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호한 저항이 미국 지배자들을 분열시키다

 

베트남인들의 저항과 함께 반전 운동도 미국 지배자들의 전쟁 지속 의지를 꺾는 결정적 구실을 했다.

전쟁 초기에 미국인들의 80퍼센트가 전쟁을 지지했다. 1964년에 뉴욕 반전 시위에 참가한 사람은 6백 명뿐이었다.

반전 운동의 첫번째 초점은 대학 토론회들이었고, 이는 매우 급속히 성장했다. 이런 논쟁에는 전쟁 지지자들과 반대자들이 함께 참가했다.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주립대학에서 열린 36시간 토론회에는 놀랍게도 3만 명이나 참가했다. 1967년 4월의 뉴욕 시위에는 40만 명이 참가했다.

영국에서 베트남연대운동은 1967년 10월에 2만 명이 참가한 시위를 조직했다. 1968년 10월에는 10만 명이 참가한 전투적 시위가 벌어졌다.

미국에서는 반전 시위와 구정 공세 영향으로 1968년에 여론조사에서 처음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다수가 됐다. 집권 민주당의 1968년 전당대회에서는 반전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리처드 닉슨의 신임 공화당 정부는 전쟁을 끝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히려 폭격은 강화됐다.

1970년에 켄트주립대학에서 반전 시위를 벌이던 학생 네 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 그 사건은 대중적 저항의 도화선이 됐다. 전쟁에 반대하는 반란이 “국내 혁명”으로 바뀌고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흑인들의 잇따른 반란이 미국 전역의 도시들을 뒤흔들었다. 흑인들의 반란은 베트남 전쟁에 징집돼 끌려갈 백인 청년들의 지지를 받았다.

1971년 초 미국이 베트남의 또 다른 인접국 라오스를 침략하자 워싱턴에서 50만 명, 샌프란시스코에서 30만 명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들이 벌어졌다.

미국 군대가 무너지고 있었다. 미국 지배계급은 분열했다. 월스트리트는 전쟁 비용이 너무 많다며 아우성쳤다.

닉슨은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 최대의 군사 강국이 세계 최빈국 중 하나에게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