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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역사에서 배운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생애

고전 마르크스주의자인 안토니오 그람시는 러시아에서 성공을 거둔 레닌과 볼셰비키의 혁명 전략을 서구 사회에 맞게 창조적으로 계승·발전시키려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람시는 혁명을 부정하는 자들에 의해 곡해됐다. 최근에 그람시를 제대로 재발견하려는 흐름이 등장하며 주목받고 있다. 〈레프트21〉도 이에 기여하고자, 최일붕 노동자연대다함께 운영위원이 지난해 맑시즘2012에서 그람시의 생애와 정치적 유산을 다룬 글을 싣는다. 최일붕은 다가오는 맑시즘2013에서도 ‘안토니오 그람시와 《옥중수고》’를 주제로 연설한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1891년 이탈리아 남부의 빈곤한 농어촌 지역인 사르데냐 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지주도 소작인도 아닌 하급 공무원이었으니 당시 사르데냐 사회에서는 중간계급에 속한 가정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지역 유지들에게 잘못 보여 억울하게 옥살이를 상당 기간 한 적이 있어, 이후로도 그람시의 집안 형편은 넉넉치 못했다. 대학 시절에는 끼니를 거르기까지 해야 했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람시는 다섯 살 때부터 척추장애아가 돼, 이후 ‘꼽추’라고 천대받으며 살아야 했다. 게다가 척추장애로 말미암은 퇴행성 질환 때문에 그는 평생 병치레로 골골해야 했다. 또, 척추장애로 그람시는 매우 단신에 가분수인 외모로도 마음고생을 했다.

그람시는 무솔리니의 감옥에 수감돼 있는 동안 척추 카리에스, 결핵, 동맥경화증 등으로 극심하게 쇠약해졌다. 하지만 파시스트 정권은 그를 치료하길 사실상 거부했다. 마침내 그람시는 1937년 옥사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 순교자로 존경받고 있다.

그람시는 스무살 때인 1911년 이탈리아 북부의 공업 도시 토리노의 토리노대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들어갔다. 그는 언어학을 전공하면서 철학·역사학·문학 등 인문학 분야도 열심히 공부하는 한편으로 1913년 이탈리아 사회당(PSI)에 가입했다.

그러나 1915년 그람시는 건강이 나빠져 한 학기를 남기고 졸업을 포기한다. 대신에 그는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적 정치 활동에 뛰어들어 1915년 사회당 신문의 기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즈음 이탈리아는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했고, 가차없이 군수품 생산을 촉진했다. 금속 산업, 특히 자동차 공업과 주조 공업이 급성장했다. 노동계급도 급성장했다. 하지만 전쟁 인플레로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대폭 줄어들었고, 공장은 군대의 규율에 종속돼 노동강도가 엄청나게 강화됐다.

농민과 농업 노동자는 징집돼 무려 5백만 명이 전장으로 보내졌다. 그 가운데 60만 명이나 사망했고, 훨씬 더 많은 수가 지체장애인이 됐다.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18년 말~1919년 초 이탈리아는 정치적으로 폭발 일보직전의 활화산이 됐다. 실업이 급증했고, 식료품과 물자가 크게 부족했다. 사병들인 농민들은 불만과 보상에 대한 기대 심리로 급진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토지 재분배를 요구하는 격렬한 행동이 급증했다.

노동자들도 고용 보장과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단체행동을 했다. 특히 토리노 노동자들은 투쟁 전통이 아주 강력했다. 이들은 1911년 이래의 전통에 따라 공장에서 ‘내부위원회’라는 현장조합원 조직을 건설했다.(오늘날 한국에서 ‘현장조직’이라고 얼토당토않게 불리는 것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이 조직의 특징은 노조 가입 여부와 관계 없이 모든 노동자들을 아울러 쟁의를 준비시킨다는 점이다. 이 점은 당시 이탈리아 상황에서 매우 중요했는데, 전쟁 덕분에 여성을 포함한 새로운 노동자층이 대거 공장으로 유입됐기 때문이다. 토리노 내부위원회들의 활약에 힘입어 이탈리아 금속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 실업보험, 내부위원회 인정 등을 얻어 냈다.

한편, 이탈리아는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 편에 섰는데도 전리품으로 얻은 영토가 지배자들과 민족주의자들에겐 너무 불만족스러워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민족주의 시인 단눈찌오가 주도한 준군사조직이 군부의 사주와 후원으로 발칸반도의 도시 리예카를 강점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이로써 우익이 의회 바깥의 행동으로 일정한 성과를 얻어 낼 수 있다는 생각과 전례가 마련돼 파시즘의 비옥한 토양이 됐다.

이제 우익이든 좌파든 중앙 정부를 무시하는 게 일상사가 됐다. 이탈리아는 1917년 당시의 러시아를 방불케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1919~20년의 “붉은 2년(Biennio rosso)”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다.

