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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파병군이 만날 이라크 쿠르드족은 누구인가

한국 파병군이 만날 이라크 쿠르드족은 누구인가

김용욱

한국군 파병지로 유력한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 지역은 지난해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지역은 이라크 역사에서도 가장 잔인한 억압과 학살이 자행된 곳이었고, 쿠르드족은 열강의 거듭된 배신으로 고통받았던 사람들이다.

17세기부터 제1차세계대전 전까지 쿠르드족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오스만투르크와 싸우던 영국은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에 군대를 투입하면서 (지금의 조지 W 부시처럼) “투르크에 억압당해 온 사람들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방과 민족 정부의 수립을 지지”한다고 선언하며 쿠르드족을 포함한 주요 세력들에게 독립을 약속했다.

그러나 쿠르드족은 오스만제국에 맞서 싸웠는데도 독립을 얻지 못했다. 오히려 영국과 프랑스가 중동을 나눠먹기 위해 멋대로 국경선을 긋는 과정에서 이들은 터키·이란·이라크·시리아로 찢겨졌다.

1958년 이라크에서 혁명이 일어나 친영(親英) 왕정을 타도했다. 쿠르드족은 혁명에 열광했지만, 정부는 쿠르드족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1950년대 초반에 결성된 쿠르드민주당이 쿠르드족 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떠올랐다. 이 정당의 지도자인 무스타파 바르자니(현재 쿠르드민주당의 지도자인 마수드 바르자니의 아버지)는 제국주의 국가나 다른 강대국과 동맹을 맺는 것만이 쿠르드족이 독립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바르자니는 당시 친미 국가였던 이란의 돈과 무기를 환영했다. 그는 미래에 자신을 탄압할 세력인 후세인의 바트당과도 손을 잡았다.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던 바트당은 쿠르드족의 참여까지는 아니더라도 중립이 필요했던 것이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바트당은 1974년부터 쿠르드족 독립 세력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1972년 이라크가 소련과 손을 잡자 미국과 이란은 쿠르드족에게 무기를 지원했다.

민족적 통일

그러나 이란은 1975년 이라크와 알지에 협정을 체결해 샤트 알 아랍 수로의 통제권을 확보한 뒤 쿠르드족에 대한 군사 지원을 중단했다. 이란과 미국은 이라크군이 쿠르드족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동안 방조했을 뿐 아니라, 쿠르드족이 즉각 항복하지 않으면 이라크에 가담해서 함께 진압하겠다고 위협했다. 쿠르드족은 다시 한번 배신당했다.

이러한 패배 때문에 쿠르드민주당의 영향력이 쇠퇴했고, 쿠르드애국동맹이라는 강력한 경쟁 정당이 등장했다. 이 정당의 지도자인 탈리바니는 “이란과 이라크뿐 아니라 쿠르드민주당도 우리의 적이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심지어 후세인에게 협상을 구걸했다.

그러나 이러한 타협에 역겨움을 느낀 지지자들이 빠져나가자 탈라바니는 어쩔 수 없이 1986년에 쿠르드민주당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둘의 경쟁 관계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서방의 지원을 받으며 1980년부터 이란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후세인은 쿠르드족이 이란을 돕지 못하게 하기 위해 1987년부터 쿠르드족을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토벌 작전 중 가장 끔찍한 것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개발한 독가스 살포였다.

1988년 2월에 이르면 약 1백50만 명의 쿠르드족이 난민이 됐고, 12개의 도시와 3천여 개 마을이 쑥대밭이 됐다. 미국 등 서방은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호메이니의 이란을 약화시키기 위해 후세인을 계속 지원했다.

1991년 이라크 전쟁이 끝날 무렵 쿠르드족이 민중 봉기를 일으켰다(비슷한 시기에 남부에서 시아파도 봉기했다). 미국은 이라크인들에게 후세인에 대항해서 봉기하라고 선전했지만, 정작 후세인이 민중 봉기로 몰락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봉기가 성공하면 사우디 아라비아나 터키 같은 친미 국가들도 정정 불안에 빠질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미국은 오히려 후세인이 이라크 군대와 무기를 사용해 쿠르드족을 진압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또다시 대규모 쿠르드족 난민이 발생했다. 2백만 명 이상이 두려움에 떨면서 이웃의 터키와 이란 국경으로 몰려갔다. 터키군은 이들이 국경을 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라크 쿠르드족 ‘자치 지역’은 이렇게 시작됐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쿠르드족에 대한 호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연합군은 후세인과 쿠르드족이 자치에 관한 협상을 종결하기도 전에 북부에서 철수했다. 후세인은 더 나은 조건에서 협상을 하기 위해 북부를 경제적으로 제재했다. 1996년 석유-식량 교환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전까지 쿠르드족은 서방의 무관심 하에 심각한 경제적 고통을 겪었다.

또, 언론의 선전과는 달리 이 지역은 1991년 걸프 전쟁이 종결된 이래 평화를 누리지 못했다.

민중 봉기

지난 10여 년 동안 터키 군대는 툭하면 이 지역에 침입했다. 그러나 쿠르드족 보호 명목으로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했고, 뻔질나게 바그다드를 폭격하던 미군과 영국군 비행기들이 터키군을 막기 위해 출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비극이게도, 양대 쿠르드족 정당인 쿠르드민주당과 쿠르드애국동맹은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원에 의존해 왔다. 심지어 이들은 터키가 게릴라 소탕 명목으로 쿠르드족 지역을 침범하는 것조차 용인하고 지원했다.

외부에서 원하는 지지를 바랄 수 없게 된 이들은 자기들끼리 싸움에 골몰했다. 쟁점은 막대한 이득을 보장하는 터키와의 밀수를 누가 관리하느냐였다. 1994년부터 계속된 전투로 3천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나중에 미국의 중재로 2002년에 둘 간의 평화조약이 체결됐다. 그러나 쿠르드족 지역은 두 정당이 각기 지배하는 구역들로 나뉘었다.

두 정당의 지도자인 바르자니와 탈라바니 가문은 부를 쌓았지만, 다수의 쿠르드족 사람들은 끔찍하게 가난하다. 바르자니와 탈라바니의 민병대들은 인권운동가, 신문 편집자와 두 정당의 반대자들을 체포했고, 투르코멘이라는 소수민족과 아랍인들을 억압했다.

2003년 이라크 침략을 전후해 이들은 조지 W 부시에게 잘 보이려고 안간힘을 써 왔다. 최근에는 두 정당이 동원한 쿠르드족 민병대들이 이라크보안군을 대신해서 미군과 함께 팔루자 진압 작전을 펴고 있다. 이러한 ‘부역’ 덕분에 이들은 몇몇 양보를 얻어 냈다.

그러나 득보다 실이 더 클 수도 있다. 지난 2월 아르빌에서는 양대 정당을 노린 폭탄 공격으로 2백여 명이 사망했다. 누구의 소행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들의 지금까지의 행적과 관계 있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부역 활동을 계속한다면 앞으로는 훨씬 커다란 보복을 당할 수 있다.

쿠르드족의 비참한 역사는 외세 개입이 결코 해방을 가져다 주지 못함을 보여 준다. 미국 제국주의와 중동의 지배자들에 맞선 중동 민중의 봉기만이 쿠르드족에게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