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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전망과 과제:
17대 국회의 미래와 민주노동당, 그리고 변혁가들

지금은 개혁에 대한 광범한 대중의 기대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1년 반 전 대선 직후와 닮았다. 그 때는 노무현이 이끌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가 컸다. 지금은 열린우리당(이하 열우당)이 과반이 되고, 민주노동당이 진출한 의회에 대한 기대가 크다.

〈다함께〉 지지자는 누구든 민주노동당의 의회 진출을 환영해야 한다. 전국의 몇 백만 선진 노동자·피억압자들이 민주노동당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으로 여기고 있다는 단순한 이유에서라도 〈다함께〉는 기쁘기 이를 데 없다.

사람들의 기대는 지금 더 크다. 행정부와 입법부 모두 개혁을 표방하는 정당이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해 기대가 실망과 분노로 바뀌었듯이, 지금의 기대도 실망과 분노로 바뀔 것이다. 왜냐하면 열우당이 추진할 개혁의 상당수는 신자유주의적인 것일 것이고, 그나마 괜찮은 개혁은 기성 권력 체제의 방해에 직면해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진정한 권력이 선출된 의회가 아니라 선출되지 않은 권력자들, 곧 대기업 CEO(최고경영자)들과 국가 관료, 검찰·경찰 간부, 고위 법관, 군장성 들에게 있으므로 그들이 한사코 반대하기로 맘먹은 개혁은 그들이 대중 투쟁에 밀려 양보하지 않는 한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개혁이 지지부진하면 으레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된다. 한편으로 보수적 반동이 일어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급진 개혁을 지지하는 경향이 발전한다. 그렇다면 중도인 열우당을 사이에 두고 좌우가 강화되는 샌드위치 같은 정치 지형이 형성될 것이다.

사실, 탄핵 의결 사건과 그에 반대한 대규모 항의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번 총선 결과가 그런 모습으로 나왔을 것이다. “탄핵 후 폭풍”은 열우당의 생명줄을 연장시켜 줬다.(정당 투표에서 민주노동당을 찍은 사람들의 78.3%가 지역구 투표에서는 “다른 당”에 투표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탄핵 의결 항의 운동을 기피해야 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 운동의 참가자들은 대부분 학생·노동자·미취업청년 등 피억압자들이었고, 그들의 염원도 민주와 반부패 등 진보적인 가치들이었다.

또한, 우파가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놔둬서는 양극화의 주된 수혜자가 우파가 되고, 그에 따라 좌파의 의회 진출이라는 역사적 사건도 그것에 묻혀 빛이 바랠 것이다.

앞으로 재개될 정치 양극화에서 좌측 방향은 민주노동당으로 향할 것이다. 열우당 같은 얼치기 개혁파는 안 되겠다 싶은 사람들이 대부분 민주노동당에게 기회를 줘 봐야겠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주노동당은 계속 성장할 것이다. 반드시 중간중간에 우여곡절이 있겠지만 말이다.

〈다함께〉 지지자는 이런 선진 노동자·피억압자들의 정서에 일체감을 느껴야 한다. 다시 말해, 민주노동당을 지지해야 한다.

우여곡절

그런데, 민주노동당은 모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개혁파의 ‘좌익'으로서 민주노동당은 개혁파의 ‘우익'인 열우당의 위기로부터 반사이익을 얻을 것이다. 다른 한편, 열우당과 마찬가지인 의회 내 개혁파로서 민주노동당은 열우당과 똑같은 난관에 부딪힐 것이다. 즉, 선출되지 않은 진정한 권력자들이 진정한 개혁을 좌절시키거나 적어도 일그러뜨릴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기성 권력 체제는 민주노동당에게 ‘존경받을' 수 있도록 ‘덕망' 있게 행동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부르주아 사회의 가치관에 따른 존경받기는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장외 투쟁”을 삼가고 의회 내에서 협상과 타협을 통해 부르주아 정당들과 “상생”하라는 것이다.

만일 민주노동당이 볼셰비키 같은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이고, 의회에 대처하는 방식도 볼셰비키의 두마 전술과 같은 것이라면 민주노동당은 이런 압력과 유혹을 물리칠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압력에 조금씩 적응할 것이다.

그러면 민주노동당 지지자 중 일부가 반발할 것이다. 운동이 당분간 고양될 것이므로 반발자 중 일부는 좌경화할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노동당 내 좌파는 성장할 것이다. 당 바깥의 좌파도 민주노동당과 선거 경쟁을 하려 하지 않고 민주노동당의 선거 승리를 지지한다면 성장할 수 있다.

민주노동당에 어떤 지지도 제공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계급의식의 불균등한 발전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소치이다. 또한 원칙과 전술을 구별하지 않는 태도이기도 하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는 민주노동당이 개량주의 정당이라는 점이 자명하다. 하지만 훨씬 더 광범한 대중, 수백만은 아닐지라도 수십만 선진 노동자들에게도 이 점이 자명하지는 않다.

〈다함께〉 지지자들은 적어도 수십만 노동자들에게 민주노동당의 실체가 개량주의(레닌이 “자본주의적 노동자당”이라고 정의한 것)임이 입증될 때까지는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면서 활동하는 것이 현명하다.

