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고 차베스 프리아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오랜 암 투병 끝에 3월 6일 병원에서 숨졌다. 그러자 주류 언론은 포퓰리스트”니 “독재자”니 하며 차베스를 비난하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차베스는 비록 여러 약점과 한계가 있었지만 베네수엘라 빈민과 노동계급을 대변하려 했고, 전 세계 민중에게 영감을 준 인물이었다. 베네수엘라와 전 세계 곳곳에서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마이크 곤살레스가 차베스의 삶과 사상, 차베스 사후의 베네수엘라를 돌아본다. 마이크 곤살레스는《체 게바라와 쿠바 혁명》(책갈피)의 저자이고, 영국 글래스고대학교 스페인어문학부 교수이자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 당원이다.


대중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을 혁명이라 한다면, 우고 차베스의 볼리바르 혁명은 2002년 4월 11일에 시작했다.

우익 쿠데타 세력은 차베스를 납치하고 새 정부를 선포했다. 그 정부는 겨우 48시간 동안만 유지됐다.

차베스 지지자 수만 명이 차베스의 복귀를 요구하며 대통령궁을 포위했다.

그해 말, 우파는 사장 ‘파업’을 벌여 나라의 젖줄인 석유 산업을 마비시키려 했다. 이 시도는 차베스 지지자들의 대중 행동으로 패배했다.

차베스의 1998년 대선 승리는 외국에서는 별 반향이 없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효과가 굉장했다.

차베스의 선거 공약은 반제국주의적이었다. 특히 20세기 내내 베네수엘라를 지배한 미국에 적대적이었다.

차베스의 선거 공약은 민족주의적이기도 했다. 차베스는 19세기 라틴아메리카 독립 운동의 지도자 시몬 볼리바르의 기치를 내걸었다. 차베스는 부패한 국가 기구와, 그것이 은폐하는 매관매직 관행을 개혁하겠다고 약속했다.

1999년에 제정된 새 헌법은 사회 정의, 인권, 정치인의 책무 등을 보증했다.

그러나 차베스가 여전히 군대 내 지지 세력에 기대고 있었다는 점도 사실이었다(아래 기사를 보시오).

차베스는 빈민들의 대중적 지지를 받았지만, 차베스와 빈민 대중 사이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표현하는 조직은 없었다. 차베스의 정당인 제5공화국운동은 책임성이 없었고 부패 문제에 취약했다.

2000년에 차베스는 새 헌법에 따라 치르는 새 선거에 입후보했다.

그리고 2002~05년 볼리바르 혁명은 새롭고 더 급진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국가가 국영 석유 기업을 직접 통제하게 됐다. 그전까지 이 기업은 여타의 다국적기업처럼 자율적으로 운영됐다.

그러자 석유 기업의 이윤이 ‘미션’이라는 기층 조직들이 추진한 사회 개혁 프로그램, 특히 의료, 교육, 주택 프로그램의 재원으로 쓰였다.

2005년 세계사회포럼에서 한 연설에서 차베스는 베네수엘라가 “21세기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사람들은 이 선언을 기쁘게 받아들였지만, “21세기 사회주의”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불분명했다.

“21세기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와 대중의 참여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스탈린주의와 확실히 달랐고, 매우 반제국주의적이었다.

차베스는 UN[총회 연설]에서 부시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맹비난했고, 볼리비아와 에콰도르 같은 “새로운 좌파” 정부를 잇는 라틴아메리카 연합 조직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련의 선거 도전에서 차베스 지지가 성장하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2006년 차베스는 60퍼센트 이상의 지지율로 대통령에 재선했다. 몇 주 뒤 그는 베네수엘라 통합사회주의당(PSUV)이라는 새로운 정당의 설립을 선언했다.

혁명적 민족주의자가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변모한 것인가? 차베스는 레온 트로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안토니오 그람시를 자주 언급했다. 시몬 볼리바르와 신(神)도 동시에 언급했지만 말이다.

그 변모가 실질적인 것이었다면 PSUV는 대중 조직들이 직접 권력을 갖는다는 사상을 표현하는 정당이었을 것이다. 잠시 많은 좌파가 그렇게 기대했다.

거의 6백만 명이 PSUV에 가입했다. 이 숫자는 차베스의 인기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 준다.

그러나 PSUV는 쿠바 공산당 모형을 본받으려 했다. 그러나 쿠바 공산당이 민주적이라고 정평이 난 정당은 아니었다.

볼리바르 혁명의 역설은 사회적 진보가 유가 인상 덕분에 가능했다는 점이다.

석유 수익은 사회 개혁에 필요한 재원으로 쓰였고 이후에도 석유는 계속 베네수엘라 수출 수익의 주요 원천이었다.

차베스는 베네수엘라의 교역국을 다각화했다. 중국, 러시아, 이란이 베네수엘라 경제에 점차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됐다.

국유화

그러나 반(反) 차베스 진영이 히스테리를 부렸지만 재분배 정책은 없었다.

몇몇 기업이 국유화되고 시장 가격으로 보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도 대체로는 그 기업이 버려졌거나 가장 지독한 부패를 저질렀을 때에야 국유화됐다.

2006년 베네수엘라는 여러 모로 갈림길에 서 있었다. ‘우리 아메리카 민중을 위한 볼리바리안 동맹’(ALBA)이나 ‘라틴아메리카·카리브 해 국가 공동체’(CELAC) 같은 라틴아메리카 블록의 창설은 차베스의 볼리바르주의와 범아메리카주의적 관점을 표현했다.

