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8일 영국의 전 총리 마거릿 대처가 사망했다. 많은 영국인들은 대처의 사망을 기뻐했다. 그러나 일부 자유주의 언론까지 포함한 한국의 주류 언론은 죄다 “영국병을 치유했다”느니 “영국을 구했다”느니 하며 대처를 칭송했다. 조중동은 노조를 파괴하고 운동을 탄압한 대처의 “리더십”을 배우라고 대놓고 주문한다. 무엇보다 박근혜는 자신이 ‘한국의 대처가 되겠다’고 자처해 왔다. 그러나 대처에 대한 많은 논의들은 왜곡·과장이 심하다. 영국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 유럽학 교수이자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중앙위원장인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대처 집권 시절 영국 상황을 분석하며 우리가 진정으로 배워야 할 교훈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마거릿 대처의 죽음을 맞이해 정관계와 주류 언론은 그의 “정치력”을 찬미하고 있다.

그러나 대처가 광원들한테 한 짓을, 그리고 다른 많은 노동계급 단체에 한 짓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그를 살인자로 기억할 것이다. 시인 셸리가 1819년 피털루 학살 뒤 보수당 정치인 캐슬레이 경을 살인자라고 지목했듯이 말이다. “나는 가는 길에 살인자를 보았네 / 살인자는 캐슬레이 가면을 쓰고 있었지.”

살인죄야말로 대처가 한 일에 걸맞은 죄목이었다. 때로 살인은 비유였다. 대처는 산업들과 공동체들을 박살냈고, 이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삶을 망치고 있다.

때로 살인은 현실이었다. 대처는 아일랜드에서 더러운 전쟁을 계속했다. 아일랜드공화국군 수감자들이 양심수 지위 인정을 요구하며 단식 투쟁을 벌였을 때, 대처는 양보하기는커녕 그들이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두면서 자신의 냉혹함을 보여 줬다.

대처가 기형적 식민지를 무력으로 되찾겠다고 터무니없는 결정을 하지 않았더라면,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서 아르헨티나 병사와 영국 병사 9백7명이 목숨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이 때의 유산으로 영국이 말비나스 제도(포클랜드 제도의 아르헨티나 명칭)를 영유하는 탓에 양국 관계는 아직도 험악하다.

경제 위기

대처는 전쟁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대처는 1990년 11월 마침내 자신의 내각에 의해 총리 자리에서 쫓겨나게 됐을 때조차,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를 상대로 벌인 전쟁이 끝날 때까지 총리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

대처는 도덕적으로는 경멸받는 인물이지만, 아마도 세계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마지막 영국 정치인일 것이다.

대처가 총리가 된 1979년 5월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점이었다. 세계경제는 1970년대 들어 두 번째 대불황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장기 호황이 완전히 끝났다는 증거였다.

경제 위기의 밑바탕에는 지난 호황기에 견줘 자본의 이윤율이 현저하게 떨어진 문제가 있었다. 수익성을 회복하려면 노동자 착취율을 끌어올려야 했다. 그러나 특히 영국에서 지배계급은 망치와 모루 사이에 낀 꼴이었다.

영국 지배계급은 호황기 동안 강력한 현장조합원 조직을 건설한, 잘 조직되고 전투적인 노동계급을 상대해야 했다.

광원과 항만 노동자들이 앞장선 영국 노동자운동은 1972~74년에 집권한 보수당 테드 히스의 공격 시도를 좌절시켰다. 1978~79년의 위대한 임금 투쟁(이른바 ‘불만의 겨울’)으로, 히스 실각 후 집권한 노동당이 도입한 사회협약*을 파기시킴으로써, 영국 노동자운동은 여전히 강력함을 보여 줬다.

대처는 이미 1979년 총선에서 승리하기 전에도 “철의 여인”을 자칭하고 다녔다. 이 말은 지배계급의 정치를 호황기 때보다 훨씬 더 무자비하고 전투적으로 바꿔 놓겠다는 뜻이었다. 대처는 1930년대의 대공황과 함께 매장됐던 자유시장주의 정설을 다시 끄집어냈다.

