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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당직 선거 쟁점 - 민주노동당은 북한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민주노동당 당직 선거 쟁점

민주노동당은 북한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선거에서 북한과 북핵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뜨거운 논쟁으로 떠올랐다.

북한의 개인 숭배와 인권 문제 등을 비판해야 한다는 주대환 씨와 잘 모른 채 조급한 비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이용대 씨 사이의 논쟁은 과연 북한 사회가 남한 사회보다 진보한 사회인가 하는 문제를 밑바탕에 깔고 있다.

오늘날의 북한이 남한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대안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 1995년부터 식량난으로 굶어죽는 사람들과 북한 난민이 생겨났고, 룡천 사고에서 보듯이 북한의 의료 체계는 의약품 부족으로 붕괴돼 있다. 오랜 독재를 경험한 남한 노동계급에게 김일성의 생일을 명절(태양절)로 정한 것도 좋게 보일 리 없고, 조선로동당 관료들의 특권과 관료주의와 부정부패도 신물난다.

이런 주장이 거슬리는 사람들의 반론은 우회적이다.(북한 사회가 더 진보적이라는 주장은 1990년대 중반 이후 더는 공개적으로 듣기 어렵다.) 북한을 잘 알지 못하므로 북한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거나 북한을 비판하는 것은 국정원이나 미국 CIA와 비슷한 입장이라는 식이다. 북한 비판에 사실상 재갈을 물리는 것이다.

주대환 씨는 “북한 문제만 나오면 북한을 잘 모른다고 하는데 국민들은 다 알고 있다. 꽃제비니 탈북자니 하는 사실이 언론에 나오고 있지 않은가” 하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민주노동당 안팎의 친북 좌파들로부터 포화를 맞았다.

고난의 행군

물론 북한에 대한 정보는 얻기도, 믿기도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남한에서 열람할 수 있는 문서가 매우 제약돼 있는 데다가 국내외 냉전주의자들의 거짓말과 왜곡을 잘 걸러 내야 한다.

북한 정권도 정보를 비민주적으로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남한과 미국의 정보 기관들이 왜곡하고 거짓으로 조작할 여지가 생긴다. 북한 중앙통신은 룡천 사고에 대해서도 며칠이 지나, 그것도 매우 간단하게만 보도했다.

무엇보다 아무 제약도 받지 않는 완전한 남북 자유 왕래가 실현돼 북한의 어디든 안내원 없이 갈 수 있다면 우리는 북한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게 부족한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북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우리는 북한 식량난의 심각성을 〈조선일보〉를 통해서가 아니라 국제사회에 대한 북한 당국의 쌀 지원 요청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김일성은 주체농업과 관련해 두 권의 책을 쓴 일본인 교수 가와타 신이치로에게 “쌀은 사회주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쌀을 지원받아야 할 상황이라면 그것은 이만저만한 위기가 아니다.

북한의 심각한 경제 위기는 “‘고난의 행군’ 정신으로 살며 싸워나가자”는 북한 정권의 호소에서도 드러났다. ‘고난의 행군’은 만주 항일전투 시절 김일성이 이끄는 부대가 일본군에 쫓기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1백여 일 남짓 눈 속의 행군을 벌였던 것을 말한다.

또, 조선로동당 간부의 “특권계급화”, “세도와 관료주의, 부정부패”는 〈로동신문〉이 그것들에 “반대하는 투쟁”을 호소한 데서 알 수 있었다.

이용대 씨는 북한에 대한 비판을 삼가야 하는 이유로 조선로동당이 “통일의 대상”이라는 점을 꼽는다. 화해하고 평화를 이뤄야 할 대상을 비판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남한과 북한이 적대를 끝내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며, 강대국의 간섭 없이 민족 다수가 원하는 방식으로 통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노동자 권력이라는 과제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이뤄지는 통일이라면, 사회주의자들은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남북 노동자 계급의 연대와 단결을 우선시해야 하며 궁극적으로 남북 모두에서의 노동자 권력을 지향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북한 인민을 북한 정권으로부터 분리해 생각하는 것은 냉전 우익 세력의 논리와 똑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냉전 우익 세력은 북한의 노동계급이 더 많은 권리와 진정한 권력을 쟁취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냉전 우익 세력은 북한 민중을 자기가 직접 통치하게 되기를 바라거나 그게 안 된다면 북한 정권이 유지되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한다. 1989년 중국 톈안먼 항쟁 이후 서방 정권들은 덩샤오핑의 학살을 지지했다.

우리는 북한 민중에 대한 북한 정권의 억압에 반대함으로써 북한 민중에게 연대해야 한다. 또, 우리는 남북 화해와 협력을 망칠까 봐 북한 민중이 남한 정권과 자본가들에 대한 반대를 주저하지 않기를 바란다. 예컨대 싼 임금을 좇아 개성으로 몰려드는 남한 자본가들의 착취에 북한 노동자들이 저항한다면 우리는 주저없이 북한 노동자들을 지지해야 한다.