입증의 때가 언제 올지는 아무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하나의 정치적 세대가 얼마나 길지는 정치적 경험에 달려 있다. 1997∼98년 경제 공황은 노동조합 관료의 실체를 대중적으로 입증했다.

세계 자본주의와 한국 자본주의의 불안정과 세계 규모로 전개되는 계급투쟁의 양상은 앞으로 전개될 상황이 역동적일 것임을 뜻하므로 대중적 입증의 때가 그다지 오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른 한편,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 좌파가 옛 소련 블록 사회를 모종의 사회주의로 여기다가 낭패를 본 적이 있어 이데올로기의 혼돈이 있고, 이 때문에 운동의 진전이 더디다.

미래는 이데올로기의 명료함과 대중 행동에의 헌신을 적절하게 추구하는 종류의 좌파에게 열려 있을 것이다.

공동전선과 변혁조직

최일붕

근본적 사회변혁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함께 결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한 공동전선에 포함되는 사람들은 궁극 목표의 성취 수단과 방법에 대해 서로 견해를 달리한다. 심지어 궁극 목표도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즉각적 행동을 통해 자본을 약화시키고 피억압 계급들의 이익을 증진시킬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해서는 서로 동의한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싸울 수 있다. 부시 일당의 야만적 전쟁과 노무현 정부의 파병에 반대할 수도 있고, 세계경제포럼 동아시아 경제정상회의에 반대할 수도 있고, 수자원과 공기업의 사유화에 반대할 수도 있다.

이러한 공동 행동은 대중(말뜻 그대로 ‘많은 사람들') 행동이어야 한다. 개량주의자들은 선전 위주의 소수 행동을 선호한다. 그러나 기자회견, 1인 시위 등등은 대중 행동을 준비하는 수단으로서만 의의가 있다.

의회 활동도 마찬가지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기성 권력 체제가 좌절시키려 무진 애를 쓰는 개혁입법은 대중 투쟁에 의해 강제되지 않는 한은 입법 단계에서든 집행 단계에서든 좌절되게 돼 있다. 그러므로, 근본적 사회변혁 추구자들에게 의회는 반자본주의 선전의 장으로서만 의의가 있다. 물론 대중 투쟁을 위한 반자본주의 선전이다.

혹자는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만이 즉각적 의제에 올라 있지, 근본적 사회변혁은 즉각적 의제에 올라 있지 않다고 반박할지 모른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개량이냐 변혁이냐 하는 문제는 국가 권력이 누구 손에 떨어질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태에 있을 때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문제는 비혁명적 시기에도 우리가 실질적 개량을 획득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개량주의는 다양한 자본주의 기구들에 압력을 가함으로써 위로부터 변화가 올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자 실천이다. 그 압력은 정부나 그 산하 기관에 들어가는 것일 수도 있고, 투표일 수도 있고, 비폭력적 직접행동일 수도 있고, 여론일 수도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근본적 사회변혁 추구자들은 기존 기구들의 실체에 대한 착각을 배격하므로 아래로부터의 행동에 역점을 둔다.

변화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 때문에 체제의 특정 양상에 저항하는 행동 통일이 중단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상이한 방식들이 이후 대책을 놓고 견해가 완전히 갈리는 것으로 바뀌는 지점이 마침내 도래한다.

가령 파병반대국민행동의 주축인 주요 NGO들은 6월 13일 세계경제포럼 동아시아 경제정상회의 항의 시위에 반전 쟁점을 결합시키는 것을 반대한다. 반전은 “국민적” 쟁점인 반면에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좌파 민족주의 계열도 이런 견해를 추수한다.

이런 잘못된 생각 때문에 또한 NGO들과 좌파 민족주의자들은 대부분 파병 문제에서 “미국의 압력”을 부각시키는 한편, 노무현과 열우당의 자발적·능동적 참전 방침은 주되게 공격하지 않았다.

각각의 고비마다 논쟁의 승자가 누구냐에 따라 변혁의 승패가 결정되지는 않을지라도 중요한 투쟁의 승패는 결정할 수 있다.

변혁이냐 개량이냐를 둘러싼 주장이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람시가 말한 “사람들의 모순된 의식”이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무솔리니의 감옥에서 옥사한 이탈리아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사람들이 기존 사회에서 비롯한 사상들과 기존 사회에 맞서 투쟁한 데서 비롯한 사상들을 모두 머리 속에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개량주의자들은 자본과 그 정부의 행실에 항의해 변혁가들만큼, 아니 흔히 그들보다 더 효과적으로 선전을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흔히 개량주의자들이 더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존 사회에서 비롯한 개량주의적 사상이 투쟁을 억제하는, 그것도 결정적 순간에 그러는 지점이 때때로 도래한다. 일부 개량주의자들은 자신의 낡은 사상과 결별하는 반면에 다른 자들은 그렇지 않다.

바로 그 때 변혁 지향적 조직의 존재가 중요해진다. 만일 그 조직의 성원들이 각 투쟁부문에서 이전에 개량주의자들을 존경했던 사람들로부터 새로 존경을 받을 수 있다면 사태의 전개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런 변혁 조직은 사상의 차이가 덜 중요해 보이던 일찍부터 다른 활동가들을 체제의 작동 방식과 체제와 투쟁하는 방법에 대한 명료한 인식 쪽으로 끌어당기지 못한다면 이런 입지를 확보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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