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자들은 종교에 관해 무지해선 안 된다. 국내 상황만 보면 종교가 부흥하고 있는 듯하지 않다. 적어도 주요 종교는 그렇다. 개신교는 교세가 감소하고 있고, 불교는 정체하고 있고, 가톨릭 교회는 근래까지 급성장을 하다 요즘 성장세가 둔화하고 있다. 특히 개신교는 다수 지도자들의 부패, 보수성,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성, 내부 분열, 그리고 이명박 같은 우익 정치인들과의 유착 같은 문제들 때문에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적 차원에서는 종교 문제가 중요하다. 여러 믿을 만한 보고서들이 각종 경험적 지표를 들어 세계적으로 종교가 부흥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세속화로 종교의 영향력이 약해질 거라고 봤던 세속화론과는 다르게 오늘날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왜 종교가 부흥하고 있는가? 첫째, 시장의 확대를 이유로 들 수 있다. 30년 이상 지속된 신자유주의 공세로 대중의 삶이 아주 힘들고 고통스러워졌다. 이런 때 그런 고통받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고집스러운 교리나 배타주의적인 정체성에 집착한다고 해서 그렇게 신기한 일은 아니다. 이슬람은 물론이거니와 순복음교회 류의 오순절계 기독교 종파들, 또는 종말론이나 예정론 등을 강조하는 숙명론적인 기독교 종파들도 신자가 늘고 있다.

선진국 가운데는 유독 미국에서 종교가 부흥했다. 지난 30년 사이에 세계경제는 부진했는데 특히 미국은 실질임금이 아예 감소했다. 바로 이런 가장 냉혹하고 비정한 형태의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혔기 때문에 미국에서 종교가 부흥한 것이다. 

중국도 종교가 급성장하고 있다. 한 세대 만에 세계 최빈국에서 세계 제2위 경제 규모의 경제 대국이 되기까지 온갖 사회 문제들이 발생했다. 극단적인 빈부 격차, 극단적인 도농 격차, 극단적으로 나쁜 노동조건, 극단적인 환경 파괴, 그리고 세계 최고 수준의 사형 집행률로 대표되는 혹독한 억압 등 각종 ‘극단’들을 매우 많이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해마다 2백만 명이 복음주의 기독교에 입교하고 있다. 그래서 조만간 중국에서 기독교인은 전체 인구의 5분의 1인 3억 명이 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아시아의 다른 지역인 중앙아시아, 러시아, 또 아프리카 같은 지역에서도 기독교는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슬람교는 더 빠른 속도로 전 세계에서 성장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적인 수준에서 종교가 부흥하고 있는 둘째 이유와 관계 있다. 즉, 제국주의의 득세 문제다. 특히,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 또 이란 위협 같은 제국주의적 공세에 대한 반발로 급진적 이슬람이 성장했다. 

급진적 이슬람은 중동 등지에서 무슬림을 공격하는 똑같은 서방 제국주의자들이 자국 내에서도 이민자를 차별하려고 이슬람·무슬림 때리기를 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서구에서도 성장했다. 

“새 무신론”

그러한 친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대변자들이 바로 크리스토퍼 히친스와 샘 해리스 같은 자들이다. 그들은 그냥 이슬람 매도만 하는 게 아니다. 이슬람 비판만 한다면 아무도 그들의 말을 안 믿을 테니까 연막을 치려고 기독교 등 다른 종교까지 다 싸잡아 공격한다.

도킨스라든가 대니얼 데닛 같은 과학자들도 가세한 그들은 “새 무신론자들”로 불리며 우파에게 유용한 연막 구실을 하고 있다. 새 무신론자들의 종교(특히 이슬람) 때리기는 서구 지배자들의 국내외 무슬림·이슬람 마녀사냥을 측면 지원해 왔던 것이다. 그들의 저작들은 지난 십여 년 사이에 급속하게 판매가 늘었다.

도킨스와 히친스 등 새 무신론자들의 종교 비판은 엘리트주의적이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왜 종교에 매력을 느끼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이해하려는 자세도 보이지 않는다. 

사실 그들은 종교 자체에 관해서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종교가 만악의 근원이고 그저 거짓된 사상·허위의식일 뿐이라고 본다. 그리고 무신론적인 논박으로써 종교를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종교가 왜 대중에게 호소력이 있는지, 즉 종교의 사회적 원인이 무엇인지를 완전히 간과하는 관념론적 관점이다. 

