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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 이후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정부들:
진정한 ‘21세기의 혁명’을 향하여

차베스 사망 이후 그를 구심으로 했던 라틴아메리카의 정치 불안이 커지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부들이 등장한 배경, 차베스 사망 전부터 드러난 한계와 오늘날 나아가야 할 길을 살펴본다.

21세기의 첫 10년 동안 베네수엘라·볼리비아·에콰도르·우루과이·아르헨티나 등 라틴아메리카 곳곳에 좌파 정부가 들어섰다. 기층 민중의 저항과 분노에 힘입어 등장한 이 정부들은 신자유주의와 결별하겠다고 웅변했다. 전 세계 좌파들은 우익 쿠데타, 공공서비스 민영화, 산업 구조조정에 맞선 이들의 투쟁에 주목했다.

베네수엘라의 고(故) 우고 차베스를 정점으로,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등이 이끈 좌파 정부들은 자국의 천연자원을 갈취해 가는 다국적기업들에 세금을 더 물려 그 돈을 민중에 쓰겠다고 약속했다. 실제로 일부 성과도 났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전개되는 상황은 우려스럽다. 이 정부들이 자신의 지지 기반인 사회운동에 등을 돌리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에콰도르의 대통령 코레아는, 석유·광산 기업을 규제하고 물·토지에 대한 통제권을 달라고 요구하는 원주민 운동을 탄압했다. 코레아는 석유 국유화에 반대했고, 석유 매장량이 풍부한 아마존 지역의 개발권을 현지 기업과 다국적기업들에 넘겼다. 이에 맞서는 운동의 지도자를 투옥하기도 했다.

한계를 드러내는 ‘21세기 사회주의’ 난개발로 피해를 입을 원주민들과 지지자들이 수도 라파스까지 6백40킬로미터를 행진했다. 하지만 수도에서 이들을 맞은 것은 모랄레스 정권의 경찰이었다. 2012년 6월 27일, 라파스 내 무릴로 광장 진입로에서. ⓒ사진 출처 castromendivilphoto (플리커)

다국적기업의 물 사유화 반대 투쟁으로 유명해졌던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정부도 비슷하다. 모랄레스는 볼리비아 동부에 4백50킬로미터짜리 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고 결정했다. 이 고속도로가 건설되면, 다국적 석유·광물 기업들이 수출품을 운송할 육로를 확보하게 된다. 반면, 주로 소농인 현지 원주민들은 난개발로 피해를 볼 것이 뻔하다.

이에 반대해 원주민 시위대가 수도 라파스를 향해 6주에 걸쳐 행진을 벌였다. 모랄레스 정부는 수도 근교에서 경찰 폭력으로 이들을 맞이했다.

이런 일들이 예외적인 것은 아니다.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부들의 핵심 공약인 국유화도 불균등하고 모순적으로 추진됐다. 예컨대, 볼리비아의 천연가스 국유화는 사실상 다국적기업과 세율을 재협상한 수준으로, 베네수엘라에 훨씬 못 미친다.

볼리비아뿐 아니다.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정부들은 ‘21세기 사회주의’를 말하면서도, 석유·광물 채취나 콩·옥수수·설탕·팜유 등 수출 농업 등을 기초로 한 경제 구조를 강화하고 있다. 이전과 달리 미국뿐 아니라 중국, 러시아, 브라질로 수출 시장이 다변화했지만 말이다.

모순적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부들의 모순과 혼란을 이해하려면 이들이 등장한 배경인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운동을 이해해야 한다.

1980년대에 라틴아메리카를 휩쓴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책으로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 산업 기반이 무너지고 복지가 축소됐다. 조직 노동계급이 약해지고 도시 빈민이 급격히 불어났다. 석유·광물 자원을 개발한다는 이유로 개발 대상 지역 원주민들이 박해받고 쫓겨나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런 상황에 반발해 1990년대 들어 사회운동이 부상했다.

그러나 소련 붕괴를 거치면서 중남미 좌파들은 혼란에 빠지고 지도력을 제공하는 데 실패했다. 제3세계 민족주의자나 사회 복지 영역에서 국가의 공백을 메운 NGO들이 지지를 얻었다.

