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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다큐멘터리 〈최후의 제국〉을 보고:
자본주의와 새로운 사회, 그리고 ‘아로파’

얼마 전 방영된 〈최후의 제국〉은 이 세계의 비참함에 몸서리치고 대안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공감을 살 만한 다큐멘터리였다. 이 다큐멘터리는 공멸의 경고를 보내고 있는 자본주의 위기의 해법을 ‘최초 인류’의 모습에서 발견하고자 한다.

돈보다 꽃을 소중히 여기며 공동수로를 정성껏 함께 청소하는 브록파 사람들에게서, 잡아 온 물고기를 각 집안의 사정에 따라 공정히 나누려고 애쓰는 아누타 사람들에게서, 굶는 아이들이나 집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마을의 수치로 여기며 아이들을 먹이고 함께 힘을 모아 집을 만들어 주는 상각부족에게서, 우리는 자본주의적 삶이 인간의 본성에 따른 필연적인 산물이며 그래서 탐욕과 경쟁의 논리와는 결코 단절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이 거짓임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사회의 모습과 교차되는 것은 미국과 중국으로 대변되는 우리의 삶이다. 하루아침에 집을 잃어 모텔을 전전하거나 유일하게 남은 자가용을 새 집 삼아 살아가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보자니 하얀 피부를 가진 ‘아프리카 난민’이 떠오른다.

한 달에 5천만 원이 넘는 고급 산후조리원에서 몸을 푸는 산모가 있는 반면, 부잣집에 들어가 대리수유모로 일해야만 육아 비용을 마련할 수 있는 베이징의 가난한 산모와 모유마저 부잣집 아이에게 빼앗긴 그녀의 아기의 이야기, 안정된 삶을 얻으려고 정육점의 고기 마냥 등급 평가를 받아 ‘부자 맞선’에 나가야 하는 여성의 모습에서 무엇이든 돈으로 사고 팔릴 수 있는 적나라한 자본주의의 모습이 보인다.

‘최초 인류’의 모습에서 새로운 삶의 원리가 가능함을 이야기하면, 흔히 이런 해법은 퇴행일 뿐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이미 퇴행하고 있다. 물로 배를 채우고 배불리 먹이지 못해 가슴 아파하는 부모의 사연은 한국전쟁 이후 보릿고개를 살아가는 우리 부모 세대가 아니라 21세기 미국 보통 사람들의 삶이다. 미국 아동 25퍼센트가 끼니를 거르고 20퍼센트가 빈곤선 이하로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일궈 놓은 이 모든 부를 이를 만든 사람들이 향유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후의 제국〉은 무한 경쟁과 탐욕이 아니라 연대와 나눔, 평등과 자유라는 새로운 사회의 가치를 탁월하게 보여 준다.

그러나 이런 가치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모두를 위해 헌신하는 리더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서 그친다. 나아가 자본주의를 유지한 채로 공동체적 가치를 결합하는 대안을 말하며 그 단초로 협동조합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자본주의가 그 체제의 야만에 맞설 세력을 형성했으며, 그 투쟁이 지금 자라나고 있다는 점을 봐야 한다.

미국 ‘점거하라’ 운동, 중국 노동자들의 투쟁, 아랍 혁명, 유럽을 강타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같은 대중운동이야말로 연대와 평등의 가치를 자라나게 하고 새로운 사회의 원리로 도입할 수 있게 하는 현실적 힘일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가 찾고자 했던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결합을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라고 표현했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를 실현할 실질적 힘, 즉 노동자 계급의 대중운동에 주목했다.

자본주의의 대안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이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면 “‘사랑의 실천’(아누타 사람들의 사회 운영 원리인 “아로파”의 뜻)은 정녕 불가능한가?” 하는 질문은 ‘불가능하다’는 답변만을 얻을 것이며, 브록파의 오색찬란한 꽃밭과 너른 하늘, 남태평양의 푸른 바다와 함께 사는 순박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단지 아련한 ‘향수’와 동경의 대상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