도킨스와 히친스 등은 과학을 동원해 신의 부재를 증명하고자 애쓴다. 그래서 그들의 입장은 유물론처럼 보일 수 있다. 도킨스는 생물학자로, 어떤 사람들은 도킨스를 ‘과도한(hyper-) 다윈주의자’라고 부른다. 환원론적인 조야한 진화론자라고 규정한 셈이다.

사실, 과학이 신의 부재를 증명한다는 생각은 저속하고 천박한 유물론일 뿐이다.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은 이와 다르다. 역사유물론은 신의 부재를 증명하려 (헛되이) 애쓰기보다는 신 존재에 대한 믿음의 원인을 설명한다. 

역사유물론의 요체는 인간의 의식이나 사상이나 관념 — 신 관념 자체를 포함해 — 등이 물질 세계로부터 비롯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 무신론자들”처럼 종교의 교리를 논의하는 게 종교 이해의 좋은 출발점은 아니다. 

사회적 맥락에 대한 분석을 통해 종교를 보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적 인식 방법의 특징이고, 이것이 종교 이해의 가장 좋은 출발점이다. 이런 역사유물론적 방법을 종교에 적용한 뒤에야 비로소 심리학이나 철학 등 다른 접근법을 통한 분석에서 유용한 통찰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가령 약 2,500년 전경 고대 근동지역에서 일어난 (다신교에서 유일신교로) 신 관념의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당시에 철제 농기구의 광범한 보급으로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대하자 교역과 도시가 급속히 발달했다. 그에 따라 사상들의 융·복합이 이뤄져 새로운 사상, 새로운 사고방식, 새로운 일처리 방식이 등장했다. 뿐만 아니라, 미개 부족들이던 시대엔 상상할 수 없었던 하나의 공통된 인간성이라는 관념이 보편화됐다. 그러자 신 관념도 미개 부족의 토템 신앙이나 정령 신앙(자연계의 모든 사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을 반영하는 많은 신이라는 관념보다는 모든 인간과 모든 사물을 관장하는 유일신이라는 관념이 당시의 새로운 세계관과 친화성 있는 것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인민의 아편”?

물론 마르크스의 종교관 하면 대뜸 사람들은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부터 떠올린다. 필자는 마르크스의 종교관을 언급하는 학자들이나 언론의 글에서 마르크스의 이 말을 거두절미하지 않고 앞뒤 문맥에 비춰 제대로 설명하는 글을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러나 아편은 오늘날 끔찍하고 무시무시하게 느껴지지만 마르크스 시대에는 합법적이고 저렴하고 가장 효과적인 진통제였다. 마르크스 자신도 종기 같은 피부병 때문에 자주 고생해, 아편을 자주 복용했다, 당시 노동계급에게는 아편이 종종 필요했다. 

그러므로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현대식으로 옮기면 종교는 ‘대중의 타이레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마르크스 말의 앞뒤 문맥을 살펴보자. 

“인간의 본질이 참된 실재를 획득하지 못했으므로 종교는 인간 본질의 환상적 현실화다. 그러므로 종교에 반대하는 투쟁은 간접적으로는, 그 영혼의 향기가 종교인 세계에 반대하는 투쟁이다. 종교의 고통은 현실의 고통을 표현하는 것이자 현실의 고통에 대한 항의이기도 하다. 종교는 천대받는 사람들의 탄식이요, 몰인정한 세계의 인정이요,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다. 종교는 대중의 아편이다. 행복에 대한 환상을 대중에게 주는 종교를 폐지한다는 것은, 대중의 현실 행복을 요구하는 것이다. 자신의 조건에 대한 환상을 버리라고 대중에게 요구하는 것은 환상이 필요한 조건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비판은 종교와 그 후광인 현세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위의 인용문을 보면, 마르크스가 종교를 일축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교를 경멸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사회적 원인을 지적하는 구절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구절이 포이어바흐나 브루노 바우어 같은 마르크스 당시 계몽주의자들의 종교 비판을 염두에 두고 쓴 것임을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계몽주의자들의 종교 비판은 종교 지도자들이 대중의 머리에 교리를 주입하고, 대중이 그에 순응하므로 종교가 계속 존속하는 것이라고 본다. 종교 지도자들이 대중을 속여 신앙을 갖게 만든다는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인 것이다. 

