팔 출신 이주 노동자이고, 이주 노동자 밴드 ‘스탑 크랙다운’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

시끄럽고 번잡한 거리를 피해 골목길로 접어든 강라이를 따라 가파른 언덕길을 꽤 걸었다. 10년 넘는 그의 이주 노동자 생활에 대해 듣고 싶다는 우리를 그는 자기 자취방으로 안내했다.

“여기서 벌써 10년 넘게 살고 있어요. 옥탑방인데 삼겹살 먹으며 소주 한 잔 하기 딱 좋죠. 다음엔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해요.”

얘기하는 폼이 영락없이 한국인이 다 됐다. 한나라당 옛 총재 이회창도 모르는 낱말 ‘옥탑방’은 벌써 10년째 그의 생활 터전인 데다, 이주 노동자의 시름도 소주로 달래 왔을 터였다.

좁은 방에 차곡차곡 들어찬 짐들도 한국에서 보낸 그의 시간을 드러내고 있었다. 컴퓨터, 악기, 앰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시디들, 그리고 컴퓨터 서적들과 소설책들 사이로 법률 서적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한국에 오기 전에 강라이는 대학생이었다. 졸업하자마자 한국에 왔다. “법학과 인류학을 전공했어요. 그 때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아 친구들하고 공연도 했고요.”

옥탑방

왜 한국에 오기로 결심했는지 물었다. “음악도 하면서 돈도 벌자고 결심했던 것이죠. 한국에 오기 전에 홍콩에 머물며 ‘어디로 가야 하나’ 생각했는데, 제 친구는 일본으로 갔고 저는 한국을 선택했어요. 올림픽 때문에 잘 사는 나라라고 생각했고, 우리랑 모습도 비슷하니까요.”

강라이는 산업연수생제도가 시작되기 전인 1992년, 이주 노동자들의 처지가 지금보다 몇 배나 팍팍했던 시절에 낯선 한국 땅을 밟았다. 한국의 이주 노동자 처지에 대해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당시에는 한국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올림픽을 통해 아는 정도였으니까요. 저는 홍콩에서 태어나 네팔에 가기 전에 7∼8년을 거기서 자랐고, 한국에 오기 전에도 홍콩을 들렀어요. 한국에 오면 홍콩보다 높은 빌딩들이 더 많을 거라고 상상했죠. 그런데 공항에 내려 보니 상상한 것과 다르더라구요.”

상상했던 것과 달랐던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요즘에는 한국 상황을 많이 알고 오기도 하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한국에 가면 돈 많이 벌 수 있다, 운동화 끈만 끼어도 돈 많이 벌 수 있다, [한 달에] 5∼6백 달러 벌 수 있다, 하루에 8시간만 일하면 된다는 얘기를 들었죠. 그런데 여기 오니까 완전히 달랐죠. 그런 건 꿈도 꿀 수 없는 얘기였어요.

“처음부터 사기를 당했어요. 김포공항에서 이태원에 오는 데 3명이 당시 돈 15만 원 주었어요. 처음엔 그런가 보다 했죠. 그런데 며칠 뒤에 사기인 것을 알게 됐어요.

“이태원에서 바로 대구로 갔어요. 그 곳에서 제가 잊지 못할 나쁜 추억이 생겼어요. 대구에서 자동차 부품 나사 만드는 일을 했어요. 굉장히 힘든 일이었죠. 저랑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6명 정도 됐죠. 제가 영어도 할 줄 알고 해서 리더 격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동료 형 하나가 밤에 일 끝나고 공장 식당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어요. 저희가 먹을 수 있는 게 라면밖에 없었거든요. 그런데 라면 봉지를 식당 바닥에 버렸나 봐요. 관리자가 밤에 오더니 자는 사람들 다 깨워서 ‘누가 이거 버렸냐’고 했어요. 그 형이 자기가 했다고 했죠. 엄청 혼났어요. 그래서 제가 그 봉투를 집어 버리려고 했더니 굳이 그 형더러 하라는 거예요. 더구나 손으로 하지 말고 입으로 하라는 거예요. 우리가 동물도 아닌데 입으로 해야 되나요? 손이 있는데.

“그 때 저는 엄청 충격받았어요. 그래서 바로 다음 날 엄마한테 전화했어요. 당시에는 전화비도 만만치 않았어요. 1만 원짜리 카드 하나 넣으면 몇 분 만에 금방 끝나요. 어머니에게 당장 돌아가겠다고 말했죠.

