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미제라블〉과 프랑스 혁명:
노예의 삶을 거부해 온 끈질긴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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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 혁명을 이끈 부르주아 세력의 일부였다. 그는 사회의 진보를 확신했고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있었다. 물론 그가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 모순을 이해하고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주장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그의 사상 이상의 것들을 보여 줬다.
그래서 당시 소설
영화
그러나 파리의 시민들은 이들의 죽음을 기억한다. 그리고 영화는 파리의 시민들과 죽은 혁명가들이 모두 모여 더 큰 바리케이드에서 혁명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끝이 난다. “듣고 있는가 분노한 민중의 노래/ 다시는 노예처럼 살 수 없다고 외치는 소리/ 심장 박동 요동쳐 북소리 돼 울릴 때/ 내일이 오면 새로운 삶이 시작되리라.” 이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일어설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이 노래
혁명과 반동
그러나 계속되는 전쟁과 내전으로 혁명은 반동의 위기에 처했고, 결국 1799년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좌에 올랐다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하자 유럽에서는 모든 국왕·제후·귀족이 복귀했다. 프랑스에서도 1815년에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가 복귀한다. 18세기 구체제의 낡은 상부구조가 이미 바뀐 사회구조에 덧씌워진 것이다. 1815년은 영화
루이 18세와 샤를 10세의 왕정복고기는 반동의 시기였다. 샤를 10세는 가장 부유한 선거인들이 투표를 두 번 할 수 있는 이중투표법을 통과시키고, 소르본 대학에서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이라고 판단된 강의는 중단시켰다.
결국 1830년 7월 파리에서 또 한 번의 혁명이 일어났다. 이 혁명으로 샤를 10세는 몰락하지만, 그 자리는 오를레앙의 루이 필리프가 차지했다.
7월 혁명은 프랑스 역사에서 노동계급의 등장을 선명하게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부르주아는 구 특권계급과의 투쟁에서 승리하려고 노동자들을 끌어들였고, 샤를 10세를 물러나게 한 전투인 ‘영광의 3일’에서 파리 노동자들의 참가는 결정적이었다. 노동자들이 혁명에 가담한 것은 그들의 조건이 개선되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감은 왕조가 교체됐다는 것으로는 충족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경제 위기가 지속되면서 사람들의 삶은 더욱 비참해졌다. 1831년 리옹에서 견직공들이 일으킨 봉기는 프랑스에서 대중적인 노동운동이 나타났음을 알리는 최초의 사건이었지만, 탄압으로 분쇄됐다. 콜레라가 유행해 파리에서만 2만 명이 사망했다.
1848년 혁명
7월 혁명이 남긴 미완의 과제 때문에 1848년 혁명이 일어났다. 1848년 2월, 민중은 왕정의 전제적 권력 종식, 투표권 확대, 선거를 통한 의회 설립, 언론의 자유 등을 요구하며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왕정이 타도되고 제2공화정이 수립됐다. 성인남자의 보통 선거권도 도입됐고, 노동시간 단축, 국영 작업장 건설 등 개혁이 단행됐다. 역사상 처음으로 육체 노동자 알베르가 정부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르주아들은 이런 개혁에 불만을 가졌고, 개혁들을 물리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유럽 전역에서 민주개혁 운동은 구체제의 지배 세력에 맞서 서로 다른 계급들의 이해관계를 통합시켰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은 주로 노동자들이었고, 이들의 요구는 왕정 지지자뿐 아니라, 지주, 상인, 변호사, 그리고 중간 계급 공화파 학생들에게조차도 너무 나아간 것이었다.
결국 6월의 전투에서 노동자들은 패배하고 다시 구질서가 부활한다. 나폴레옹의 조카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황제가 됐다
이제 부르주아 계급은 더는 혁명적 세력이 아니었다. 그들은 노동계급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신들의 민주주의 혁명도 회피하려 했다. 1848년 혁명을 보면서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슬로건이 연속혁명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23년 후, 프랑스에서는 또다시 위대한 노동자들의 혁명이 일어난다. 1871년 파리 코뮌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권력인 노동자 권력의 모습을 최초로 보여 줬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서 진보한다. 프랑스 혁명사는 더 나은 세계를 위한 끈질긴 민중의 저항의 역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