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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에 나치는 어떻게 쉽사리 권력을 장악했는가?

히틀러는 1930년과 1933년 사이에 급속히 부상했다. 그 과정은 바이마르공화국을 줄곧 괴롭혀 온 경제·정치 위기가 최고조에 달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위기가 자동으로 나치를 권좌에 앉힌 것은 아니다. 독일 노동계급이 나치의 부상에 거의 저항을 안 했기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 독일 노동계급의 두 주요 정당인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은 나치의 부상을 저지하기 위한 공동 활동을 하지 않았다. 나치가 어부지리를 얻게 된 이 과정을 최일붕이 상술한다.

1918년 11월 혁명의 여파로 1919년 바이마르공화국이 탄생했다. 독일은 제1차세계대전 종전시 체결한 베르사유조약의 결과로 경제 회복에 어려움을 겪었다. 조약은 독일에 막대한 외채와 배상금 부담을 지웠던 것이다.

1923년 독일은 외채 상환 불능 사태에 봉착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프랑스가 라인 지방을 점령했다. 그러자 독일의 물가는 천정부지로 폭등했다. 이 초인플레로 중간계급은 저축을 날리게 됐다. 중간계급 대중은 분노하고 절망하고 자포자기했다. 이 살인적 인플레와 노사관계 불안의 결과로 10월에 공산당은 매우 유리한 상황에서 봉기의 기회를 맞았지만, 최후 순간에 거사를 일으키지 않고 그냥 주저앉았다.

1925년에서 1928년 사이에는 경제가 일시적으로 안정됐다. 미국의 원조 덕분이었다. 하지만 1929년 10월 미국 증시가 폭락했다. 그 즉시 독일도 심각한 경제 공황에 빠졌다. 6개월 안에 실업자 수가 6백만 명이 됐다. 1933년에는 실업자 수가 갑절이 됐다. 이들 실업자 대중은 좌절감과 궁핍을 해소시켜 줄 과감한 처방을 요구했다.

이러한 혁명·패전·경제난 등의 상황 전개가 미친 사회적 충격은 엄청났다. 설상가상으로, 바이마르공화국 민주주의의 구조는 기초가 튼튼하지 못했다.

바이마르공화국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사회적 기반은 사회민주당이었다. 하지만 빼앗긴 영토의 탈환을 주장하는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반대했다.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전쟁 패배와 베르사유조약의 가혹한 조건들에 감정이 몹시 상해 있었다. 그들은 또한 소비에트 공화국을 원하는 공산당을 증오했다.

한편, 공산당은 사회민주당이 주요 노동자 투쟁들을 파괴한 것에 큰 반감을 가졌다. 특히, 사회민주당은 바바리아 소비에트 공화국(1919~20년)을 분쇄했는데, 가증스럽게도 우익 민족주의자들의 군사조직인 ‘자유단’과 협력해서 그랬다. 이 탄압에는 스파르타쿠스 동맹의 탁월한 두 지도자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립크네히트 살해도 포함됐다.

바이마르공화국을 둘러싼 이러한 좌우 양극화는 처음에 1920년 3월 카프 쿠데타로 나타났다. 이 쿠데타는 노동계급 총파업에 부딪혀 실패했다.

1년 뒤인 1921년에는 공산당이 봉기(‘3월 행동’)를 일으켰지만, 역시 실패했다.

1923년, 공산당이 황금 같은 봉기 기회를 놓친 다음달인 11월 히틀러가 ‘맥주 홀’ 쿠데타를 기도했다. (이것도 실패했다.)

정치적 격변의 다음 라운드는 1929년 월스트리트 증시 대폭락 뒤에 찾아왔다. 1930년 3월 사회민주당 주도 ‘대연정’이 붕괴했다. 경제 공황에 대처하기 위한 대책들 ― 특히 실업수당 삭감 문제 ― 을 놓고 연정 파트너들과 합의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위기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가톨릭계 중도 정당 지도자 하인리히 브뤼닝에게 새 정부를 구성해 달라고 요청했다. 브뤼닝은 의회 다수파의 지지를 못 얻자 9월에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공표했다.