오늘날에는 바로 크리스토퍼 히친스나 리처드 도킨스 같은 사람들이 바로 계몽주의의 계승자들이다. 그래서 만약 마르크스가 오늘날 되살아나서 이 말을 한다면, 그것은 도킨스와 히친스에게 일갈하는 것이라고 읽는 것이 마르크스의 말을 가장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종교에 관해 꼭 알아야 할 세 가지

마르크스의 말을 좀 더 분석해 보면 세 가지 점을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종교의 매력은 마르크스가 ‘소외’라고 부른 사회적 조건 때문이다. 

둘째, 종교를 인위적으로 억압해선 안 된다. 

셋째, 종교는 현실의 고통에 대한 항의다. 

이를 차례차례 살펴보자. 

첫째, 종교의 호소력은 인간 소외 때문이다. 역사유물론의 핵심은 인간의 관념이 인간의 사회적 조건에서 나온 것이지, 인간의 사회적 조건이 인간의 관념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관념, 사상, 통념, 이데올로기 등은 바로 우리가 처한 사회적 조건에서 비롯한 것이다. 따라서 종교는 인간이 만든 것이다. 인간이 종교를 만든 것이라면 종교를 분석하는 출발점은 하늘이 아니라 이 땅이 돼야 한다. 여기,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 바로 종교 분석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또한 인간이 종교를 만들었다는 것은 여기, 땅에서는 소망과 갈망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인간이 꿈과 희망을 다른 곳에 둔다면, 즉 땅이 아니라 하늘에 둔다면 그것은 꿈과 희망이 현세에서 현실화되지 못한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가 존재한다는 것은 소외의 징후인 것이다. 

소외 때문에 사람들은 무력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확실성과 강렬함, 제어력을 제공하는 듯한 신앙에 끌린다. 그래서 긍정과 번영을 약속하는 종류의 신앙이나 종말론, 정통 칼뱅주의(특히 예정론), 신비주의 등에 많이 끌린다. 

대중은 또한 경쟁과 배제와 차별과 편견 등으로 점철된 사회에서 위안을 갈구한다. 공동체 귀속감을 갈구하고 연대감을 느끼고 싶어 한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 신앙은 어떤 면에서는 정의와 인간적인 관계에 대한 갈구를 표현하는 것일 수 있다. 특히, 부당하고 억울하게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종교에 끌릴 수가 있다. 이 경우 종교는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사람들의 염원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종교를 인위적으로 억압해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는 환상이 필요한 조건이 없어져야 비로소 종교도 사라질 수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해, 소외와 천대, 차별이 사라질 때만 신앙도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를 행정적으로 탄압하는 것은 되레 신앙을 굳게 지키는 효과만을 낸다. 예를 들어, 프랑스 국가가 공공 장소에서 히잡이나 부르카를 착용하는 것을 금지하기로 했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프랑스 좌파의 태도는 반동적이었거나 기껏해야 모호했다. 

반면 레닌은 “국가는 종교에 간섭하지 말아야 하고 종교단체가 국가에 매어서도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누구든 자기가 좋아하는 종교는 어느 것이든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무종교임을, 무신론자임을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사회주의자가 보통 그렇듯이 말이다.” 

진정한 사회주의자라면 신앙 생활을 할 자유, 특히 천대받는 종교 집단의 신앙의 권리를 옹호해야 한다. 가령 한국에서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양심적 병역 거부를 방어하고 그들의 종교적 권리를 옹호해야 한다. 

셋째, 종교는 현실의 고통에 대한 항의다. 이 점은 해방신학과 민중신학, 불교 사회주의, 이슬람주의 등 급진적 종교사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종교는 사회 모순들의 해결책을 내세로 투사하기도 하지만, 또한 어떤 상황에서는 사회운동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예컨대, 16세기 독일 농민 전쟁과 17세기 영국 혁명 같은 위대한 사회적 투쟁들이 지상에 신의 나라를 세운다는 대의명분에 의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됐다. 이와 비슷하게, 오늘날 일부 사회운동들도 위에서 언급된 급진적 종교사상들에 의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이번에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도 박근혜 사퇴를 촉구하면서 바로 똑같은 이념 — 하느님 나라의 현실화 — 을 표방했다.

이것은 앞서 우리가 보았듯이 종교가 인간 소외라는 사회적 조건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외는 단지 하층 민중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다. 소외는 사회의 상층 계급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물론 그 영향의 정도는 훨씬 작지만, 영향을 미치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단지 사회 하층민들만이 종교에 의지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 상층 사람들도 종교에 의지할 수 있다. 

