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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지배자들의 딜레마:
말은 동북아 평화협력, 몸은 한미일 동맹

최근 한 국책연구기관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한 발표자는 박근혜가 “냉전 종식 이후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시점에 집권했다”며, 한반도 주변 정세가 “그 어느 때보다 유동적”이라고 우려했다.(국가안보전략연구소, “북핵문제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경제 위기의 심화 속에서 미국‍·‍일본‍·‍중국 등 주변 열강의 경쟁과 갈등이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현재 동아시아의 상황을 두고 “아시아 패러독스”라고 말하곤 한다. 즉, “[동]아시아”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는데 반해, 지정학적으로는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경쟁과 갈등이 심하다는 것이다.

중국과 미국‍·‍일본의 갈등이 심해질수록, 그 사이에 끼어 있는 남한 지배자들의 고민은 커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남한 지배자들한테 중국은 매우 중요한 시장이다. 남한의 전체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미국과 EU(유럽연합)를 합친 것보다 더 많다.

이 때문에 전통적으로 한미동맹을 중시해 온 박근혜와 남한 강경 우익조차 중국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다.

최근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 하영선은 남한 지배자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밝혔다. “[동아시아를 바둑판에 비유하며] 오랫동안 집을 키워 온 한미일 동맹 네트워크에 발을 디디고 있되, 새집을 중국과 짓는 노력을 좀더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박근혜 정부는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서울 프로세스)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의 거센 압력에도 미사일방어체제(MD)의 공식 참가 선언을 피해 왔다. MD가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는 중국의 반발을 의식한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와 남한 지배자들의 ‘두 길 보기’는 한계가 클 수밖에 없다. 남한은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미국‍·‍일본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중재할 힘이 없다.

중국이 아무리 급속히 부상했어도, 여전히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이다. 세계 곳곳에서 남한 자본의 투자와 시장을 보호하고 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면, 남한 지배자들은 미국의 손을 절대 놓을 수 없다.

미국 지배자들은 ‘한미일 동맹 구축‍·‍강화가 남한의 안보 이익과 일치한다’고 강조해 왔다. 그리고 ‘북한 문제’는 이를 위한 핑계로 정말 안성맞춤이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에 대한 남한 지배자들의 우려를 한미일 동맹으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북한의 3차 핵실험 등으로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자, 박근혜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연기하자며 미국에 매달렸다. 그리고 KAMD(한국형 미사일 방어 체계)와 ‘맞춤형 억제전략’* 등을 준비하며 MD 체제에 발을 더 깊숙이 담그고 있다.

정부 안팎에서는 MD 체제에 참가하는 게 불가피하다는 얘기가 많아지고 있다. MD에 쓰일 만한 무기와 시설도 갖춰 나가고 있다.

그리고 조만간 남한이 미국이 추진해 온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참가를 결정할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TPP는 경제적 차원에서 미국의 ‘아시아 회귀’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물론 박근혜 정부는 과거사 문제 등 때문에 일본과 외교적으로 껄끄러운 관계를 보여 왔다. 그러나 행동에서는 한미일 연합 해상 훈련에 연달아 적극 참가하며 미국‍·‍일본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MD 구축에 필요한 한일 군사협정을 맺으라는 미국의 요구를 계속 외면하기 힘들 것이다.

즉, 점차 치열해지는 동아시아 각축전 속에, 박근혜 정부는 ‘동북아 평화협력’을 말하면서도 몸은 한미일 동맹으로 기울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박근혜 정부는 과도한 군비 증강으로 동아시아와 한반도 불안정을 키우는 데 일조하고 있다. 복지 먹튀를 하면서도 수십조 원을 미국 첨단무기 구입에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 전개는 남한 민중한테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다.

한미일 동맹의 구축‍·‍강화는 중국과 북한의 반발을 낳으며 새로운 긴장을 일으킬 수 있다. 이는 미국의 핵항공모함까지 동원한 한미일 연합 해상 훈련에 반발해, 북한이 전군 동원 태세를 발표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제 한반도는 중국과 미국의 핵심 이익이 교차하며 힘겨루기를 하는 곳이 됐다. 이 때문에, 한반도의 긴장 고조는 동아시아 전체에 파장을 낳게 된다.

예컨대 2010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상호 포격 사태 때, 서해는 순식간에 “강대국 간의 군사적‍·‍외교적 각축장으로 변질돼 갔다.”(《서해전쟁》, 메디치)

앞으로도 미국은 남한에 MD 체제 참가, 한일 군사협정 체결, 방위비 분담금 증액, 첨단 무기 수입 등을 계속 촉구할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대체로 그 방향을 따라갈 것이다.

물론 대외 지정학적 여건이 낳은 딜레마 때문에, 남한 지배자들의 곤혹스러움과 중국 눈치 보기는 계속되겠지만 말이다.

지배계급 내 강경 우익이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더라도, 남한 자본주의 발전에 이해관계가 있는 이들은 이런 모순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동아시아 갈등과 불안정의 뿌리인 제국주의 질서 자체에 반대하는 관점과 운동 건설은 갈수록 중요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