NGO의 영향이 커지면서 교육·보건·주거·공공서비스 등 단일 쟁점을 둘러싼 운동과 원주민 운동이 중심이 된 새로운 운동이 떠올랐다. 정치 거부, 수평성, 파편성, 문화적 정체성 찬양이 유행했다. 그러다 보니 정치적·경제적 권력 문제에 직면해 사회운동과 좌파 정부들은 종종 모순과 혼란에 빠졌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는 좌파 정부 중 가장 급진적이었다. 차베스는 대중운동과 노동자 투쟁의 힘으로 지배자들에 맞서면서 본격적으로 전진했다. 2002년 두 차례에 걸친 우익의 공격을 좌절시킨 노동자·빈민의 대중 행동은 ‘혁명’의 진정한 1막을 열었다.

이에 고무된 차베스는 아래로부터 직접 통제·운영되는 기구를 통해 ‘미션’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복지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 결과 2004~05년에 빈곤율이 사상 처음으로 크게 하락했고 건강 관련 지표들이 개선됐다.

어용 노총에 맞서는 대안으로 현장노조연맹(UNT)이 건설됐고, 이들이 처음으로 주도한 메이데이 집회에서 차베스는 ‘21세기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자고 호소했다. 그 후 ‘21세기 사회주의’는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부들의 슬로건이 됐다.

그러나 이 ‘21세기 사회주의’는 모호했고, 시장경제를 완전히 극복할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임금노동과 착취라는 경제 운영 방식은 도전받지 않았다. 수출의 80퍼센트 가까이 차지하는 ‘기간산업’에서는 사장들의 직장 폐쇄에 맞섰던 노동자 통제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자본 몰수나 사적 소유 철폐는 없었고, 국유지는 소농들에게 분배됐지만 거대 사유지는 대지주들의 손에 남았다. 국유화한 시설들은 대개 폐업 위기에 처한 공장을 제값을 주고 국가가 구매한 것들이었다. 흔히 과대 포장되는 베네수엘라·볼리비아의 협동조합들은 사실상 영세 기업이고, 끝내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2008년 세계경제 위기 때문에 유가가 하락하자 이런 일은 더 심해졌다. ‘미션’ 예산은 대폭 삭감됐고, 지역 조직들은 운영난에 시달렸다. 소농들의 조직이 대지주의 사유지를 점거하면 탄압받기 일쑤였다. 파업은 ‘집단 이기주의’라는 비난을 받았고, 노동자들은 임금 삭감 압력에 시달렸다. 차베스도 2010년 지하철 파업 때 노동자들을 공격하고 UNT와의 협상을 거부해 지지자들을 놀라게 했다.

차베스가 건설한 베네수엘라 통합사회주의당(PSUV)은 민중 권력의 구현이라고 칭송받았지만, 실상을 보면 볼리바르식 혁명을 주도한 활동가부터 기업인과 부패한 국가 관료까지 다양한 인물이 당에 뒤섞여 있다. 지도부는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임명됐고 당의 활동은 차베스의 지시를 운동에 하달하는 것과 선거 캠페인을 조직하는 것으로 제한됐다. 당내 논쟁은 종종 ‘차베스에 대한 도전’이라 간주돼 차단됐다.

차베스가 사망하고 니콜라스 마두로가 신임 대통령 임기를 시작한 지금, 새 정부는 ‘차베스 이후의 혁명’이 어때야 하는지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차베스 시기에 발의한 최저임금 20퍼센트 인상 법안은 국회 내 격렬한 난투 끝에 통과됐지만, 전력 기업의 사보타주(고의적 방해 행위)로 생기는 잦은 정전과 만성적 식량 부족 등은 여전하다. 마두로는 ‘거리의 정부’라는 이름의 운동을 시작했지만, 우파와 관료 들의 사보타주는 여전하다.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부들의 현 상황은 진정한 ‘21세기 사회주의’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국가 기구에 의지해야 하는가? 좌파 정부를 선출한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까? 답은 부정적이다.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기존 국가를 접수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해야 한다”고 말했다. 선출되지 않은 기업주와 관료 등 자본주의 정치·경제 체제의 진정한 지배자들에게서 권력을 빼앗아 노동자·민중이 사회를 직접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10년 전의 라틴아메리카 운동은 그 잠재력을 힐끗 보여 줬다.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주의자와 좌파는 그런 일을 일관되게 추진할 수 있는 혁명적 노동계급 정당을 건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