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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진로 논쟁:
복지 확대를 위해 보편적 증세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박근혜 정부가 발표한 세제개편안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그런데 일부 진보진영은 ‘복지 확대를 위해서는 보편 증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이 대표적이다. 이에 보편증세론의 문제점을 다룬 논쟁적 기사를 재게재한다.

취임식을 앞두고 발표한 박근혜의 복지 정책은 공약에 비해 대폭 후퇴했다.

기초노령연금은 하위 70퍼센트에게만 20만 원을 주고 나머지는 4만~20만 원을 차등 지급하기로 했다. 선별적으로 주려다 보니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못한 저소득층의 연금을 깎는 일도 벌어질 듯하다.

그래프로 보는 한국의 조세불평등 ⓒ자료출처 : OECD, 한국은행, 통계청, 〈매일경제〉

“성실한 국민의 입장에서는 역차별이라고 항의할 만하다. 정당한 항의다. 국민연금을 2백만~3백만 원 받으면 이 얘기를 수용할 수 있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1인당 평균액은 월 28만 원밖에 안 된다.”(김연명 중앙대 교수)

4대 중증질환 보장도 핵심인 3대 비급여(상급병실료·선택진료비·간병비)는 제외했다. 노인 임플란트 건강보험 적용도 75세부터 그것도 단계적으로 하기로 했다.

1년 동안 내야 할 총진료비가 일정액을 넘으면 나머지는 건강보험에서 전액 부담하는 ‘본인부담 상한제’는 저소득층의 경우 오히려 부담이 늘었다.

비록 선거용 공약이었다고는 해도 박근혜가 이토록 빨리 공약을 뒤집은 까닭은 재벌·부자 등 핵심 지지 기반의 압력 때문이다. 이들은 복지 확대가 자신들의 이윤을 갉아먹을까봐 노심초사한다.

당장 재원을 마련해야 하는데 이명박 정부에서 이뤄진 대대적인 부자 감세 조처 때문에 복지에 쓸 정부 재정 자체가 부족하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주·부자·관료 들은 혹시라도 복지 확대 과정에서 자신들의 세금 부담이 늘어날까 봐 걱정하고 있다. 선거 때문에 잠시 목소리를 낮추고 있었지만 대선이 끝나자마자 일제히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게다가 지난해 세금이 애초 목표보다 2조 8천억 원이나 덜 걷힐 정도로 경기 침체가 심각한 수준이다. 결국 박근혜는 이들 재벌·부자들의 이익을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

박근혜가 경제부총리와 청와대 경제수석에 각각 임명한 현오석·조원동은 복지 확대 자체에 반대해 온 인물들이다. 현오석은 지난 연말 인터뷰에서 차기 정부가 하지 말아야 할 과제로 ‘복지 확대’를 뽑을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진보진영 일부에서는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보편적’ 증세를 요구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다같이 세금을 올려서 그 돈으로 복지를 확대하면 노동자들에게 이득이 된다는 것이다.

이전의 부자 증세 요구에 비춰보면 명백히 후퇴한 것이지만 이런 주장이 진보진영 안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다.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나 그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 ‘복지국가 소사이어티’ 등에 참여하는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이 노무현 정부 시절부터 보편적 증세를 대안으로 제기해 왔다.

박근혜의 복지 공약에 일말의 기대를 건 사람들은 최근의 공약 후퇴를 보며 이런 주장에 귀를 기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에서는 우파가 보편적 증세조차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하는 상황에서 더 이런 대안이 솔깃하게 들릴 것이다.

“복지를 늘리기 위해 전면적 세제 개편을 통해 보편적 증세를 할 것이냐, 아니면 현행 세율을 유지하면서 조달 가능한 재원 범위 내에서 복지공약을 재조정하느냐다. 우리는 복지 로드맵의 재조정이 옳다고 본다.”(〈중앙일보〉)

그러니, 복지를 포기하는 것보다 보편적 증세를 수용하는 게 나은 일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부가가치세 인상이나 사회복지세 신설 등 증세를 통한 복지재정 확보에 대해서도 열린 시각을 가져야 한다.”(이창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소장)

후퇴

하지만 보편적 증세가 결국 노동자들에게 이득이 된다는 주장은 정확한 얘기가 아니다.

그런 조처가 이뤄지면 자본가들도 세금을 조금 더 내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 돈으로 저소득층에 복지를 제공하면 그들의 삶을 조금 개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복지라도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첫째, 이는 더 많은 노동자들에게는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정부와 주류 언론의 악선동과 달리 상대적 고소득 노동자들조차 이 사회의 특권층이라고 부를 만한 처지가 못 된다.

현대차·삼성전자 노동자들의 고임금은 수명을 갉아먹는 밤샘 노동과 백혈병 같은 산재를 대가로 한 것이었다. 한국 노동자들의 시간당 실질임금은 OECD 최저 수준이다.

