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통합진보당에 대한 탄압과 해산 시도는 이승만 정권이 벌인 ‘진보당 마녀사냥’을 떠올리게 한다. 새누리당 김진태는 “조봉암의 사형은 정당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보당 사건’은 억압적 통치를 공고히 하려는 매카시즘적 ‘사법살인’이었다.

진보당 마녀사냥을 보면 지금의 통합진보당 마녀사냥이 떠오른다 이승만 독재에 위협적이던 조봉암과 진보당도 말도 안 되는 마녀사냥을 당했다. ⓒKBS 〈역사스페셜〉 화면캡처

조선인들이 해방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됐다. 미국은 이승만을 꼭두각시 정부의 수반으로 낙점했다. 이승만은 제주 4·3 항쟁과 여순항쟁을 잔악한 학살로 진압해 그 피의 강물 위에 분단 정부를 세우고, 국가보안법을 휘둘러 ‘불순분자’들을 솎아 내기 시작했다. 일제 시기에 남북을 합해서 감옥에 투옥된 수는 1만 2천 명이었는데, 이승만 집권기에 3만 6천 명으로 늘었다. 죄수들은 대부분 좌파들이었다.

이런 억압적인 상황에서 조봉암 등이 표방한 ‘혁신’은 민중의 변화 열망을 반영한 것이었다. 조봉암은 해방 이전 항일운동을 하던 공산주의자였는데, 해방 이후엔 사회민주주의를 대안으로 삼았다.

특히 조봉암의 ‘진보당추진위원회’가 강령으로 삼은 평화통일은 동족상잔을 경험한 민중에게 대단히 큰 호소력을 가졌다. 이는 북진통일과 매카시즘을 선동하던 이승만에게는 불길한 신호로 다가왔다.

그래서 이승만은 진보당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조봉암 등을 집요하게 탄압했다. 1951년 이승만은 ‘대남간첩단사건’을 조작해 신당 추진세력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1954년 조봉암이 5·20 총선에 출마하려 할 때, 선거사무차장 김성주는 밀실로 끌려가 고문 살해됐다.

진보당에 대한 이승만의 히스테리가 극에 달한 것은 1956년 대선 때였다. 높은 실업률과 억압적 통치로 인해 이승만에 대한 불만이 스멀스멀 커지고 있었다. 사사오입 개헌*으로 출마할 수 있게 된 이승만은 선거 내내 온갖 부정으로 ‘반칙왕’의 면모를 보여 줬다. 반면 조봉암의 진보당은 이승만의 자유당과 장면의 민주당이 내놓을 수 없는 공약들로 인기를 끌었다. 평화통일, 친일파 문제 해결 등을 내걸고 조봉암은 유권자의 23.8퍼센트, 2백15만 표를 획득하며 약진했다.

이후 1957년에는 한 달 걸러 한 번씩 간첩사건이 터졌는데, 그때마다 조봉암의 이름이 거론됐다. 조봉암이 다음 표적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1958년 1월 12일, 검찰은 진보당 간부들이 간첩단과 접선한 혐의가 있고 진보당의 평화통일 주장이 북한의 주장과 같다며 진보당 간부들을 검거·송치했다.

이후 신문들은 매일같이 ‘아님 말고’식 보도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조봉암 씨 김일성과 모종 내통?”, “거물 간첩 양명산과 접선” 등 조봉암 집에서 김일성에게 보내는 편지가 발견됐다느니, 권총이 발견됐다느니 하는 기사들이 대서특필됐다.

재판 중에 이승만 정부는 진보당 등록 취소를 발표했다. 유엔 결의에 위반되는 통일 방안을 주장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유엔 결의안은 평화통일이었는데도 말이다.

1심에서 조봉암이 징역 5년을 선고받자, ‘반공청년’이라는 깡패 3백 명이 법원에 난입해 “친공 판사를 타도하자”며 난동을 부렸다. 2심 때 조봉암은 간첩행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평화통일

민주당은 진보당 사건 때 자유당과 합세해 조봉암을 고립시켰다. 민주당 의원들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민주당 김준연은 “평화통일 발언이 대한민국 국시를 도끼로 찍는 것과 같다”며 마녀사냥을 편들었다.

그렇게 조봉암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은 “진보당을 재건하거나, 진보당과 유사한 단체를 만들어도 입건”하겠다며 진보 인사들에게 으름장을 놨다.

2011년이 돼서야, 대법원은 재심 공판에서 조봉암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조봉암의 진보당은 노동자 정당은 아니었고 그것을 지향하지도 않았다. 진보당은 지식인 중심으로 조직된 정당이었다. 그가 사형됐을 때도 조직적인 항의 행동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진보당과 달리 통합진보당은 노동자 조직들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의 마녀사냥과 통합진보당 해산 시도는 통합진보당뿐 아니라 그 뒤의 노동자들에게까지 칼을 겨누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진보당 사건’ 때와 달리 우리에게는 노동자 조직의 단결이라는 마녀사냥에 맞설 무기 또한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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