이 총선은 바이마르공화국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결과를 내놓았다. 비록 공산당의 득표가 4백50만 표로 1928년 선거 결과보다 40퍼센트 증가했지만, 나치의 득표는 같은 기간에 81만 표에서 6백40만 7천6백 표로, 즉 여덟 배로 증가했다! 나치는 군소 정당에서 일약 제2당이자 제1야당이 됐다.

1930년과 1931년 사회민주당은 프러시아주州 전역에서 나치의 집회를 금지시켰다. 프러시아주 정부는 나치의 으뜸가는 표적이었다. 1931년 나치는 합헌적 방법을 사용해 이 정부에 대한 불신임 국민투표를 선동했다.

프러시아주 정부는 베를린을 포함하고 있고 독일 인구의 3분의 2를 통치하고 있었는데, 프러시아주 경찰은 무장이 잘 돼 있었고 대규모였다. 사회민주당은 이 경찰력을 사용해 괘씸하게도, 1929년 메이데이에 베를린에서 공산당 주도 시위대를 향해 발포케 해 25명을 살해했었다.

공산당은 나치와 우익 민족주의자들이 호소한 국민투표에 처음에는 불참을 표명했다. 7월 중순까지도 견지되던 이 입장은 7월 22일에 바뀌었다.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나치의 사회민주당 비난 공세에 가담했던 것이다. 공산당은 그 국민투표를 ‘적색 국민투표’라고 불렀다!

공산당의 이러한 입장을 초좌파적 종파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딱 알맞다. 초좌파주의에 따라 공산당은, 히틀러가 경제 위기를 해결하지 못함을 대중이 깨닫게 되면 대중은 히틀러 지지를 철회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히틀러가 전쟁이라도 일으키면 혁명의 기회들이 주어질 것이라고 봤다. E.H. 카의 지적대로, 히틀러 집권 전이든 후든 이 시기에 공산당은 나치의 성장을 ‘혁명적 상황’의 무르익음을 나타내는 지표로 여겼다.

이러한 천박한 유물론 때문에 공산당은 또한 파시즘을 단순한 독재라는 관점에서만 봤지, 중간계급에 둔 그 대중적 지지 기반은 간과했다. 파시즘의 고유한 본질과 위협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공산당은 헤르만 뮐러에서 브뤼닝, 폰 파펜, 슐라이허에 이르는 정부들을 ‘파시스트 독재’(“금융자본의 대리인” 노릇을 하는)로 규정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나치의 위협을 특별히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히틀러가 이들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봤던 것이다.

사회민주주의는 파시즘의 일종?

스탈린이 파시즘의 부상 문제를 다룬 방식은 소련 자체 내 상황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928년 스탈린은 급속하고 강제적인 공업화와 농업 집산화에 착수했다. 당시에 스탈린은, 일부 시장경제 정책의 추진과 해외 사회민주당 좌파와의 제휴를 옹호하는 부하린과 분파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분파 투쟁에서 이기기 위해 스탈린은 코민테른 내의 부하린 지지를 약화시켜야 했다.

그 결과 스탈린은 1928년 코민테른 제6차 대회에서 정책을 급속히 변경시켰다. 스탈린은 독일이나 영국처럼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강력한 곳에서는 파시즘이 “사회파시즘이라는 특수한 형태를 취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회파시즘은 부르주아지를 위해 대중의 반파시즘 투쟁을 마비시키는 노릇을 한다.”

“파시스트 조직의 적극적 지지가 없으면 사회민주주의는 투쟁이나 국정 운영에서 결정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 이들 두 조직은 서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한다. 그들은 정반대의 사물이 아니라 쌍둥이다.”

그 같은 “파시스트적 방법들”을 통해 사회민주당이 노동계급을 궤멸시킨다고도 스탈린주의자들은 주장했다. 그 대표적 사례로 독일 공산당은 1929년 메이데이 때 자신이 주도한 베를린 시위를 사회민주당 소속 경찰청장이 유혈 진압한 것을 들었다.