“좀더 참을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그 관리자는 밤에 술 마시고 와서 우리 다 깨워서 일 시키고, 야근 수당을 받는 것도 아닌데 말예요. 그리고 조금 잘못하면 푸쉬업[팔굽혀펴기] 시키고 … 상상하고 완전히 다르잖아요. 그래서 안 되겠다, 가야겠다 했죠.

“제가 가겠다고 하니까 친구들도 다 따라나서려고 했어요. 그랬더니 나와 함께 가지 못하도록 관리자가 친구들을 딴 곳으로 데려가 버렸어요. 12일 정도 일했는데 작업복 값과 이것저것 떼이고 10만 원 정도 받았어요. 돈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이죠.

“당시에 저는 한국말 ‘어디입니까?’ 정도를 알았고, 다행히 한글은 읽을 수 있어 표지판을 이용해 동대구까지 혼자 가서 버스를 타고 서울 강남터미널로 올라왔어요. 강남터미널에서 이태원으로 오는 데 또 [택시 값] 사기를 당했죠. 이태원에 한 달 정도 머물면서 한국어도 배우고 한국에서 살 마음을 다시 얻었죠. 한국에서 10년 넘었으니까 이런 얘기를 하자면 엄청 많죠.”

우리가 동물도 아닌데

강라이는 그 많은 사연을 어떻게 다 얘기하겠냐는 듯 잠시 말을 멈췄다. 네팔에서 대학도 졸업한 그가 그런 모멸적 대우를 견디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에 따르면 네팔에서 법대를 졸업하면 대부분 변호사를 한단다.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어요. 제가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 나라에서 내가 갖고 있는 실력을 당당하게 인정받고 일할 수 있으면 정말 다른 좋은 일을 할 수도 있는데 말예요. 그러지도 않으면서 밑바닥 일[이라도] 행복하게 하고 있는 것[마저] 인정하지 않으니 그건 좀 많이 억울하죠.

“공장에 처음 들어가면 이주 노동자라고 많이 무시해요. 아직도 그래요. 그 뒤에 나에 대해 점점 더 알게 되면, 그래서 내가 그 사람들의 자식들에게 영어나 수학을 가르쳐 준다거나 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할 수 있는 실력이 있는 걸 알게 되면 나에게 미안해 하고 나중에는 무시하지 않아요.”

같은 일을 하는 한국인들과의 격차도 그를 괴롭혔다. “옛날에는 봉급 차이가 말도 못했죠. 우리 봉급은 많이 밀리기도 하고요.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요. 이주 노동자들이 주로 작은 기업에 다니니까 보너스도 받지 못하고, 빨간 날[휴일]에도 쉬지 못하고, 그런데도 하루만 아파서 일 못하면 짤리게 되고 …. 가슴 아픈 일이 많죠.”

무엇보다 IMF 때가 참 어려운 시절이었다. “원래 서울에서 방 얻어 살면서 일하면 돈 못 벌어요. 지방에서 일하거나 아예 공장에서 살아야죠. 한 달만 일 못해도 생활비는 계속 나가니까요. 공장이 잘 안 되면, 대기업 같은 경우는 놀아도 봉급이 절반이라도 나올 텐데 작은 기업은 돈이 아예 하나도 안 나와요. 몇 달 기다려야 돼요. 저는 봉제 공장을 다녔는데, 봉제 공장은 잘 될 때는 잘 되지만, 비가 와도 안 되고, 눈이 와도 안 되고, 엄청 더워도 안 되고 … 그럴 때는 일을 못 해 힘들지요. 특히 IMF 때는 일이 아예 없었어요. 벌어 놓은 돈 쓰기만 했죠.”

그런 강라이에게 한국은 도움의 손길 한 번 내민 적이 없는 나라였다. 일하는 데 필요한 한국말도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정부나 회사의 한국어 배우기 지원 같은 게 있었냐는 물음에 그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전혀 그런 적 없고요. 같이 일했던 노동자가 ‘기역, 니은, 디귿’ 이런 걸 적어서 가르쳐 줬어요. 그 뒤엔 스스로 배웠죠. 처음에 한국말 배운 게 뭐냐고 물으면 ‘빨리빨리’일 거예요. 일할 때 무조건 ‘빨리빨리’ 하니까요. 처음엔 망치 가져오라고 하면 물통 갖다 주고 그랬어요. 그래서 공장장이 ‘아이, 못 살아’ 그러면 나도 똑같이 ‘아이, 못 살아’ 하고 따라 했죠.”

