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칠레에서 장군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벌인 지 40년이 되는 해다.

1970~73년 칠레는 혁명적 시기였다. 1973년 9월 11일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혁명을 분쇄하기 전 칠레에서는 자본주의와는 달리 대중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 형태가 잠시나마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젊은 활동가로서 민중 권력을 몸소 경험한 마리오 나인이 그 찬란했던 시기를 되돌아 본다.


“우리는 더는 단지 임금 문제만 가지고 부자들과 싸우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부자들의 공장을 점거하는 것은 물론 그것을 넘겨 받아 노동자 스스로 통제해 생산 활동을 할 권리가 있다.”

1973년 1월 〈칠레 호이〉라는 신문에 실린 이 혁명적 발언의 주인공은 마리아 파리아스 고도이다. 고도이는 1970~73년 칠레를 휩쓴 계급투쟁의 놀라운 발전 과정에 참가한 저명한 활동가였다.

노동자, 학생, 농민, 빈민촌 주민들의 급진화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그들은 격렬한 투쟁을 거치면서 칠레의 부유층과 권력자들에 맞서는 거대한 전투 조직을 만드는 데까지 나아갔다.

“민중 권력을 만들자” 칠레 혁명 당시 노동자들이 수도 산티아고에서 행진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성장해 온 이 운동은 칠레 노동계급 중 정치적으로 가장 각성한 일부가 “코르돈 인더스트리알”, 즉 각기 다른 공장과 작업장에 속한 노동자들을 서로 연결해 주는 조정 위원회를 수립했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

노동자 민주주의의 토대를 놓은 코르돈은 모든 피억압자들의 운동으로 번져 나갔다. 농촌에서는 농민 위원회들이 토지를 점거했다. 도시에서는 반란을 일으킨 청년들이 새 세상의 도래나 다가올 반동을 알리는 벽화를 그렸다.

1970년에 살바도르 아옌데의 국민연합 정부가 선출됐다.

아옌데 정부(사회당과 공산당을 포함하는 연립정부였다)는 국유화 정책을 실시했고, 이것은 사장들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미국 제국주의의 지원을 받던 칠레 지배계급은 아옌데의 개혁을 막으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테러를 저지르는 것은 물론이고 아옌데 정부에 충성하는 고위 장교들을 암살하기도 했다.

아옌데는 이런 반동 세력과 타협하려 애쓰는 한편, 동시에 성장하고 있던 운동의 기세를 꺾으려 했다. 바로 그 운동 덕분에 집권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이런 타협은 결국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일으킨 쿠데타로 아옌데 자신이 타도되고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칠레에서는 새로운 사회가 출현하던 시기가 있었다. 아래로부터 운동은 정부를 방어하고자 결집하면서 새로운 차원에 도달했고, 그 뒤에는 사회를 운영하기 시작한 새로운 조직들로 발전했다.

이러한 전환은 화물차주들을 포함한 사장들이 경제의 숨통을 조여서 정부를 무너뜨리고자 “파업”을 조직한 1972년 10월에 시작됐다.

사장들은 엄청난 수의 화물차를 나라 곳곳의 핵심 교통 요충지에 집결시켜서 최악의 혼란과 운송 중단 사태를 유발하려 했다.

사장들의 움직임이 알려졌을 때, 나는 내가 자란 빈민촌에서 열린 중요한 모임에 참가하고 있었다. 이 모임에서 우리는 마을 총회를 조직했고, 슈퍼마켓에서 식료품을 징발하는 위원회를 결성했다.

또, 우리는 방어 위원회와 교육·보건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런 조직들은 “공동조직위원회”라고 불렸다.

노동자들은 화물차를 압류했고, 사장들이 닫아 놓은 슈퍼마켓 문을 다시 열었다. 생산을 중단시키려 한 공장주들은 쫓겨났다.

노동자들은 공장과 기업 들을 점거했고, 그 자산을 압류해 집단적 노동자 민주주의라는 원칙 아래 운영했다.

노동자, 학생, 빈민촌 주민 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고 병원과 학교 등 필수 서비스들을 계속 운영했다.

코르돈들은 물자의 생산과 유통을 집단적으로 토론해 결정하고, 원자재 조달과 공장 운영을 조직했다.

코르돈은 특정한 정치적 소속을 뛰어넘어 노동계급을 규합하고 조직했다.

부르주아지는 공세를 펼치는데 아옌데는 고조되는 반동에 대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 혁명적 조직은 더 효과적이면서 전투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절박한 요구에 화답하며 솟구쳐 올랐다.

집단성

이 혁명적 나날들은 우리 계급의 가장 찬란했던 순간으로 남아 있다. 노동계급은 경제를 계속 돌려서 사장들의 파업을 물리쳤고, 그 과정에서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암울하고 소외된 삶에 도전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통제하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는 지역에서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모든 일을 민주적으로 토론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자유에 대한 자각이 우리의 영혼을 휘감았고, 우리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인간임을 보여 주는 확고한 증거라고 느꼈다. 우리 노동의 과실은 이제 우리 것이었다. 우리를 수탈하는 사장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서로 분리되고 고립된 개인들이 아니라 형제·자매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 짧은 반란의 나날 동안 우리는 해방으로 나아가는 길을 집단적으로 개척하며, 계급적 각성을 향한 복잡다단한 여행을 시작한 것이었다.

1973년 9월 11일, 어둠을 틈타 마침내 테러가 자행됐다. 아옌데는 라디오 방송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음을 발표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전언이었다.

곧 탱크가 진주해 자유의 불길을 짓밟았다.

칠레는 이후 17년 동안 계엄령 상태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국 곳곳의 강제수용소에서 가장 야만적인 신체적·정신적 고문을 당했다. 나도 강제수용소에서 2년 6개월을 보냈다.

3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실종”됐다.

쿠데타는 변혁 운동을 분쇄했다. 그러나 우리가 노동자 권력의 씨앗을 심었던 시절에 대한 기억마저 지워버리지는 못했다.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는 1930년대 이래 손꼽힐 만큼 심각한 구조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이 위기 속에서 낡은 질서와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칠레의 교훈이다.

그 혁명적 나날에 우리는 공장과 마을과 농촌을 통제했다.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투쟁하면서 스스로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출처: 영국의 혁명적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 215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