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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영화 〈코스모폴리스〉:
유령 같은 자본주의에 대한 기괴한 이야기

6월 27일 한국에서 개봉한 〈코스모폴리스〉〈네이키드 런치〉, 〈폭력의 역사〉 등 뛰어난 영화들을 연출한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최신작이다. 그는 기괴하고 강렬한 폭력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현대 사회의 모순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 왔다.

〈코스모폴리스〉는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잃은 월스트리트의 젊은 투자가 에릭 파커(로버트 패틴슨)가 단골 이발소에 가서 이발하려는 다소 소박한 목적으로 리무진을 타고 하루 종일 뉴욕을 누비며 겪는 이야기를 다룬다. 허름한 이발소까지 리무진을 타고 행차한다는 황당한 설정의 억만장자 도련님과 함께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뉴욕을 가득 메운 반자본주의 시위대다. 이 시위는 다들 예상하듯 2010년 시작된 월가 점거하라 운동으로, 세계경제 위기와 자본가들의 고통 전가라는 횡포로 삶을 파괴당한 사람들이 주축이었다.

몰락한 자본가와 병상에 누운 자본주의

에릭 파커는 하루 종일 뉴욕을 배회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돈을 굴리는 데 타고난 재능이 있는 동업자와 자기 사업을 도와주는 경제 전문가를 만나는 과정에서는 파커가 왜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됐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파커는 위안화 환거래를 하다가 위안화 가치가 급등하는 바람에 알거지가 됐다.

파커는 일반적인 상식(환율이 다시 안정화될 것이라는 주장. 마침 이 주장을 하던 IMF 총재가 테러리스트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한다)을 들면서 다시 재기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하지만, 그의 동료들은 더 돈을 잃기 전에 서둘러 펀드 일을 접으려 한다.

크로넨버그는 자본 간의 경쟁에서 패배한 자본가와 99퍼센트 민중의 거대한 집단 행동을 대비시키며, 영화에 계속 등장하는 “결국 쥐를 화폐로 썼다”는 한 폴란드 시인의 시구를 통해 월스트리트 자본주의의 몰락을 그려낸다.

이런 극단적 상황 속에서 주인공 파커는 각종 기행을 일삼는다. 몰락하는 와중에도 어떤 그림을 감상려고 그 그림이 걸린 교회를 통째로 구매하려 하고, 심지어는 폭격기(!)를 감상용으로 구매한 적이 있다고도 말한다.

파커는 자기 자본을 이용해 개인용 엘리베이터, 관상용 교회, 관상용 폭격기 등을 구매하고, 거금을 들여서 매일 건강검진을 받는 인물이다. 동시에 파커는 비싼 작품을 보여주는 큐레이터, 얼마 전에 결혼한 자신의 아내를 포함해 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여성과 성행위를 하려 한다.

파커가 주변 인물과 관계 맺는 방법은 오직 성행위뿐으로, 인간적 관계를 맺고 대화하고자 하는 아내에게 성관계를 갖자고 애원할 뿐이다. 결국 아내와 이혼하게 됐고, 그가 주변 사람들과 관계 맺는 유일한 방법이던 성행위마저 할 수 없게 됐다. 그는 극단적 물신 숭배와 인간 소외에 빠진 인물이다.

이런 그의 구체적인 행동들뿐 아니라 기행에서 이어지는 인물들 간의 의미 없고 추상적인, 들쭉날쭉한 대화가 영화 내내 이어진다. 인물들 간에 의사소통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는 아무런 알맹이도 내놓지 않는다.

이들의 추상적인 대화는 단순히 의미 없는 읊조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인물들과 파커 간의 관계를 단절시켜 그를 독립된 객체로 만들어 버린다. 이는 단순히 경쟁에서 패배한 자본가 개인이 아니라, 자본주의적인 인간 군상 전체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또 하나의 상징을 갖도록 만든다.

에릭 파커는 월스트리트 중심가에서 결국 어린 시절 추억이 있는 가난한 동네 이발소까지 강박적으로 달려왔지만, 그는 여기서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소박하게 살아가는 이발소 아저씨는 경쟁에서 패배한 이 거대 자본가와 대화하지 않으면서, 파커를 태운 리무진 기사(택시 운전을 겸업하는)와는 추억을 나눈다.

기대하던 이발소에서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 파커는 이발을 하다 말고 이발소를 나가 버린다. 이발소는 몰락한 파커의 심신을 달래 주는 곳이 아니라, 그의 남은 여력까지 완전히 잘라내 버리고 그를 소외시키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자신을 태운 리무진 기사를 보내고 혼자 남은 에릭 파커. 그에게 총알과 함께 분노에 찬 고함 소리가 날아온다. 그에게 총알과 비난을 퍼붓는 사람은 베노 레빈. 파커의 회사에서 일하다 실직당한 노동자다. 영화는 이렇게 돌고 돌아 한 자본가와, 그에게 착취당하는 노동자 단 둘을 대면시킨다.

이 강렬한 만남은 단순한 두 개인의 대립이 아니라,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두 계급의 대립, 나아가 뼈만 남은 자본주의와 그것을 눈앞에 둔 평범한 민중을 대립시킨다. 베노 레빈이 거주하는 무너질 듯한 아파트에서 두 계급은 극적으로 대립하고, 둘 사이의 설전 끝에 베노 레빈이 에릭 파커에게 총을 겨누는 것으로 영화는 갑작스럽게 끝난다.

