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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평화헌법은 어떻게 위협받았나

〈레프트21〉 97호와 100호에 실린 연재 기사인 ‘아베의 일본은 어디로 ―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일본의 ‘평화헌법’을 둘러싼 모순을 밝히고, 사회주의자로서 일본의 재군비를 명백하게 반대해야 한다는 점을 알려 매우 유익한 기사였다. 하지만 지면의 한계로 평화헌법이 제정된 배경과 평화헌법이 어떤 식으로 위협을 받았는지를 상세히 소개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기사 연재에 대해 간략한 보충을 하려고 한다.

평화헌법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1945년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와 소련군의 만주 침공으로 일본제국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항복을 선언했다. 곧 9월부터 일본 정부 대신 더글러스 맥아더를 최고사령관으로 하는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 흔히 GHQ로 알려져 있다)가 일본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초기에 SCAP는 일본이 항복하기 전에 연합국이 체결한 포츠담선언을 준수하여, 일본의 민주화는 일본 정부가 도맡아 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선언은 일본의 민주화를 건설할 주체가 일본 국민이라는 것을 명확히 했으며, 일본의 재무장을 금지했다. 그래서 SCAP는 되도록 일본 국민들이 스스로 일본의 민주화를 이루길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SCAP 측이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일본 정부는 쇼와 덴노를 위시로 한 육군 출신의 강경한 호전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비록 전쟁에서 패배했으나 군국주의 경향을 결코 내려놓지 않았다. 실제로 군부의 강경파들은 패전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결사항전을 부르짖었으며,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전쟁 책임자에 대한 문책을 일본 정부가 직접 처리하자고 큰소리치기도 했다. 초기에 SCAP가 일본 정치에 간섭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처음 꾸려진 전후 내각의 인사들도 모두 천황의 최측근들과 강경파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들은 패전의 책임이 일본 국민 전원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악명 높은 치안유지법과 불경죄법을 폐지할 수 없으며, 정치범들을 석방시킬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들이 만든 헌법 개정안 또한 기존의 일본제국헌법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상황이 이 지경이었으므로 SCAP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일단 SCAP는 자유주의자들로 구성된 내각을 만들었다. 또한 자신들이 직접 민주적인 새로운 일본 헌법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하지만 당시 SCAP의 최고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는 천황제를 폐지할 생각이 없었다. 맥아더는 천황제를 폐지하고 천황을 전범재판에 세우면 연합국이 원하는 대로 일본을 개혁하기 어렵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SCAP는 새로운 헌법안을 만들면서 천황제를 그대로 존치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천황이 일으킨 전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연합국들과 일본 국민들의 여론을 달래야 했으므로, 새 헌법안은 일본의 주권이 일본 국민들에게 있음을 명시하고, 일본은 향후에도 군사력과 교전권을 포기해야 함을 강력하게 표명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SCAP의 신 헌법안은 1946년 11월 3일에 선포되었다. 신헌법은 천황을 절대군주에서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격하시켰으며, 주권을 천황이 아닌 일본 국민들에게 부여하였다. 또한 모든 국민이 기본적인 인권을 가진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제9조인데, 이 조항은 “일본이 …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행사를 … 방기(제9조 1항)”하기 위해 일본이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을 금지(제9조 2항)했다. 이 조항으로 일본의 새로운 헌법은 ‘평화헌법’이라고 불렸다. 표면적이기는 하나 적어도 1946년까지만 해도 이렇게 철저하게 비무장을 선언한 나라는 일본밖에 없었다. 이러한 내용들이 들어가 있어 당시 일본 국민들은 새로운 헌법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냉전 속에서 부정되는 평화헌법

그러나 혼란스러운 동아시아 정세는 매우 긴박했다. 중국의 국공내전에서는 국민당군이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군에 의해 계속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미국과 소련 간의 갈등이 점점 더 심화되고 있었다. 또한 유럽 등 여러 지역에서 전후 처리 과정을 두고 미국과 소련은 자주 갈등을 겪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이 미국으로부터 몰래 입수한 정보들로 1949년에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이렇게 되자 미국은 동아시아를 더 이상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미국이 일본을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을 중요한 교두보로 선택하자, 평화헌법은 그것을 입안한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모두 부정당하기 시작한다.