비엔뇨 로소 (Biennio Rosso)

1919년 토리노 노동자들은 내부위원회를 기반으로 공장평의회를 설립했다. 공장평의회는 공장 운영을 담당했다. 자연히 기업주의 경영권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람시는 한걸음 더 나아가, 공장평의회가 혁명적 지방정부 구실을 하는 러시아 소비에트처럼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붉은 2년” 1919~1920년 이탈리아에서는 러시아 혁명 시기를 방불케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공장을 점거한 토리노 노동자들이 총을 들고 점거 현장을 사수하고 있다. 이들은 ‘적위대’라 불렸다

그리고 그람시는 1919년 5월 혁명적 주간신문 〈새 질서 L’Ordine Nuovo〉를 창간해 매주 공장평의회를 핵심 이슈로 다뤘다. 그래서 〈새 질서〉는 공장평의회 신문으로까지 알려졌다. 〈새 질서〉는 다음과 같은 운동을 벌였다 ― 모든 노동자가 공장평의회 투표권 갖기, 각 작업장마다 자신의 작업장 대표 선출하기, 현장 노동자들의 참여와 통제를 증대시키기 등.

그러나 그람시가 하나 놓친 게 있다. 그람시는 사회의 혁명적 변혁이 있어야만 노동자 관리가 온전히 발전하고 유지될 수 있다는 점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변화가 없으면 공장평의회는 수많은 개개의 쟁의에 휩쓸리고, 거기에 에너지를 소모하고, 마침내 좀 더 투쟁적인 신종 노조 대표자 기구가 되는 것에 머무를 위험이 있었다. 이것은 노동조합 관료 기구의 개혁주의에 의해 포섭되고 순치되는 길이었다.

그람시는 공장평의회의 존재에 매료된 나머지 혁명적 정당(그람시는 이를 “근대 군주”라고 불렀다)의 구실도 과소평가했다. 이는 어느 정도 사회당의 나머지 분파들이 ― 초좌파*인 보르디가 파를 포함해 ― 보이고 있던 엘리트적 당 개념에 대한 반발의 성격도 짙었다. 그들은 모두 대중의 자주적 활동을 경시하고 당이 대중에게 해방을 가져다줄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람시의 반발은 자신의 고유한 입장을 옹호해 당내 투쟁을 벌이는 것을 회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덕분에 득을 본 건 아마데오 보르디가의 초좌파와 세라티의 중간주의*파였다. 또한 그 덕분에 그람시 파와 〈새 질서〉의 영향력도 토리노와 그 배후지에 국한되게 됐고, 노동조합 관료들도 협공에 가세하기가 쉬워졌다.

한편, 기업주들은 공장평의회를 깨뜨리고자 안달이 나 있던 터에 그람시와 〈새 질서〉 파가 토리노에 고립돼 있는 틈을 봤다. 1920년 9월 사용자들은 이탈리아의 가장 중요한 공업 도시로 〈새 질서〉의 영향력이 미미했던 밀라노에서 먼저 대량 해고 공격을 자행했다. 이에 대한 반격으로 공장 점거 투쟁이 일어나 며칠 만에 1백만 명이 공장을 점거했다. 그리고 이 운동은 토리노로도 번졌다. 공장 점거로 공장평의회들도 활력을 되찾았다.

공장 점거 운동의 힘은 밀라노와 토리노가 서로 불균등했다. 〈새 질서〉의 영향력이 미미한 밀라노에서는 노조 관료들과 사회당이 공장평의회를 설립하고 통제했다. 그들은 공장 점거 운동을 총리 졸리티가 이끄는 정부를 압박하는 수단으로만 여겼다. 자기들과 기업주들 사이를 중개하라고 요구하면서 말이다.

다른 한편, 토리노에서는 노조 관료와 사회당 정치인 들이 〈새 질서〉를 지지하는 노동자들의 기세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그람시는 사회당과 결별해야 했다. 안타깝게도 그람시는 혁명가들이 사회당과 별개인 공산당을 창립해야 한다는 생각을 반년 전쯤인 1920년 봄에야 하기 시작했었다. 그람시와 〈새 질서〉 파야 순식간에 새 당을 설립할 수 있었겠지만, 공장평의회의 다수와 사회당의 전국 당원을 설득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는데, 시간이 없었다.

결국 사회당과 노동조합총연맹 관료들이 그동안 벌이던, 혁명을 둘러싼 추상적 논쟁극을 끝마치면서 토리노의 공장 점거 운동도 막을 내려야 했다.