“사회민주주의는 객관적으로 파시즘의 온건파다.” 이로부터 독일 공산당 지도자 에른스트 텔만은 “파시스트들의 온건파”를 먼저 타도할 때만 파시스트들과 싸울 수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 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더 나아가, 사회민주주의가 “자본주의적 국가가 파시즘으로 발전하는 데서 가장 능동적인 선도자이므로 주된 적”이라고까지 주장했다.

히틀러가 집권해 독일 노동운동을 분쇄한 뒤인 1933년 12월에조차 코민테른은 사회민주당이 “노골적인 파시스트 독재의 주된 사회적 버팀목”이라고 매도했다.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공산당의 성격 규정이 이 지경이니, 나치의 위협에 맞서 공산당이 사회민주당과 협력하는 것은 실천적으로 불가능했다.

공산당의 전술은 소위 “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이었다. 이것이 실천에서 뜻하는 바는 공산당이 주도하는 운동에 사회민주당 당원들은 개인 자격으로 동참하라는 호소였을 뿐이다.

공산당의 전술은 또한, 대개 사회민주당을 지지하는 노조 공식 지도부들로부터 분리된 독립 노조를 설립하라는 호소였다. 그러한 노동조합을 코민테른은 ‘적색 노조’ 또는 ‘혁명적 노동조합’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노동조합을 분리시키는 전술은 개혁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은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주력하라는 스탈린의 지령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1930년 말 독일노동조합총연맹(이하 독일노총)의 조합원 수는 거의 5백만 명이었던 데 반해 공산당의 혁명적 반대파 노조(RGO)는 15만 명 미만이었다.(독일노총의 겨우 3퍼센트 수준)

그렇다고 해서 공산당이 성장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공산당은 1920년대 말 12만 5천 당원에서 1932년 말 36만 당원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공산당의 당원은 절반이 실업자들이었다.

헌법

1930년 9월의 총선 결과에도 불구하고 이후 2년간 브뤼닝이 총리 자리에 계속 남아 있었다. 그는 주로 대통령 명령을 통해 통치하면서 임금 삭감, 복지 감축, 의회 권리와 언론 자유 제한 따위를 추진했다.

사회민주당은 힌덴부르크와 브뤼닝을 지지했다. 히틀러에 비하면 차악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 차악은 최악으로 가는 과도 체제였다. 힌덴부르크는 1932년 5월 브뤼닝을 사임시키고, 후임 총리로 프란츠 폰 파펜을 지명했다. 이 자는 히틀러와 은밀히 협상하고 힌덴부르크와 합의해, 프러시아주 사회민주당 정부를 해산시키는 대통령 명령을 발동했다.

사회민주당은 프러시아주 정부 해산이라는 대통령 명령의 합헌성에 사로잡혀 그냥 순순히 복종하고 해산당했다. 자신이 그동안 가장 강력한 반나치 보루라고 자랑해 왔던 프러시아주 정부와 주 경찰을 순순히 포기했던 것이다.

사회민주당은 또한 ‘라익스바너’라는 자체의 준군사 조직을 보유하고 있었다. 라익스바너는 투사들과 사회민주당 산하 스포츠단체 회원들과 청년단체 회원들 수십만 명을 동원할 능력이 있었다. 라익스바너는 곧 사회민주당의 다른 단체들과 통합돼 ‘강철전선’으로 확대 개편됐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은 라익스바너와 강철전선이 단지 방어용일 뿐이라며 나치가 헌법을 위반할 때만 그 조직을 사용하겠다고 고집했다. 그러나 그러한 때는 오지 않았다.

독일노총도 폰 파펜의 사실상의 쿠데타에 맞서지 않았다.

공산당은 총파업을 호소했다. 하지만 공산당이 똑같은 프러시아주 정부에 맞서 ‘적색 국민투표’를 요구했던 것을 모든 사람이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마당에 총파업 호소가 먹힐 리가 만무했다. 파업은 완전히 실패했다.