사실 SCAP는 1947년 이전까지만 해도 여러 진보적인 정책들을 실시했다. 정치범들을 모두 석방하고, 다양한 사상을 가진 모든 정치단체의 활동을 허가했다. 전후에 실시된 첫 총선에서는 남녀 모두에게 투표권을 보장했다. 한편 전쟁에 동조하거나 참여한 군부 인사들과 문민 인사들을 공직에서 추방했으며, 전쟁에 협조한 재벌들을 해체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노동3권을 보장해 노동조합의 설립을 장려했다. 또한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로 채워져 있던 교육 내용을 전면적으로 수정했다. 그리고 농지개혁을 실시해 낮은 가격에 농민들에게 토지를 불하했다. 이러한 개혁적인 시도들은 일본인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그런데 1948년부터 미국은 일본을 민주적인 국가로 건설하는 것보다는 강력한 경제력을 갖춘 미국의 동맹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자면 강력한 힘을 가진 좌파는 미국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1948년부터 SCAP는 재벌의 해체를 중지하는 한편, 공무원과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파업을 엄격히 금지했다. 또한 각 분야에서 사회주의자들과 공산당원들을 축출하기 시작했고,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했다. 이렇듯 SCAP는 개혁을 이끌던 위치에서 반동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SCAP는 일본 정부와 협력해 실질적인 재군비를 꾀했다. 당시 주일미군이 한국으로 대거 파병되자, 맥아더는 일본 정부에게 사회 치안을 위한 경찰예비대를 신설하라고 한다. 이 경찰예비대는 전차, 곡사포, 총기, 전투함선 등 미군의 최신 무기를 갖추어서 군대나 다름없었다. 또한 이 시기에 SCAP는 공직추방령을 해제해 전쟁에 협력했던 인사 9만 명을 해금 조처했다. 심지어 이 중에는 악랄한 특별고등경찰관도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급기야 1954년에 일본 정부는 의회에 경찰 기동대를 투입시켜 방위청을 설립하고 자위대를 창설시킨다. 한편 일본과 하루 빨리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던 미국은 재빨리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고, 그 즉시 미·일 안전보장조약(이하 안보조약)을 체결한다. 이 안보조약으로 미국은 일본 영토에 미군을 주둔시킬 권리를 보장받았다.

심지어 패전한 지 10년도 지나지 않아 일본의 우익세력들은 개헌론을 주장했다. 일본의 우익들은 평화헌법이 SCAP가 강요한 부당한 것이며, 일본이 자주적인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들처럼 군사력을 가져야 한다고 외쳤다. 이러한 움직임은 강경 우익인 하토야마 이치로와 기시 노부스케가 연이어서 총리가 되자 극에 달한다. 하토야마 총리는 개헌을 할 수 있는 의석수 3분의 2를 채우기 위해 자유당과 민주당을 합해 자민당을 만들면서 ‘55년 체제’를 완성시킨다. 한편 후임인 기시 총리는 정부에 헌법조사회까지 신설시킨다. 하지만 당시 의석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던 사회당과 공산당은 이러한 계획에 격렬히 반대했다. 특히 이들이 예상치 못했던 것은 자민당에서도 개헌을 반대하는 이들이 상당히 존재했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일본의 우익들은 개헌을 철회하는 대신, 안보조약을 무기한의 조약으로 개정해 미일 간의 군사협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일본의 국민들은 이러한 개정을 용납하지 않았다. 일본 국민들은 일본이 미국의 동아시아 반공 체제에 들어가면 다시 대규모 전쟁에 휘말릴 수 있다며 불안해했다.

이와 같은 생각으로 일본 국민들과 진보단체들은 안보조약 개정을 막기 위해 공동전선을 꾸려 투쟁을 벌인다. 이것이 유명한 ‘안보투쟁’이다. 안보투쟁은 전후 일본에서 가장 격렬했던 정치투쟁으로, 매번 시위 때마다 전국에서 60만~2백만 명의 시민들이 참가해 의회를 점거하고 기동대와 격렬한 충돌을 벌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안보조약 개정을 저지할 수는 없었고, 오늘날까지 평화헌법에 반하는 미일 군사동맹은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재군비

호헌 반대 운동과 1년 남짓 동안 진행된 안보투쟁을 보면서 일본의 지배계급들은 개헌 시도가 정치적인 도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일본 내의 좌파세력이 많이 약해지고, 경제 위기로 일본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일본 우익들은 조금씩 다시 개헌과 군사대국화를 말하고 있다.

1990년대에 일본은 걸프전을 계기로 PKO협력법과 주변사태법을 통과시켜 자위대의 해외파병을 합법화했다. 2000년에는 44년만에 헌법조사회를 다시 발족시켰고, 그 후 헌법조사위원회로 격상시켰다. 2010년에는 헌법을 개정하기 위한 국민투표법이 통과되었다. 미국과 중국의 대립이 격화되고,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하자 일본 우익들은 더는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식으로 행동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 우익들의 개헌과 재군비 시도는 그리 쉽지 않다. 이미 개헌에는 일본 국민의 50퍼센트가 반대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 자민당이 자위대를 파병하고자 했을 때 일본 국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또한 최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태를 둘러싸고 일본인들이 진행하고 있는 반핵 시위를 보면, 일본의 평화운동이 상당히 강력한 힘을 구축해 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과 한국의 민중들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일본의 재군비는 결코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들을 고려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은 일본 우익들의 기만을 폭로하고 일본 내에서 평화를 원하는 광범위한 세력을 지지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레프트21〉의 기사를 다시 인용하겠다.

“자본주의 경쟁은 군사적 경쟁을 낳고, 이것은 재앙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낳는다. 일본의 재무장과 우경화도 이런 맥락에 있다. 이 매커니즘은 20세기 초중반에 일본이 야만적 침략으로 나아가게 만들었고, 동시에 일본 민중을 인류 최초 핵 재앙 피해자로 만들었다. 그런데 섬뜩하게도 이 매커니즘이 오늘날 다시 작동하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이 일본 재무장에 반대하고 근본적으로는 제국주의 체제에 맞서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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