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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1994년 공안정국을 돌아보며:
공안탄압의 칼날은 ‘주사파’에 그치지 않았다

이석기 의원과 통합진보당에 대한 마녀사냥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유신으로의 회귀’를 말한다.

나는 유신 때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기억에 없지만, 대학생 때였던 1994년 공안정국은 똑똑히 기억한다.

김일성 사망 직전인 1994년 6월은 지하철과 철도 기관사 노동자들의 반격으로 노동운동이 꿈틀대기 시작하던 때였다. 김영삼 정부는 반격에 나서면서 파업 현장과 각 대학에 경찰 병력을 대규모로 투입해 6월 한 달에만 무려 2백 명이 넘는 사람을 구속했다.

모든 정치적 반대자들을 노리는 마녀사냥 1994년 7월 21자 <한겨레> 1면. ⓒ사진 출처 〈한겨레〉

7월에 김일성이 사망하고 조문 파동(국회 외무통일위에서 이부영 민주당 의원이 조문단 파견 용의를 물었던 것을 문제 삼으며 시작된 공안정국)이 터졌다. 김영삼 정부는 진보진영 일부 등의 애도 표명을 극렬 탄압하며 대북관계를 경색시키고 ‘주사파’를 핑계로 대대적인 내부 반대자 단속에 나섰다.

서강대 총장 박홍의 ‘주사파’ 발언으로 시작된 공안정국은 단지 주사파만 공격하지는 않았다. 무릇 모든 공안탄압은 체제의 반대자들을 노린다. ‘주사파’냐 아니냐는 핵심이 아니었다.

경찰은 한총련 학생 1백40명에 대한 검거령을 내렸고, 전국 대학 주변에 경찰 2만 7천 명을 배치했다. 1994년 7~8월에만 1백20명 넘게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됐다. 이들 대다수는 ‘주사파’와 거리가 멀었다.

경상대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던 ‘한국사회의 이해’를 강의한 교수들은 ‘붉은 교수’로 내몰렸다. 이창호, 장상환, 정진상 같은 분들이 국가보안법의 희생자가 됐다.

사회 분위기를 냉각시키려고 공안당국은 자신들의 전매특허인 ‘조작 사건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안기부 공작원 출신인 한병훈·박소형 부부가 자신들이 북한 간첩이라며 의심스런 자수를 했고, 그들의 진술만을 근거로 애먼 독일 유학생이 졸지에 간첩으로 둔갑해 3년 6개월의 실형을 살아야 했다.

풍물반이나 전통무예반 등의 활동을 하던 청소년 문화활동 동아리 ‘샘’에 “주사파가 침투했다”며 회원 9명을 대공분실에 구금했고, 1백 명이 넘는 청소년들이 조사를 받아야 했다.

수업 중인 17살 고등학생들까지 마구 연행하고 거짓 진술을 강요해 청소년 문화동아리를 체제전복세력으로 만들었다. ‘샘’ 조작 사건 이후 학교 동아리 학생들에 대한 감시가 심해졌고, 유인물 살포를 강력하게 단속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공안탄압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국정원과 검찰이 통합진보당과 이석기 의원에 내란죄를 들씌우는 것에 성공한다면, 친북 좌파뿐 아니라 혁명적 좌파와 다른 운동 단체에까지 마수를 뻗으며 사회 분위기를 냉각시키려 할 것이다.

공안탄압의 역사는 우리가 탄압에 맞서 단결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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