그는 모자라는 잠을 참으며 새벽에 컴퓨터도 공부했지만 나은 일자리를 구하는 데 쓸모가 없었다.

“원래 컴퓨터를 좀 했기 때문에 한국에 와서는 전문적인 코스를 배웠어요. 한 달에 20∼30만 원 들었는데요, 새벽 5시에 일어나서 학원 갔다가 9시부터 일하고 7시에 끝나면 음악 학원에 다니곤 했죠. 그 때 배운 걸로 일을 얻었으면 돈도 많이 받았을 텐데 …. 좀 아쉬워요. 그 기술로 일자리를 얻을 수가 없으니까요. 제가 배운 것을 쓸 수 없는 게 아쉽죠.”

강라이는 이주 노동자에 대한 한국 정부와 방송, 한국인들의 차별에 대해 정곡을 찔렀다.

“한국은 차별이 엄청 심한 나라예요. 나라를 따지죠. 네팔이나 방글라데시 같은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고 하면 무시하고 인상 쓰고, 미국이나 영국 같은 부자 나라에서 왔다고 하면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죠.

“이런 건 제가 주인공이 돼서 정말 많이 경험했어요. 저는 홍콩에서 태어났잖아요. 어디서 왔냐고 해서 ‘홍콩에서 왔다’고 하면, ‘와, 부자 나라에서 왔다’고 해요. 그러다가 ‘사실은 네팔에서 왔어요’ 하면, ‘어, 그래. 돈은 좀 많이 벌었어?’ 하고 바로 무시하죠.

“한국 방송도 문제예요, 지금까지 TV에서 네팔 다루는 거, 참, 그런 지저분한 동네는 나도 못 가봤어요, 어떻게 그런 건 찾아서 …. 그런데 다음 날 한국 사람들이 말해요. ‘야, 너희 동네 진짜 못산다, 그게 뭐야.’ 하지만 네팔에는 불교 유적도 많고 아름다운 도시들도 많아요.

“또, 피부색 같은 걸 많이 따지죠. 나는 한국 사람들과 비슷하게 생겨서 덜하지만 같은 네팔인이나 방글라데시 사람이 피부색이 좀 검으면 금방 ‘야, 너 어디서 왔어?’ 하고 무시하죠. 같은 인간인데 말예요. 언제 서로의 나라 처지가 뒤바뀔지 모르는 거잖아요. 전쟁 같은 거 한번 일어나면 금세 처지가 뒤바뀔 수 있어요. 그런 생각은 하지 않고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녹슨 쇠 취급하죠.

“미국이나 영국에서 온 사람들이 하나 죽으면 난리나고, 그 수많은 이주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죽었는데 꼼짝도 안 하고 ‘죽든지 말든지 네 맘대로 하라’는 식이니까. 뭐,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처음부터 녹슨 쇠로 태어나고, 영국과 미국 사람들은 다이아몬드로 태어나나요? 다 같은 인간이잖아요.

“일단 정부가 우리 이주 노동자들을 너무 무시하니까, 정부와 방송을 그대로 믿고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 같아요.”

그의 말마따나 노무현 정부의 추방 정책은 인종차별을 더욱 부추기고 있고, 순수 혈통이라는 보수 우익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미등록 이주 노동자들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공장들이 많다는 것을 정부도 잘 알지만, 정부는 추방 정책을 취함으로써 그들을 없는 존재인 양, 적어도 없어야 마땅한 존재인 양 취급한다. 그런 정부가 그들에게 삶의 터전을 위한 무엇을 마련해 줄 리 없다.

가난한 나라 출신으로

그래서 한국에서 20대를 다 보내고 서른 줄에 접어든 이주 노동자들에게도 결혼은 먼 얘기일 뿐이고 애 낳아 키우는 일은 더더욱 그렇다. 강라이에게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냐고 물었다.

“재미있는 질문이예요. 결혼 생각을 안 해 봤다고 하면 좀 그렇지만 … 여기서 결혼해서 사는 건 제 생각으로는 좀 힘들 거 같아요. 여기서 오래 생활하면서 깨달은 것은, 한국이라는 나라는 열심히 일하면 돈 모을 수 있지만 한 번만 아프거나 사고 나면 하루 만에 [처지가] 완전히 달라지는 나라예요. 결혼하고 아이 키우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녜요. 몇 년 전 같으면 [이주 노동자 자식들은] 학교도 못 다니는데…. 지금은 좀 나아졌다고 해도 [여전히] 차별이 심하잖아요. 내가 아예 [성형]수술해서 미국 사람 돼서 오면 모를까. 그러면 ‘우리 아빠 미국 사람이예요’ 하면 차별은 안 받을 테니까요.”