대처는 나중에 ‘신자유주의’라고 알려진 것을 개척한 인물이다. 그는 오래지 않아 미국의 우파 공화당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라는 엄청나게 막강한 동맹을 얻었다.

그러나 레이건은 대처보다는 덜 강력한 노동자운동을 상대했다. 1981년 1월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인 폴 볼커가 강력한 고금리 정책을 펴 야기한 혹독한 불황의 덕을 볼 수 있던 때였다.

대처와 그 추종자들은 대처의 용기를 칭송하길 좋아했다. 그러나 사실 대처는, 특히 집권 초에는 노동계급의 강력한 대응을 유발할 수 있는 때 이른 대립을 이래저래 회피하려 했다.

대처는 전임 총리인 노동당의 헤럴드 윌슨과 짐 캘러헌이 물려준 이점을 누렸다. 노동당 정부가 추진한 사회협약은 결국 실패했지만, 점점 더 관료화하던 고참 직장위원들은 사회협약을 계기로 사측과 국가에 협력하게 됐다.

기업주들은 이 덕분에 영국 레이랜드자동차처럼 직장위원들이 아주 강력한 곳에서도 노동자들을 공격할 수 있었다. 버밍엄의 롱브리지 공장 노조 위원장이던 데릭 로빈슨은 현장에서 고립됐고, 결국 탄압 당했다.

또한 이런 분위기에서는 흔히 부문주의가 연대 정신을 압도했다. 덕분에 대처는 1984~85년의 영웅적 광원 파업을 쉽사리 고립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대처는 운이 좋기도 했다. 아르헨티나 무기 제조업체들이 폭탄만 제대로 만들었어도 영국 함대는 대부분 남대서양에 수장됐을 것이고, 대처는 수치스럽게 사임해야 했을 것이다.

국내 정적들 또한 대처에게 행운이었다. 특히 노동당 정치인이 그랬다. 맨처음 상대한 마이클 풋과 그 뒤를 이은 닐 키녹은 빈 수레가 더 요란하다는 말이 딱 어울렸다.

무엇보다 노조 지도자들의 무능력이야말로 대처에게 큰 행운이었다. 노조 지도자들은 광산 마을 주민들이 1년 내내 고립돼 싸우도록 방치했다. 이는 노동자운동 역사에 길이 남을 수치스런 일이었다. 중무장한 경찰 기동대가 광산 마을을 점령하고 대처의 패거리는 파업 파괴자 조직을 만들었다. 절망과 궁핍에 광원들의 투쟁 의지는 깎여 나갔다.

날아간 기회

그럼에도 대처를 물리칠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 무엇보다 1984년 7월 파업 파괴 행위에 대응해 항만 노동자들이 전국적 파업을 일으켰을 때와 그해 가을 광산의 직·반장들이 조업 중단에 나서려 했던 때가 그런 기회였다. 두 경우 모두에서 노조 관료들은 대처를 구하려 나섰다.

대처는 이런 전투들에서 승리한 뒤로 시장의 논리를 극단으로 밀어붙였다. 1980년대 후반에 대처는 재무부 장관 나이절 로슨과 함께 신자유주의 시대 최초의 금융 거품 호황을 부추겼다.

그러나 결국 대처는 과욕을 부리다 실패했다. 자신감에 가득 찬 대처는 1989~90년에 인두세를 도입했다. 인두세는 지방정부 재정을 벌충할 요량으로 백만장자와 빈민에게 세금을 똑같이 부과하는 세제였다.

사회적 불만이 갑자기 솟구쳤다. 런던에서는 1930년대 이래 가장 큰 소요가 벌어졌고 1천4백만 명이 인두세 납부를 거부했다. 결국 보수당은 자신을 보호하려면 대처를 내쫓고 인두세를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대처 집권기에서 끌어낼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우연히 대처는 자신이 시작한 것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복지 국가가 공격받는 시점에 죽었다.

더욱 거대한 사회운동을 건설해 보수당과 자유당의 연정을 끌어내리고, 대처가 상징하는 모든 것을 그의 관보다 더 깊이 묻어 버리는 것이야말로 노동계급이 대처에게 복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출처: 영국의 혁명적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 23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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