판도라의 상자

한편, 주대환 씨의 북한 비판에는 북한과 거리 두기를 과시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 “프롤레타리아독재론에 근거한 스탈린식 국가사회주의”가 아니라 “민주적 사회주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주대환, 〈민주적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적 사회주의”는 의회사회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주대환 씨는 “파탄난 북한식 사회주의”(주대환, 〈정말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인가〉)보다 남한과 서방의 시장 자본주의 체제가 더 역동적이며 따라서 북한이 시장 개방을 해야 한다고 시사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어떻게 북한이 1970년대까지 남한보다 더 역동적인 발전을 이룩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북한은 사회주의와는 조금도 닮은 점이 없는 착취 사회이다. 국가가 내부적 경쟁을 최소화하고 축적을 강박적으로 추진하는 국가자본주의 모델이 세계적으로 성장을 구가하던 시절에 북한은 어느 경제 못지 않은 활력을 드러냈다. 1972년에 북한을 방문한 〈뉴욕 타임스〉의 해리슨 솔즈버리 기자는 “1인당 기준으로 보면 북한은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의 어떤 나라보다도 산업화된 나라”라고 썼다.

하지만 세계화로 세계적 규모의 기술 진보가 국경을 넘는 자원 이동에 점점 의존하게 되면서 국가자본주의라는 낡은 모델에 집착한 경제들은 가장 선진적인 세계적 기술 수준에서 뒤쳐지게 됐다.

북한이 세계 경제와의 접촉 노력을 아예 안 했던 것은 아니다. 1971년부터 1976년까지 6개년 계획이 진행될 때 이미 “종래의 자력갱생, 폐쇄경제에서 벗어나 서구 국가들과 국교를 수립하고 경제 협력을 추진해야 한다는 결론(와다 하루끼)”을 내렸다.

1973년에 덴마크·노르웨이 등과 국교를 수립하고 스위스·일본·영국과 통상 관계를 확립했다. 그리고 이 나라들로부터 플랜트를 대량 수입했다. 그러나 결과는 혹독했다. 오일 쇼크 탓에 1974년 가을에 북한은 지급 불능 상태를 경험했다.

1984년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한 뒤 합영법을 공포하면서 다시 조심스럽게 외국인 투자를 받아들일 채비를 갖췄다. 1987년에 조선로동당 이론지 〈근로자〉는 “우리의 장비와 설비를 세계의 과학적 기술적 경향에 맞춰 나가야만 소비 제품의 생산성과 품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선언했다.

그 뒤 북한은 나진-선봉 무역지구, 신의주 특구, 그리고 개성공단에 이르기까지 여러 굴곡을 거치면서 시장 개방으로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 그러나 시장 개방이 북한에게 순탄한 성과를 제공할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옛 소련과 동유럽에서 시장 개방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파탄으로 몰아넣었다.

2002년에 시행된 7.1 조치는 벌써부터 물자 부족, 물가 인상, 임금 체불 같은 불만을 낳고 있다고 한다. 북한 관료들은 시장 개방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가득 차 있고 이것이 괜한 두려움은 아니다.

위선

당면한 문제는 시장 개방이 낳을 효과보다 미국과 관계 정상화가 되지 않는 한 시장 개방에도 한계가 있다는 데 있다.

주대환 씨는 북한의 핵(전술)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켜 “일본 자본 1백억 달러를 더 멀리 내쫓고 있다”(주대환, 〈정말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인가〉)고 말한다. 그러나 북한이 일본과 가까워지려는 조짐을 보일 때마다 중간에 끼어들어 사태를 그르친 것은 북핵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주대환 씨는 북핵 문제에 대해 “양비론은 현재 상황에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물론 북한이 하고 있는 위험천만한 게임을 두둔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반도 위기의 근본적 원인이 미국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미국의 세계 제패 전략은 전 세계 국가들에게 대량살상무기의 필요성을 각인시키고 있다. 북한을 방문한 한 〈동아일보〉 기자는 이라크 전쟁 직후 북한 인민들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그들[북한 국민들]은 미국이 이라크에 대한 사찰에서 위협적인 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과, 그럼에도 공격을 단행한 것 사이에서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이라크는 실제로 아무런 대항 능력이 없다는 것을 미국에 확인시켜 주었고, 바로 그 때문에 미국으로부터 공격을 당했다는 것이다.”(신석호, 《토요일에는 통일을 이야기합시다》)

북한보다 남한과 서방식 시장 자본주의 체제가 우월하다는 주대환 씨의 암묵적 가정은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한 혼란도 부추기고 있다. “UN의 북한 인권 결의안”에 대한 태도를 묻는 질문에 주대환 씨는 “고민해 보겠다”며 망설였다.

하지만 사담 후세인이 만든 이라크 감옥에서 미국이 벌인 끔찍한 고문은 미국이 어느 나라의 인권도 비난할 자격이 없음을 분명히 보여 줬다. UN을 등에 업는다 해도 말이다.

우리는 북한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개선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것은 미국의 개입이 아니라 북한 민중 자신의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