공산당 창당

공장 점거 운동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사회당과 별개로 공산당을 창당하자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는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람시가 아니라 초좌파인 보르디가였다. 중간주의파의 세라티가 개혁주의파의 필리포 투라티와 타협하고 절충하느라 기회를 놓치고 방향감각마저 잃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거창하고 과장스런 혁명적 언사로 자극하면 꽤 큰 반향을 얻을 분위기였다.

특히, 보르디가의 당 개념은 내가 앞서 언급했듯이 매우 엘리트주의적이어서, 공장 점거 운동 기간에도 그는 그저 당의 구실만 강조했었다.

게다가 보르디가는 공장평의회를 지지하지 않고 아예 비난했었다. 이유인즉슨, 공장평의회 때문에 당의 정권 장악 노력에 사회주의자들이 주의를 집중시키지는 않고, 오히려 경제주의라는 한계 때문에 주의가 분산된다는 것이었다.

그람시와 〈새 질서〉도 보르디가에게서 비난받았다. 이처럼 엘리트주의적인 보르디가의 당 개념은 그람시의 당 개념과 도무지 맞을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람시는 침묵했다. 내 보기로 그는 보르디가에게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보르디가의 신당 창당 계획을 그냥 묵종하면서 공산당 창당 과정에서 주변적인 처지에 스스로 머물렀다.

이것은 나쁜 결과를 빚었다. 세라티의 중간주의파도 러시아 혁명과 이탈리아 혁명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보르디가는 그들과 함께할 수 있었고, 함께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소수파인 개혁주의파만 쫓아내야 했는데, 그만 보르디가는 자기가 분당해 버렸다.

그런데 그만 그람시는 이것을 묵종했다. 1921년 1월 리보르노에서 열린 사회당 대의원대회에서 보르디가는 탈당을 감행했고, 그람시도 보르디가와 행동을 같이했다. 보르디가와 그람시가 분당해 창당한 공산당은 예상보다도 훨씬 더 소규모였고, 사실상 고립된 당으로 출발했다. 게다가 창당 이후 과정에서 보듯이, 초좌파주의*로 말미암아 미숙하고 치기 어리다는 한계를 안고 태어났다.

무솔리니의 등장

이탈리아 노동운동은 공장 점거 운동이 제공한 기회들을 놓쳤다. 그럼으로써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공장 점거 운동이 패배한 다음 해인 1921년과 1922년 파시스트들이 날뛰며 농민 조합, 농업 노동자 조합, 좌파 계열 신문사, 사회당이 집행권을 행사하고 있는 지방자치단체의 건물 등을 불태우고 활동가들을 살해하는 따위의 테러와 린치를 가했다.

좌파 일반이 혼란에 빠졌고, 특히 사회당과 노조 관료들은 별 효력도 없이 법과 질서에 호소하기만 했다.

세라티는 그저 공허하게 사회주의를 주장할 뿐, 알맹이 있는 전술들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공산당 지도자 보르디가는 파시즘이 의회 제도를 제거한다면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노동자들의 환상도 제거해 주는 셈이니 나쁠 게 없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반파시즘 공동 행동을 위해 공산당이 비혁명적인 세력과 동맹을 맺어 봤자 자신의 혁명적 순수성만 희석시킬 뿐이라며 공동전선을 거부했다.

이 순간 그람시는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위축돼 있고 의기소침해 있어서, 명료한 생각을 발전시킬 수 없었다. 이 위험한 순간에 말이다.

다행히 로마, 파르마, 리보르노, 라스페지야 등지에서 아르디티 델 포폴로, 즉 ‘인민의 분대들’이라는 반파시즘 행동단체가 결성돼 파시스트들과 ‘맞장뜨고’ 있었다.

불행히도 사회당과 노동조합 관료들은 이들을 비난했다. 이들이 파시스트에 맞서 비합법적인 수단을 사용하기를 불사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사회당과 노조 관료들은 심지어 무솔리니와 평화협정을 맺기까지 했다.

물론 무솔리니는 곧 간단히 무시해 버렸다. 덕분에 좌파 측만 무장 해제됐고 그 틈에 더 큰 타격을 입었다.

파시스트들이 승리할 듯하자 비로소 노동계의 비혁명적 지도자들은 총파업을 호소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준비시키지 않고 그저 졸속으로 지시한 총파업은 공허한 호소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람시는 처음에는 아르디티 델 포폴로를 반겼다. 하지만 당의 보르디가 지도부가 그와 다른 결정을 내리고, 무솔리니 집권으로 달라지는 게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자 이내 침묵해 버리다가 심지어 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일부 대변하기까지 했다.

보르디가가 이끄는 공산당의 초좌파주의는 1922년 2월 노동조합총연맹, 아나키즘적 신디컬리스트 노조연맹체, 선원노조 등이 공동으로 구축한 반파시즘 노동운동연합을 종파적으로 불신하고 의심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났다.