비정규직의 처참한 삶과 정규직의 고된 노동에서 이익을 거둔 것은 기업주들이었다.

“지난 10년 사이에 가계저축은 0.56퍼센트 늘고 기업저축은 57.39퍼센트 급증[해] 2011년 기업저축은 2백46조 원으로 역대 최고 기록이다. 2012년 3월 기준 상위 45개 대기업의 사내유보금 총액은 3백13조 원에 달한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세금을 적게 내는 것도 아니다. 한국의 직접세 비중이 OECD 평균에 비해 크게 낮다고 하지만 이는 기업주·부자 들의 세금 부담이 턱없이 적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보면 보편적 증세론은 진정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흐리는 이데올로기 구실을 한다. 보편적 증세론을 제기해 온 오건호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은 최근 “우리 세대가 져야 할 몫을 온전히 책임지는 증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처럼 복지 제도를 계급 간 재분배가 아니라 세대 간 재분배 문제로 왜곡하는 것이야말로 자본가들이 바라는 바다. 이런 논리는 기업주·부자 들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노동자들 사이에 갈등을 낳는다. 이는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사기를 떨어뜨리는 효과를 낸다.

둘째, 보편적 증세가 부자들의 세금도 늘릴 것이라는 생각은 지나치게 순진한 것이다.

금융·부동산·증여·상속 등 기업주·부자 들의 주 수입원은 아예 징세 대상이 아닌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는 소득세 인상도 결국 노동자들의 부담만 늘리는 효과를 낸다.

게다가 유리지갑이라 불리는 노동자들에 비해 기업주·부자 들의 합법적·불법적 탈세는 근본적으로 막기 어렵다. 이건희가 고작 16억 원에 삼성 그룹 전체를 아들에게 물려준 것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총리·장관 후보자들도 탈세의 산 증인들이다.

2011년에 탈세 규모 상위 1백대 기업이 누락한 소득액은 4조 원에 달했고 탈세 규모는 2조 6천8백억 원이었다.

셋째, 보편적 증세론은 현실에서 복지와 그 재원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계급투쟁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계급으로 나뉜 사회에서 중립적인 해결책은 없다.

노동자들은 계급 간 재분배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부자 증세와 복지 확대를 요구해 왔다. 반대로 자본가들은 설사 복지를 늘리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그 부담을 피하려고 노력해 왔다.

오늘날 기업주·부자 들은 그동안 부담해 오던 비용(세금)마저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려 한다.

박근혜는 ‘박근혜 정부 국정과제’에서 “세입 확충의 폭과 방법에 대한 합의를 도출”할 것이라고 밝혔는데 그 방법의 하나로 고려되고 있는 게 부가가치세 인상이다. OECD 같은 자본가들의 국제기구도 부가가치세 인상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물건이나 서비스를 구입할 때 일정한 비율로 부과하는(대략 10퍼센트) 부가가치세는 소득이 적은 사람일수록 더 많은 비율로 세금을 걷는 역진세다. 그러므로 간접세 인상은 노동자들을 쥐어짜 부자들의 세금 부담을 줄여 주는 파렴치한 짓이다.

불공평

민간보험을 활성화하는 등 수익자부담 논리를 강화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민간보험이 국가 복지를 대체하는 폭이 커질수록 노동자들의 부담은 늘어나고 자본가들의 세금 부담은 줄어든다.

따라서 진정으로 복지를 늘리려면 불공평한 조세제도 자체에 칼을 대야 하고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전가하려는 지배자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

4대보험 등 사회보장세에서 기업주들이 부담하는 비율을 OECD 수준으로만 높여도 매년 30조 원이 넘는 재원이 마련된다. 상위 1퍼센트의 소득세율을 42퍼센트로만 올려도 매년 약 4조 원을 걷을 수 있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같은 초대형 기업들의 법인세 실효세율을 20퍼센트로만 올려도(법정 최고 세율은 22퍼센트) 2조 3천 억 원을 더 걷을 수 있다.

유럽 복지국가들에 관한 연구 결과를 보면, 상대적으로 직접세 비중이 높았던 스웨덴, 영국 같은 나라들에서조차 노동자들이 낸 세금과 복지 혜택이 거의 같은 양이었다. 미국에서는 아예 노동자들이 낸 세금으로 자본가들을 먹여 살렸다. 미국보다도 불평등한 조세 제도를 가진 한국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안 봐도 뻔하다.

요컨대 보편적 증세는 얼핏 보기에 합리적인 해결책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세불평등을 확대하고 현실의 계급투쟁에서 노동자들의 힘을 약하게 만든다.

따라서 진보진영은 부자 증세 요구에서 후퇴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