그러나 이것은 차베스가 약속했던 ‘21세기 사회주의’나 민주주의 혁명이 아니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새로운 엘리트들이 떠올랐는데, 그들은 [차베스 지지자의 상징인] 빨간 모자를 쓰고 빨간 티셔츠를 입은 지배적 관료들이었다. 동시에 비효율이 나타나고, 주요 구상들이 도중에 좌초되고, 대중운동 지도자들이 체제 안으로 편입되면서 차베스를 권좌에 앉힌 바로 그 대중 조직들이 서서히 약해졌다.

모든 선거에서는 차베스의 커다란 인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골목 민심은 달랐다. 차베스의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듯 보이는 새로운 정치 기구에 대한 불만이 늘어났다.

공개적 의사 결정 과정은 없었다. 대신, 차베스는 일요일 아침에 방영되는 예능 특집 프로그램에 나와서 정책을 (흔히 사전 통보도 없이) 발표했다. 정부는 전략적 관점이 없이 정책을 급조한다는 인상을 줬다.

정치적 토론은 갈수록 양극화했다. 공개적 비난이 토론을 대체했다. 권력은 차베스와 그의 측근들에게 집중됐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의 대중 운동을 거리로 이끌어 낸 것은 새로운 자본주의 블록을 만든다는 구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베스를 저항과 다른 미래와 사회주의적 미래에 대한 그토록 강력한 상징으로 만든 “민중 권력”이라는 약속이었다.

치료를 받으러 생애 마지막으로 쿠바의 아바나로 떠나기 전 날, 차베스는 강력한 집단적 지도력을 구축해 놓았다고 TV 시청자들을 안심시켰다.

사실 차비스타[차베스 지지자] 국가[즉, 베네수엘라]의 권력은 차베스 자신에게 집중돼 있었다. 차베스가 없으면 십중팔구 정부 각료 개인들의 분파적 이해관계와 권력욕이 솟구쳐 나와 서로 대립할 것이다.

차베스에게는 분명히 있었던 그런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은 없다.

차베스 이후 베네수엘라가 직면한 대안은 둘 중 하나다. 차베스의 이름은 있지만 그의 영향력은 없는 국가를 점점 더 많이 활용하는 것이 하나이고, 여전히 “민중 권력”을 위해 투쟁할 준비가 돼 있는 강력한 대중 운동이 다시 부상하는 것이 다른 하나다.

차베스는 해방과 연대의 언어를 남겼다. 그러나 그런 언어를 새로운 사회[라는 현실]로 만들어 줄 조직은 아직 건설되지 않았다.

전설이 된 아웃사이더

1992년 2월 4일 베네수엘라 낙하산 부대의 한 젊은 대령이 쿠데타를 이끌었다. 쿠데타는 겨우 24시간 동안 유지됐다.

그의 이름은 우고 차베스 프리아스였다. 차베스는 체포됐고, TV를 통해 지지자들에게 잠깐 연설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쿠데타가 “지금은” 끝났다는 그의 연설은 전설이 됐다.

수십 년 동안 부패한 양당 관료제가 권력을 분점했다. 그리고 부자들은 석유 산업에서 손쉽게 돈벌이를 했다.

1989년 신임 대통령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즈는 IMF의 긴축 프로그램을 받아들였다. 빈민들은 3일에 걸친 도시 봉기 “카라카소”를 일으켰다.

봉기는 잔혹하게 진압당했지만, 분노와 항의는 계속됐다.

우고 차베스는 바리나스 주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교사였다.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나라들과는 달리, 베네수엘라의 군대는 하층 중간계급에게 출세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뒀고, 차베스는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차베스의 인생사는 분명 신화화됐지만, 그의 출신 배경은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조각 같은 혼혈인 외모, 말투와 행동 방식, 대중 문화에 대한 진심 어린 사랑 같은 것들 말이다.

부분적으로 이런 점 때문에 그가 베네수엘라 빈민과 노동계급에게 그토록 탄탄한 지지를 받은 것이다.

같은 이유로 중간계급은 차베스를 격렬히 증오했다. 인종적·사회적 기원 때문에 차베스는 아웃사이더였던 것이다.

사관학교에서 차베스는 빠르게 떠올랐다. 그가 주장하기로 자신의 또 다른 특기였던 야구를 잘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출신 배경이 비슷한 젊은 장교 소수가 그의 주변으로 모였다.

그들에게 주된 정치적 영향을 준 것은 베네수엘라 게릴라 운동의 지도자였던 더글러스 브라보였다. 브라보는 공산당이 게릴라 전략을 포기했을 때 공산당에서 떨어져 나왔다.

브라보의 핵심 사상은 그가 “민·군 동맹”이라고 부른 것이었다. 그것은 반체제적 장교, 농민·노동자 조직, 무장 세력의 연합을 뜻한다.

1992년 쿠데타는 이 세 세력들의 자발적 행동을 노린 것이었다. 그러나 브라보가 보기에는 난감하게도 차베스는 세 세력들의 자발적 행동을 군사 작전으로 제약했다. 나중에 차베스는 자기 전략을 선거적 방향으로 전환했다.

추천 소책자

  《차베스와 베네수엘라, 그리고 21세기 혁명》

    조지프 추나라 지음, 이수현 옮김, 노동자연대다함께, 60쪽, 2,000원

    구입 문의 : 02-2271-2395, alltogether@alltogether.or.kr

출처: 영국의 혁명적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 23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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