결국 무솔리니는 큰 저항에 직면하지 않고 마침내 1922년 10월 집권하게 된다. 그리고 파시즘의 탄압은 토리노에도 미치고, 1926년쯤엔 모든 진보 단체와 개인, 심지어 모든 자유주의 단체와 개인에게도 미치게 된다.

다행히 그람시는 1922년 코민테른* 제4차 대회에 이탈리아 측 대표로 참석해 모스크바에서 1년반 가량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체류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정치적 삶의 결정적 전환점이 된다.

공산당의 방향 전환을 위한 그람시의 노력

그람시는 1924년 초부터 당의 지도권을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었다. 보르디가가 지도부에서 밀려난 지 반년 남짓이 지난 뒤였다.

그는 파시즘이 여느 자본주의 정권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파시즘은 자본가 계급도 노동계급도 사회 위기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을 때 등장하는 중간계급 대중 운동으로, 매우 모순됐으면서도, 좌파 단체와 노동단체는 물론 의회제 민주주의의 계급 타협 기구들, 심지어 국가와 교회에서 독립적인 단체들도 금지시키는 걸 표방하는 매우 극우적인 정치 운동이자 그에 기반한 정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파시즘에 맞서 모든 반파시즘 단체들이 단결된 행동을 할 수 있다. 공산당은 종파적 회피 노선을 그만두고 파시즘에 맞서 코민테른 제3차 대회와 4차 대회가 역설한 공동전선 정책을 채택해야 한다. 물론 그람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아무런 착각도 하지 않았고, 또한 그런 착각을 해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공동전선) 정책은 파시스트에 맞서 단결을 염원하는 노동 대중의 정서에 아주 잘 부합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덕분에 그람시가 새 리더인 공산당은 1924년 4월 사회당 소속 국회의원 마테오티가 파시스트들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이 불거지면서, 무솔리니에 반대하는 대중 정서가 폭발적으로 분출하고 확산되던 3~4개월 사이에 몇 배로 급성장했다.

그리고 그람시는 1926년까지 당에 대한 리더십을 계속 키우면서 당을 보르디가의 종파적 유산에서 벗어나도록 재무장시켰다. 이를 잘 반영하는 문서가 바로 1926년 1월의 〈리용 테제〉다. 이 문서는 당 노선 재정립의 길라잡이이자 그람시 저작의 백미다.

불행히도 야권은 무솔리니에 대한 분노를 기반으로 대중 운동을 구축하지 못했다. 그래서 무솔리니는 반격할 수 있었고, 심지어 더 단단하게 독재 체제를 꽉 조일 수 있었다. 그래서 국회의원 면책특권 박탈권을 법제화해 마침내 1926년 말 가장 큰 눈엣가시인 그람시를 체포해 수감시킬 수 있었다. 1928년 6월 파시스트 정권의 검찰은 그람시 공판에서 구형을 하면서 재판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20년간 저 두뇌가 활동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옥중수고

그람시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초인적인 의지력을 발휘해 죽음의 병마와, 또한 파시스트 정권의 전향 유혹과 싸웠다. 1929년부터 1935년까지 그는 무려 33권의 공책에 글을 쓸 수 있었고, 그 공책은 어찌어찌 해서 운좋게 밖으로 유출돼 나중에 출판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고전을 읽는 것이 허용되지 않은 상황에서 순전히 기억에 의존해 그 저작들을 인용했다. 1935년에는 병세가 너무 악화돼 집필을 더 할 수 없었다. 국제적인 석방 운동 덕분에 로마의 병원 시설로 이감되기는 했지만 너무 늦어, 그는 마침내 1937년 4월 46살의 나이로 운명한다.

《옥중수고》는 파시스트 감옥의 검열을 의식해 씌어졌으므로 일종의 암호와 같은 말들로 그득하다. 예컨대 마르크스주의는 ‘실천철학’이라는 말로, 혁명적 당은 ‘근대 군주’라는 말로 대체돼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스탈린주의적 이탈리아 공산당은 《옥중수고》를 일부 발췌해 출판할 수 있었고, 나중에 《옥중수고》가 훨씬 더 많이 출판된 뒤에도 유러코뮤니즘*적 개혁주의자들과 포스트모더니스트 교수들은 자기들 입맛에 맞게 아전인수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헤게모니’ 개념은 혁명적 변혁의 불가능성을 설파하고 선거 중심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고, 또 학술 연구, 문화 연구, 미디어 연구 등의 의의를 특별히 강조하는 데 이용됐다. 그람시 연구는 신그람시주의라는 이름의 매우 보수적인 학풍이 여전히 득세하고 있다.

다행히 최근 그의 혁명적 진수를 재발견하고 있는 매우 급진적인 경향이 새로 등장하고 있는 형국이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람시를 재발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