고용허가제가 도입된 이래로 이주 노동자들의 처지는 한층 더 나빠졌다. 미등록 “불법” 노동자들의 처지는 말할 것도 없다.

“나쁜 말로 하면, 이용하는 겁니다. ‘봉급 이 정도 줄 건데 할거야?’ 하는 식으로요. 그러고는 그나마 약속도 안 지켜요. 그래서 얘기하면 ‘왜 싫어? 그러면 신고할 거야.’ 하는 식으로 나오는 거죠. 도와 줘야 할 사람들을 오히려 이용하는 거죠. 오랫동안 일한 공장의 사장들도 이런다니까요.

“‘정부도 정부지만 사장들은 또 왜 이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얼마나 더 벌겠다고. 이주 노동자 덕에 돈 번 사장들 많아요. 제 친구가 일하는 공장은 처음에 조그맣게 시작했는데 6년 뒤에 엄청 큰 건물로 새로 바꿨어요. 다 이주 노동자 덕이죠. 그런데 지금은 그런 거 하나도 인정하지 않고 있어요. 이주 노동자들에게 나쁘게 굴죠.”

지난해 11월 추방이 시작됐을 때 강라이는 네팔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고, 남아서 추방에 항의하기로 결심했다. 모든 걸 훌훌 털어 버리고 20대를 바친 한국을 떠나 쉽게 네팔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우리가 여기에 오래 살았잖아요. 우리는 이 나라, 한국의 냄새 하나하나를 다 알아요. 힘들 때, 외로울 때, 슬플 때 이 나라에서 함께했어요. 그만큼 오래 살았어요. 한국 속담도 있어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우리가 10년 넘게 이 나라에서 고통당해 왔는데….

“물론 집에 갈 수 있겠죠. 잡혀 가더라도 자기 집에 가는 건데 뭐. 하지만 10년 넘게, 그만큼 오래 살았으면 정이 그만큼 들었고 친구도 많이 있다는 얘기죠. 제가 친구 얘기 하나 할께요. 창훈이라는 제 친구가 하나 있어요. 봉제 공장에서 같이 일했는데 저랑 나이가 같아요. 한국에 하나뿐인 친한 친구예요. 그 친구도 식구만큼 나를 믿어요.

“그 친구 총각 시절에 우리가 처음 만났는데, 그 뒤에 그 친구에게 애인도 생겼고, 애인과 싸우는 것도 제가 말려 봤고, 또 그 친구가 그 애인이랑 결혼도 했고, 이제는 아이들도 있어요. 큰 애가 8살인데 그 아이들은 나를 ‘라이 삼촌’이라고 부르며 좋아해요. 내가 이 나라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잘 지냈나. 욕심 없이. 그 아이들을 내가 가르치고 그 사람들도 나를 식구처럼 생각하는데….

“그런데 갑자기 정부가 오랫동안 일해 온 우리 이주 노동자들에게 이럴 수 있는 건가요? 만약 정부가 ‘그래, 그 동안 너희 엄청 잘했다. 이 나라에서[나라를] 도와 줬어. 하지만 우리도 어쩔 수 없어. 이제 너희 가야겠다’ 하고 좋은 방식으로 하면 우리가 충분히 이해했을 거예요. 그런데 열심히 일하던 사람들을 한순간에 쫓아내고 반대쪽으로는 [이주 노동자들을] 또 데려오고 있어요.

“이것은 완전히 약올리는 거잖아요. ‘그래, 우리는 갈 수 있어도 안 갈 거야. 한 사람의 이주 노동자들이 이 땅에 있을 때까지 끝까지 숨어서라도 싸워 보고, 잡히면 어쩔 수 없지만 다른 나라에 가서도 이 활동을 계속할 거야’ 하는 생각을 하며 남게 됐어요. 갈 수 있는데 오기로 안 가는 사람들도 많죠. 솔직히 제대로 일자리도 없어요. 그래도 남아 있는 거죠.