보수와 진보로 나뉘다

그런데 종교계 지도자들은 사회의 상층 인물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염수정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겸 대주교 같은) 종교계 지도자들은 대중의 염원과 유대감 추구를 기존 체제를 정당화하는 사상과 뒤섞어 물타기를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종교는 부당한 세계에 대한 반대와 동시에 부당한 세계와의 화해도 함께 표현한다.  

예를 들면, 신약성경 루가복음 6, 20-25를 보면 이렇게 씌어 있다. “행복하여라, 당신들 가난한 사람들. 하나님 나라가 그대들 것이니. … 불행하여라, 부자들. 이미 위로를 받았으니!” 엄청난 계급 증오가 표현돼 있다. 그러나 똑같은 텍스트가 마태오복음 5장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당신들 것이니.”라고 변형돼 있다. “마음이”라는 말을 슬쩍 끼워 넣은 것이다. 

이렇게 종교에는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되는 애매모호함이 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사회 세력이나 정치 세력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희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의 애매모호함을 이용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종교는 종교대로 이 애매모호함 덕분에 다양한 계급적 이익과 정치적 계획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지배 계급에게도 매력을 줄 수 있고, 천대받는 계급에게도 매력을 줄 수 있다. 그래서 똑같은 종교를 가진 두 집단이 서로 반목하고 적대하고 심지어 살육한 사례가 역사상 비일비재하다. 

이렇게 종교는 어떤 맥락 속에, 어떤 상황에 처해 있고 그 상황에 어떻게 반응했느냐에 따라 색조가 달라진다. 

무릇 종교에 중의성과 양면성이 있으므로 종교단체는 대부분 정치적으로 보수파와 진보파로 나뉜다. 물론 그 중간적 경향도 존재한다.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은 신의 이름으로 박근혜를 찬양·고무한다.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도 종교적인 언어와 상징으로 급진적이거나 개혁적인 사상을 표현한다. 가령 위에서 예시된 급진적 종교사상들이 그런 사례다.  

그래서 근본주의만이 기독교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고 또 바티칸만이 가톨릭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종교를 싸잡아 매도하는 태도를 삼가야 할 것이다. 물론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종교단체나 신앙인을 선호해야 한다. 

교리를 기준으로 특정 신조 체계야말로 ‘예수를 배반한 기독교’와 대비되는 ‘진정한’ 기독교라느니, ‘진정한’ 불교라느니 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경전이나 전통이 이렇게도 해석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심지어 교리상 복음주의적인 기독교 내에서도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경향이 일부 발전하고 있다. 

이렇게 진보적 종교 운동이 성장하게 되면 기존의 보수적 종교 지도자들과 충돌을 빚게 된다. 특히, 운동에 참여하는 종교인들은 현세의 정의를 더 중시하는 데 반해 기성 종교인들은 내세의 정의를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사회 변화를 위해 싸우는 세속적 운동가들은 세계관이나 철학의 차이, 이론의 차이를 이유로 투쟁에 참여하는 종교인들을 배척해선 안 된다. 세속적 좌파와 종교적 좌파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맞서 함께 싸워야 한다. 

맺음말

마르크스주의자와 신앙인 사이에 차이가 없는 척하지는 않겠다. 두 사람이 같은 편에서 투쟁을 하더라도 마르크스주의의 고유한 방법, 특히 역사유물론을 신앙인이 전폭 수용하기는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역사유물론의 도움이 없으면 종교는 사회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나 사회 변화를 위한 효과적 전략을 내놓지 못한다. 그래서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은 마르크스주의로부터 그런 분석법, 역사유물론적 분석 방법을 과감히 빌렸다. 그럼에도 역사유물론의 핵심, 즉 종교 사상이 — 신 관념 자체도 — 사회의 물질적 조건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그 결과 해방신학의 급진적인 버전조차 낙태나 동성애나 가정 가치관과 관련된 문제들에서 역사유물론적 분석이 아니라 생명에 관한 형이상학적 교리에 기대어,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뿐만 아니라 해방신학이 지난 20여 년 사이에 조금씩 온건해져 개혁주의적이 됐다는 점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에서 비롯한 일이다. 

사회 변혁을 위한 전략은 《공산당 선언》 이래 지난 1백60여 년에 걸친 국제 사회주의 운동의 경험을 일반화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가 제공해 줄 수 있다. 

다가올 천국을 예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상의 지옥을 분쇄하기 위해서 진보적 종교인과 사회주의자는 단지 광범한 대중 운동 속에서뿐 아니라 노동자연대다함께 같은 반자본주의적 노동단체 안에서도 함께 싸울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필자가 지난여름 맑시즘2013에서 한 강연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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