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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부문 민영화 촉진하는:
WTO 정부조달협정 폐기하라

“한국은 공공부문 시장을 외국 기업들에게 개방할 예정이다.”(〈르몽드〉)

박근혜가 프랑스 기업주들에게 ‘도시철도 시장 개방’을 약속하고 기립박수를 받았다. 공공부문을 시장에 내맡기겠다는 한국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대외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프랑스 기업주들에게 ‘개방’이라는 선물을 준 박근혜 11월 4일 프랑스 기업인연합회에서 열린 한-프 경제인 간담회. ⓒ사진 출처 청와대

정부는 뭐가 그리도 급했던지 박근혜가 입국도 하기 전에 곧바로 국무회의를 열어, 해당 내용을 담은 WTO 정부조달협정 개정 의결서까지 통과시켰다. 최소한의 국회 논의조차 거추장스럽다는 이 정부의 후안무치에 많은 이들이 치를 떠는 이유다.

정부의 이 같은 행보는 곧바로 ‘철도 등 민영화의 물꼬를 트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장 개방은 공공부문에 더 많은 민간자본을 끌어들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인데다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철도·가스 등 공공부문 민영화에도 탄력을 줄 것이다.

정부는 이번에 WTO 정부조달협정 개정으로 자본 시장 개방 폭을 대폭 확대했다. 이로써 국내 공공기관 조달 사업 대부분이 개방 대상에 포함됐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근본적 이유는 IMF·세계은행과 함께 신자유주의 추진의 삼두마차로 꼽히는 WTO가 전 세계에 미친 악영향 때문이다. WTO는 1995년 출범 이래 공공서비스·교육·보건의료·환경·농업·금융 등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필요한 거의 모든 영역을 투자 대상으로 만들고 자본의 이윤 창출 수단으로 바꿔놓았다.

예컨대, WTO 일반서비스협정은 자본의 새로운 돈벌이 활로를 열어 줬다. 이 협정은 공공서비스 분야를 투자 상품으로 만들어 시장 경쟁에 내맡기고 민영화하도록 촉진하는 구실을 해 왔다.

이번에 문제가 된 WTO 정부조달협정도 공공 조달 부문에 시장 경쟁을 도입·확대·강화할 목적으로 추진돼 왔다. WTO 출범과 함께 이 부문의 무역 장벽이 제거됐고, 점차 확대됐다.

정부조달 시장은 중앙정부 부처·지자체·공기업 등 공공기관 전역의 방대한 물품·서비스 조달 사업 부문을 포함한다. 그만큼 시장 규모는 상당한데, 주요 선진국의 경우 그 비중이 GDP(국내 총생산)의 10퍼센트 이상이 될 정도다. 한국도 GDP의 8퍼센트에 이르는 대규모 시장을 갖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 사업 분야에 대한 관심은 점차 높아져 왔고, 경쟁적으로 자국 기업의 해외 진출을 확대하려는 국가 간 각축전도 치열해졌다.

선도적

한국 정부도 이미 1994년에 24번째로 WTO 정부조달협정에 가입하고 최근 선도적으로 개정안을 의결하는 등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심지어 한국의 조달시장 개방·시장 침투율은 이미 미국과 유럽연합의 곱절이 넘을 만큼 높은 수준이다.

한국의 도시철도 부문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프랑스 기업주들에게 박근혜가 ‘개방’이라는 선물을 안겨 준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정부는 주도적으로 개방을 확대해 해외 시장 진출에서도 유리한 조건을 만들고, 국내적으로도 시장 개혁을 확대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이 같은 개방·개혁을 통해 국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노동계급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안 된다. 오히려 공공서비스 후퇴, 구조조정 확대 등 고통만 안겨 줄 것이다.

그 이유로 첫째, 정부조달 사업 분야의 시장 개방은 공공부문 민영화를 확대·촉진하는 구실을 할 것이다. 오랫동안 WTO와 민영화 등의 폐해를 분석·폭로해 온 보건의료단체연합 우석균 정책실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번 WTO 정부조달협정 개정이 그 자체로 해외 기업에 철도 등의 운영권을 직접 넘겨주는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민영화 방식과 연결될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민영화 방식은 민간 자본이 시설을 지은 후 20~30년간 운영권을 갖게 되는 BTO(수익형 민자사업) 방식, 혹은 시설 투자 이후 임대료를 받는 BTL(임대형 민자사업) 방식 등이다. 즉, 정부조달 부문에 해당하는 시설 투자와 운영권 확보는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WTO 정부조달협정 개정은 철도 등을 민영화하기 쉽게 만든다.”

실제로 한국 정부는 한미FTA 체결 과정에서 이미 WTO 정부조달협정의 개방 수준을 능가하는 시장 접근을 허용했는데, 기재부의 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그 내용 중 하나가 바로 사회기반시설에 관한 각종 민간투자제도 활용(민영화)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이었다.

시장 개방 확대는 민간위탁·외주화 등도 확대해 공공부문의 영역을 축소시킬 것이다.

둘째, 시장 개방은 공공부문에 적용되고 있는 각종 규제를 허무는 구실도 할 것이다.

몇 해 전 미국의 좌파 월간지 《먼슬리 리뷰》는 “WTO 정부조달협정이 각국 정부가 조달계약을 발주할 때 노동이나 환경과 관련된 관행과 같은 비경제적 기준을 적용할 권한을 부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이 협정은 각종 규제를 금지하고 순전히 경제적 기준에 준하는 계약 협정을 맺도록 강제하고 있다.

만약 정부가 안전보건 조치 강화 등 각종 노동·환경 규제를 하거나, 장애인 고용 등 사회적 약자 고용기업 우선 지원 등을 위해 특정 기업을 입찰에서 제외·선택하게 되면, 이는 WTO 분쟁조정절차에 따른 제재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 규정하고 있는 정부·지자체 등의 관련 법·제도·조례 등도 투자자-국가 간 분쟁해결절차(ISD)에 휘말릴 수 있다.

따라서 박근혜 정부가 이번 개정안 의결이 ‘민영화와 관련없다’거나 ‘국민의 이익’ 운운하는 것은 완전한 사기다. 공공부문을 자본의 노름판으로 만들려는 WTO 정부조달협정은 폐기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