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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민주주의’를 짓밟으며 태어난 악법

한국 지배계급이 국가보안법으로 “수호”하려고 한 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을 해치면서까지 자신들의 부, 권력, 기득권 체제를 지키려 했다. 이것이 국가보안법이 탄생한 이유다.

국가보안법은 한국 정부가 수립된 지 4개월도 안 된 1948년 12월 1일 공포·시행됐다.

1948년은 제주 4·3항쟁과 10월 여순반란사건이 있던 해다. 미·소의 한반도 분할 점령과 분단에 저항하는 민중항쟁이 거세게 일어나자 위기를 느낀 이승만은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할 때 쓴 ‘치안유지법’을 고스란히 베껴 국가보안법을 만들었다.

치안유지법

국가보안법은 당초 의도했던 목적을 유감없이 달성했다. 1949년 한해에만 이 법으로 검거·투옥된 사람이 11만 8천6백21명이고, 그 해 9~10월 사이에 정당과 사회단체 1백32곳이 해산됐다. 좌익수의 엄청난 증가 때문에 기존의 형무소는 물론, 판사까지 모자랄 지경이었다.

박정희 정권 때도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이 둘은 전두환 정권 때 국가보안법으로 합쳐진다)은 악명을 떨쳤다. 4·19 혁명 때 터져 나온 노동자·민중의 요구를 억누르면서 산업을 급속히 발전시키려면 반공 이데올로기와 국가보안법·반공법이 필요했다.

전두환도 저항이 분출했던 1987년 대대적으로 국가보안법 탄압을 벌였고, 노태우 역시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을 계기로 공안정국을 조성해 국가보안법을 휘둘렀다.

특히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운동이 활발해지자, 노동운동 단체에 국가보안법 적용이 집중됐다. 1990년에는 구속노동자 4명 중 1명이 국가보안법 위반이었다.

자유주의 정권들도 국가보안법을 버리지 못했다.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은 비약적으로 성장한 노동자·민중 운동을 두려워했고 억압의 상징인 국가보안법을 없애는 모험을 하기보단 권위주의 유산을 이어받았다.

그 자신이 국가 탄압의 피해자였던 김대중은, 재임 기간 동안 전두환 못지 않게 해마다 많은 사람을 국가보안법으로 가뒀다. 특히 IMF로 상징되는 경제 위기에서 한국 자본주의를 구하려면 노동자들을 짓눌러야 했는데, 그 무기로 국가보안법이 요긴하게 쓰였다. 노무현 정부도 한미FTA 반대 운동과 반전 운동을 주도적으로 건설한 민주노동당을 겨냥해 ‘일심회’ 사건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