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혁명보다 파국을 제시한 〈설국열차〉의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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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의 주요 내용과 스포일러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요즘
하지만 “혁명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이 영화의 결말은 “혁명”보다는 “파국”에 어울립니다.
영화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남궁민수는 열차 외부의 기온이 상승하고 있다는 정보를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영화 말미에 커티스에게 불충분하게 전달할 뿐이죠.
열차로부터의 이탈은 “뒤 칸 사람들”
그리고 살아남은 두 명의 아이만이 눈 위로 나가서, 북극곰과
세상에는 다양한 혁명관이 존재하지만, 적어도 “혁명적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혁명”과 영화의 결말은 통 이어질 수가 없습니다. 혁명적 사회주의가 제시하는 혁명이 여타의 관념들에서 비롯한 혁명과 구별되는 이유는, 인류가 이룩한 막대한 부의 창출과 자연적 제약으로부터의 해방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기존 사회의 폐지와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 막연한 도덕률에 기초한 구걸과 자비, 혹은 모종의 사회적 합의가 아니라 노동계급의 단결된 힘에 의해서 쟁취되는 것이라는 점. 다른 하나는 새로운 사회의 생산력이 기존 자본주의보다 못하기는커녕 더욱 발전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소수 자본가의 욕심에 의해서 무계획적으로 이뤄지던 생산. 그러나 바로 그 생산을 실제로 담당하던 사람들이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서 계획된 생산을 한다면 자본주의의 불확실성과 낭비는 사라지고, 평범한 사람들 모두의 필요가 충족되는 생산이 이뤄질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생산력은 사회주의에 이르러 더욱 더 발전된 형태로 인간과 자연 모두에 이롭게 쓰이게 될 것입니다.
단결된 힘
사실 지배자들의 부당한 권력과 재부, 온갖 부패와 추문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혐오감을 갖지 않는 사람도 드뭅니다. 그럼에도 평범한 사람들이 선뜻 “자본주의 체제의 타도”를 도모하지 않고 체제 내부에서의 개혁을 지지하는 데 머물거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하는 것은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현실이 문제라고? 그래 문제지, 하지만 이 현실이 뒤집혔을 때 우리 삶이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잖아?”
지배자들은 이런 심리를 이용하고, 조장합니다. 지배자들이 사람들에게 혁명 이후의 세상으로 제시하는 사회란,
평범한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이 세계의 생산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새로운 사회를 자신들의 힘으로 보다 풍요롭게 가꿔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것. 지배자들은 이런 상황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봉준호가 보여 주는 영화의 결말은 정확히 지배자들이 원하는 혁명적 상황에 부합합니다. 눈만 가득한 벌판에 털옷과 함께 남겨진 아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퀴벌레로 만든 젤리조차도요. 그 아이들이 마주친 북극곰을 사냥할 수 있을까요. 눈을 치우고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요. 영화의 결말은 단지 악당만 사라진, 열차 안에서의 삶보다 못한 상황을 제시합니다. 심지어 아이들은 열차 안에서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까지 인류가 거둔 모든 성취와 아이들은 완벽히 분리된 상태입니다. 그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합니다.
만약 오늘 날 인류의 대다수가 정말 바퀴벌레로 만든 젤리를 먹는 상황이라면, “그래, 바퀴 찌꺼기를 먹느니 차라리 눈을 퍼먹는 게 낫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대다수 국가의 노동계급은 아무리 살기 어려워도 바퀴를 먹지는 않습니다. 설령 보잘것 없게 보일지라도 생활 속에서 느끼는 소소한 즐거움과 추억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저마다 현실에 대한 크고 작은 애착이 있습니다.
혁명의 결말이 위와 같은 막막한 상황을 낳는다면, 그들은 영화를 보면서는 일순간 통쾌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현실에서 혁명을 위한 운동에 함께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 영화가 진정으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결말에 이르려면, 열차가 뒤집어져서는 안 됩니다. 열차의 지배자들을 뒤 칸 사람들 모두의 힘으로 제압한 뒤, 사람들 스스로 열차의 자원을 이용해 생산하고 분배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 그래서 열차 밖의 상황을 주의 깊게 살피며 열차의 외부로 나갔을 때도 충분히 생존과 번영이 가능한 조건을 형성해 나가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기존 열차의 “시스템”을 바꾸는 가장 바람직한 결말이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이런 결말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바로 여기에 이 영화가 지닌 본질적 약점이 있습니다.
“조화”
우선 뒤 칸 사람들이 집단적 저항을 통해 지배자들을 압도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사회적 힘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영화상으로 그들은 머릿수만 많을 뿐, 현실에서의 노동계급처럼 열차의 생산을 담당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때때로 악당의 필요에 의해서 호출되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리고 설령 뒤 칸 사람들이 생산을 담당한다고 해도, 열차 안에 존재하는 자원은 대단히 제한적입니다. 영화에서는 그에 따른 적정 인구 수와 열차 내부의 각종 “조화”
제한된 자원과 그에 따른 제한된 생산물. 이렇게 물질적 한계가 분명한 상황에서 모두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생산력 확보는 가능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점이 영화 속의 열차가 현실 세계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현실 자본주의가 생산하는 유무형의 재화는 이미 전 세계 인구의 필요를 충족시키고도 남을만한 수준에 다다른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도 현실의 지배자들은 모든 것은 제한돼 있고, 그럼에도
“한정된 재화를 모두가 나눠 갖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경쟁하라!”
“모두가 각자의 필요에 의해 분배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네가 더 가지려면 남의 것을 뺏어야 한다, 그러므로 뺏어라! … 그리고, 그러므로 지배자인 내가 남보다 많이, 훨씬 많이 갖고 있는 것은 매우 정당하다.”
이것이 지배자들이 선전하는 내용입니다. 학교에서, 방송에서, 도처에서 이런 선전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아이들이 교육받는 장면처럼요.
감독의 의도와는
만약 이 영화를 본 사람들과 대화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요. 고아성이 연기를 잘하더라는 말과 함께, 현실 세계는 열차와는 다르다는 것. 인류는 이미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소수의 지배자들이 생산수단과 국가를 점령한 상황이기에 모두의 필요가 충족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혁명은 자본주의의 생산력마저 파괴하고 인류를 자본주의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지닌 생산력을 평범한 모든 인류를 위해 사용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 그러므로 자본주의 체제의 타도는 정의를 위해 결핍과 가난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기는커녕 오늘날 만연한 결핍과 가난, 소외를 진정으로 끝내는 일이며, 그러므로 정의 또한 바로 세우는 것이라는 점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 영화의 출발점인 기후 변화의 주범이 자본주의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