1930년 거리를 활보하며 힘을 과시하는 나치 돌격대(SA).

이에 자신감을 얻어 준군사적 폭력이 급증했다. 나치의 ‘돌격대’는 1932년 10만 명에서 1933년 40만 명으로 급성장했다. 돌격대의 가두 행진은 중간계급 대중의 눈에 역동적이고 전능한 운동이라는 인상을 줬다.

준군사적 폭력이 횡행하자 육군 참모총장 슐라이허 장군이 독일 정치에서 갈수록 큰 구실을 하게 돼 1932년 12월 총리가 됐다. 그러나 대기업들은 결국 1933년 1월 그를 히틀러로 교체하라고 힌덴부르크에게 압력을 가했다.

히틀러가 집권했을 때 대규모 노동자 시위가 일어났다. 하지만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히틀러가 합헌적으로 집권했다며 자기들의 소심함을 정당화했다. 그들은 히틀러가 위헌 행동을 할 때만 강철전선을 사용하겠다고 했었다. 독일노총 지도자들도 사회민주당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헌법상의 권리인 결사의 자유에 연연했다. 공산당은 총파업을 호소했지만, 또다시 실패했다.

이로써 바이마르공화국의 운명은 정해졌다.

히틀러는 돌격대와 친위대를 기존 경찰과 군대에 신속히 통합시킨 뒤 더는 헌법에 얽매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곧이어 독일 노동운동의 정당들과 노동조합들의 물리적 절멸이 뒤따랐다.

트로츠키의 비판과 대안

트로츠키는 공산당 지도부가 이처럼 파시즘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만일 파시즘이 집권하면 당신들[독일 노동계급]의 두개골과 등뼈를 무시무시한 탱크처럼 밟고 가버릴 것이다. 당신들의 구원은 무자비한 투쟁에 있다.”

그는 경제 위기 심화가 대중의 급진화를 부른다는 생각(천박한 유물론)에 반대했다. “물질적 조건들과 이데올로기적 조건들이, 국내적 조건들과 국제적 조건들이 복잡하게 결합되는 것에 따라” 계급투쟁은 성하고 쇠함이 있다. 이하는 트로츠키의 주장을 요약한 것이다.

“이례적으로 첨예한 간헐적인 격동, 이례적이고 급작스런 상황 변화가 특징인 현 시기에는 지도부가 올바른 지향성을 가져야만 할 비범한 의무가 있다.” 그러기 위해 지도부는 “전쟁과 혁명 사이에 있는 상황과 조건들을 냉정히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계급투쟁의 객관적·주관적 변화에 따라 전술을 변경할 수 있어야 한다.

소련 관료와 서방의 그 보좌 정당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또한 그들 스탈린주의자들은 파시즘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파시즘은 결코 보통의 독재가 아니다. 단순한 ‘예외’일 뿐이라며 스탈린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다같이 무시했던 이탈리아의 경험은 다음과 같은 점을 보여 준다:

“파시즘은 단순히 보복과 야만적 폭력과 경찰 공포의 체제가 아니다. 파시즘은 부르주아 사회 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요소들을 모두 근절해 버리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특별한 통치 체계다. 파시즘의 임무는 단순히 공산주의자 전위를 파괴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계급 전체를 강요된 불일치 상태에 놓아두는 것도 파시즘의 임무다. 이를 위해 노동계급의 가장 혁명적인 부문의 물리적 절멸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독립적·자발적 조직들도 모두 분쇄해야 하고, 프롤레타리아의 방어적 보루도 모두 파괴해야 하고, 75년 동안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조합이 성취한 것도 무엇이든 근절해야 한다.”

이 점에 비춰 보면, 코민테른과 독일 공산당이 사회민주당을 ‘사회파시스트’라고 부르는 것은 사회민주당과 나치의 근본적 차이를 흐려 버리는 것이다. 대자본은 시기에 따라 사회민주주의에도 의존할 수 있고, 파시즘에도 의존할 수 있다. 하지만 전자는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고 부르주아 의회정치 체제를 수호한다. 반면에, 후자는 중간계급의 지지를 받고 부르주아 의회정치 체제를 부정한다.