노쇠한 자본주의, 미숙한 99퍼센트

영화는 노쇠해 가는 자본주의를 경쟁에서 패배한 자본가 에릭 파커를 통해 상징적으로 바라본다. 이런 소재가 채택됐다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감독이 이제까지 영화에서 보여 줬던 반자본주의적, 무정부주의적, 사회 비판적 시각이 이 영화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가 당장 패배할 것처럼 섣불리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크로넨버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아무런 답을 내놓지 않는다.

이는 그가 어떤 이유로 답을 회피한 것이 아니라, 영화 속에서, 그리고 영화의 시작점이 되는 세계적 현실에서 그 답, 즉 자본주의을 파괴하고 새로운 대안을 내놓을 조건이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탈린주의적이고 단계론적인 물질적, 경제적 조건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가 우리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노쇠해 가고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는 자본주의를 대체할 대안이 있는가?’다.

영화가 후반으로 갈수록 파커가 탄 리무진은 분노한 대중에 의해 상처투성이가 된다. 리무진에는 세계경제를 뒤흔들며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다 결국엔 몰락한 에릭 파커를 조롱하는 낙서가 가득해진다. 영화 중간중간 ‘점거하라’ 운동 활동가들은 “쥐를 화폐로 썼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파커를 조롱하고 쥐를 집어던지며 야유한다. 리무진 밖에서 대중은 야유를 퍼붓는다.

하지만 그와 세상을 단절시키는 리무진 내부는 멀쩡하다. ‘점거하라’ 운동은 리무진 안에 있는 파커 본인에게는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못했고, 파커도 그들의 이야기에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다.

파커가 잠시 리무진에서 내렸을 때, 그는 반체제 활동가에게 팬케이크 세례를 받는다. 파커의 얼굴에 팬케이크를 던지려고 대통령 암살도 포기했다고(!) 말하는 이 활동가는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퇴장한다. ‘점거하라’ 운동의 관점에서 이 행동은 통쾌하긴 하지만, 뭔가 부족하게만 느껴지고, 상징과 추상의 덩어리인 이 영화 속에서는 무력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 영화의 핵심인 마지막 장면에서 자본주의적 관점의 “패배자”, 즉 이 체제의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던 노동자 베노 레빈은 무엇을 하는가? 자본가였던 에릭 파커가 리무진에서 내렸기 때문에, 혼자 남은 에릭 파커는 이제 벌거벗은 자본주의 자체를 상징하게 된다. 지배자이자 자본주의 자체인 파커에게 총을 겨누고, 그를 죽인다면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자본주의의 패배를 상징하는 영화였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섣부르게 나아가지 않는다. 레빈은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자이면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망쳐 왔던 파커에게 극도의 증오감을 분출한다. 레빈이 파커에게 퍼붓는 증오 섞인 비난은 모두 자본주의의 본질을 꿰뚫고, 자본주의를 탁월하게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작 레빈 자신이 바라는 사회의 상은 추상적이고 모호한 단계에 머물러 있다.

결국 이렇게 반쪽뿐인, 탁월한 비판과 거기서 이어지는 대안이 부재하는 모순된 상황은 그가 자본주의 자체인 파커에게 총구를 겨누었지만 자본주의에 총알을 박고 체제를 끝장내지는 못하게 만든다. 이런 모습에 〈씨네21〉의 허문영 기자는 율리시스 영웅담처럼 끝난 에릭 파커의 모습은 오히려 자본주의의 승리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고까지 이야기한다.

대안은 어떻게 공론화될 수 있는가

월스트리트 ‘점거하라’ 운동은 성공적으로 시작했지만, 그 운동은 다른 세계를 위한 대안이 부재했기 때문에 더 나아가지 못하고 약화됐다.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경쟁에서 패배하면서도 끝까지 살아남는 자본가의 모습과, 결정적으로 그를 물리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대비시키면서 월스트리트 ‘점거하라’ 운동을 포함한, 어쩌면 모든 종류의 사회 운동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를 한다.

자본주의는 노쇠하고, 영화에 나오는 말처럼 “하나의 유령이 되어서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에릭 파커는 숨통이 끊어진 자본가이지만, 그의 리무진은 여전히 뉴욕을 유령처럼 누빌 것이다.

여기까지 이야기 했을 때, 이 영화는 한쪽으로 보면 자본주의를 바꾸는 운동에 대한, 더 나아가 사회의 진보에 대한 체념으로 비쳐질 수 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영화를 전체적으로 돌아봤을 때, 감독이 계속해서 지적하는 부분은 크게 두 가지다. 스스로 가진 모순에 의해 무너져 가는 자본주의와, 자본주의가 주입하는 물신 숭배와 인간 소외를 보여 주면서, 감독은 이전 영화들처럼 자본주의에 비판을 가한다. 그러나 그 자본주의에 직접적 행동도 가하지 못하는 99퍼센트의 민중과 자본주의를 뛰어넘을 대안의 부재 역시 동시에 이야기한다.

대안이 부족한 현재 상황에서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그 모순에서 대안을 추출해내고 그것을 직접 실행에 옮긴, 계급투쟁으로서의 역사를 인식하고 그 역사를 바꿔 왔던 혁명가들과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 대안을 대중과 공유할 수 있는, 조직된 혁명 정당이 필요한 것 아닐까. 이 영화는 직접 결론을 내지 않지만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