고마운

“정부는 아직 꼼짝도 안 하고 있지요. 하지만 저희는 일단 이해시키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커요. ‘이주 노동자는 이 나라에서 도와 주며 그 동안 많이 고생했던 사람이다. 우리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 하고 말예요. 우리가 이대로 추방당하면 고국에 가서 만나는 한국인들에게 이 고통을 돌려줄지도 몰라요. 그래서 ‘이런 일은 없애 버리자. 차별 없는 세상, 아름다운 세상 만들어 가자’고 생각해 활동하고 있는 거예요.

“일할 때도 자유롭게 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주 노동자들은] 죽을 때도 개처럼 죽었어요. 차라리 동물이 그것보다 낫겠어요. 요즘 세상에 쓰레기도 함부로 안 버리는데….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왜 이렇게 대하는지 이해가 안 가요. 아픔이 많아요.”

그의 방 선반 위로 “대통령상” 트로피가 눈에 띄었다. 2002년 국제 우리말 웅변대회에서 수상한 것이다. 혼자 어렵사리 말을 배운 그에게 트로피 하나 안겨주던 한국 정부는 이제 그의 등을 떠밀며 출국을 강요하고 있다.

꺼내기 쉽지 않은 질문이었지만, 그와 같은 나라 출신이고 추방에 항의해 앞장서 싸웠던 사마르 타파가 결국 추방당한 소식을 듣고 어떤 심정이었는지 물었다. 강라이의 입에서 긴 한숨부터 나왔다.

“참 안타까워요. 이 정부가 어떤 정부인지 알게 됐어요. 많이 깨달았어요. 사람이 31일 동안 단식을 하면 뭐라도 답이 나와야 할 거 아녜요. 그런데 아무 상관도 안 하고 신경도 안 쓰고 … 이런 거 보면서 많이 깨달았어요. 더 말할 것도 없어요.

“사마르가 여수보호소에서 단식하다가 병원에 실려가자, 의사마저 그를 보호하지 않고 그랬대요. ‘얘네 보내도 된다’고요. 의사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신 아닌가요? 그 얘기를 들으니까 참….

“사마르 타파를 추방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안 나타날 건 아녜요. 사마르보다 더 용감한 사람이 나타날 거예요.”

마지막으로, 강라이는 한국인들이 추방당하는 이주 노동자들의 처지에 관심을 갖고 추방에 반대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간곡히 전했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주노동자는 이 땅에서 한국 경제 밑바닥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여기 젊은이들이 못하는 일을 하고 있죠. 그런 일 하면서 경제 발전 위해 돕는 사람이예요. 어떤 사람들은 이주 노동자들 때문에 일자리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마석, 의정부 등에 먼지 많이 나는 가구공장이나 프레스공장들은 강제 추방 때문에 문닫고 쉬고 있어요. 만약 그 동안 이주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빼앗았다면 왜 지금 그 자리에 다른 한국인들이 없나요? 정부는 책임지지도 못할 일을 하는 거예요. 이주 노동자들은 일자리 빼앗는 사람이 아니라 도움이 되는 사람이예요.

“왜 이주 노동자들이 강제 출국당하고 쫓겨나야 하나요? 이 나라가 이주 노동자들 때문에 더러워지고 분위기가 안 좋아져서요? 그렇다면 왜 우리를 쫓아내는 다른 한쪽으로 또 이주 노동자들을 데려오고 있나요? 그 이주 노동자들은 여기 있는 이주 노동자들과 달라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일 시키기에 차라리 더 낫죠. 이주 노동자를 한 사람도 남김없이 싹 보낸다면 차라리 이해하겠지만, 일부는 추방하면서 일부는 데려온다니 이해가 안 가죠. 그런 작전은 성공할 수도 없어요. 어차피 그 사람도 또 불법이 될 테니까요.

“저희를 불법이라고 부르니까 한국 사람들은 나쁘게 생각하는데, 미등록 이주 노동자라고 하면 차라리 좀 낫겠어요. 미등록 이주 노동자들은 기간 내 나가지 않고 머물러 있는 것뿐이에요. 기간 내에는 법적으로 일하고 기간 지나서는 도둑질하거나 불법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예요. 계속 열심히 일하며 사는 사람들일 뿐이에요. 더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이주 노동자들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와 모든 이주 노동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날까지 이 땅에서 한국 노동자들이 누리는 모든 권리를 누리며 살 자격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이주 노동자 추방에 반대해야 한다.

김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