대자본은 일단 “내전의 방법들”을 사용하기로 결심하면 노동자 조직의 절멸을 위한 무기로서 “발광한 중간계급 대중”의 도움과 지원을 파시즘을 통해 구한다.

파시즘을 성공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공산당이 사회민주당과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것밖에 없다.

공동전선 전술들은 1920년대 초에 레닌과 트로츠키가 코민테른에 제안했던 정책이다. 그러나 지금 코민테른이 주장하고 있는 소위 “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은 투쟁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이 미리부터 공산당의 지도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관료적 최후통첩주의[초강경 비타협주의]”일 뿐이다.

공동전선은 또한 개혁주의 정당이나 노동조합의 지도자들과 선거 협정을 맺거나 의회 내 타협을 이루거나 공동 강령을 작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름만 공동전선일 뿐, 실제로는 인민전선으로서, 계급투쟁을 제한하거나 혁명가들이 개혁주의적 정당 또는 노조의 지도자들을 비판할 기회를 봉쇄하거나 제한한다.

진짜 공동전선은 “따로 행진하고 함께 타격하”는 것이다. “어떻게, 누구를, 언제 타격할 것인가에만 합의를 이루”면 된다. 1917년 8월 말 볼셰비키가 코르닐로프의 반혁명 군사 쿠데타를 패퇴시키기 위해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과 공동 행동을 했던 것이 좋은 사례다.

공산당 노동자들과 사회민주당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 방어 조직을 건설해 파시스트들에 맞서야 한다. 그러한 조직은 파시스트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뿐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내의 구별”을 분명하게 만들 것이다. 노동계급에 대한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약화될 것이다.

공동전선을 통해 혁명가들은 “대중의 눈앞에서 개혁주의 조직이 계급투쟁의 진정한 문제들과 직면하게 만든다. 공동전선 정책은 공산당의 혼란 조성 행위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의 의식적 훼방 놓기에 의해 공동 투쟁이 약화되는 것임을 드러냄으로써 계급의 혁명적 발전을 재촉한다.”

이 정책의 요체는 사회민주주의의 반혁명적 죄악을 폭로하고 규탄하는 데 주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투쟁 속에서 혁명가들이 사회민주주의적 노동자들과 단결함으로써 이들을 혁명가들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이다.

1930년대 초 독일에서 공산당이 사회민주당을 ‘사회파시스트’이자 ‘주적’으로 규정한 것은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는 것이었다.

인류에 대한 최악의 범죄인 홀로코스트를 낳은 나치의 집권.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대인들.

비극

비극이게도 트로츠키의 이러한 경고와 행동 제안은 사회민주당과 공산당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광야의 부르짖음이었다. 만일 트로츠키의 분석과 호소가 받아들여졌다면 이후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독일 프롤레타리아의 전례 없는 패배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의 권력 장악 이래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독일의 현재 대재앙은 의심할 나위 없이 역사상 노동계급의 최대 패배다.”

그러나 독일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한 번도 조직원 수가 6백 명을 넘은 적이 없었다. 반면에, 독일 공산당은 1931년 당시 20만 6천 명이었다. 그리고 공산당이 얻은 득표 수는 1932년 11월 5백90만 표였다. 1927년 당시 공산당은 36종의 일간 신문을 발간했고 사회민주당은 1백88종의 일간신문을 발간했다. 사회민주당 당원 수는 1백만 명이 넘었고, 신문 정기 구독자 수는 1백18만 8천4백 명이었다.

작은 톱니바퀴가 큰 톱니바퀴를 돌릴 수는 있지만 그 불비례성이 너무 크면 불가능하다. 여기에 1930년대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진정한 비극이 있었다. 그리고 이 비극은 독일 노동운동의 비극, 더 나아가 인류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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