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프랑스 하원은 모계나 부계 성씨 또는 둘을 연결한 이중 성씨 중 하나를 부모가 선택해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가족성씨법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프랑스 정부는 이번 성씨법 개혁안을 2002년까지 완성할 것을 약속했다. 이렇게 될 경우 프랑스는 부계 성씨 자동 대물림 국가의 대열에서 벗어나게 된다.

프랑스 성씨법 개혁안 통과 소식은 그 동안 호주제 폐지를 요구해 온 우리 나라 여성 단체들에게 반가운 소식이다. 부계 혈통 위주의 호주제에 항의하는 표시로 몇 년 전부터 부모 성 함께 쓰기 활동을 해 온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비아냥거림이 쏟아졌던가.

아버지 성씨만을 물려줘야 한다는 생각은 성차별적 편견이다. 1994년 이래 유럽 인권재판소는 아버지 성씨만을 대물리는 것은 차별이라고 판정했다.

얼마 전 법안이 통과된 프랑스를 제외하면, 현재 유럽에서 부계 성씨를 자동으로 대물림하는 국가는 이탈리아와 벨기에 두 나라뿐이다.

영국 법은 아버지나 어머니 성씨, 부부가 원하는 순서로 연결한 이중 성씨는 물론 다른 어떤 성씨든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심지어 성인이면 누구나 자유롭게 성씨를 바꿀 수 있다.

물론 이번 프랑스 가족 성씨법 개혁은 실질적인 평등 조치이기보다는 상징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평등주의를 표방하는 조치들은 설사 상징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실질적인 평등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 힘을 실어 준다.

호주제도 이와 비슷하다. 호주제는 비록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억압받는 주된 양상은 아니지만 여성 차별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제도다.

이것은 지난 수십 년 동안 호주제 폐지에 결사 반대해 온 자들이 유림 같은 지독한 성차별주의자라는 데서 뚜렷이 드러난다.

유림 측을 대변하는 한국씨족공동체연합 부총재 구상진 변호사는 호주제 폐지에 반대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남자와 여자는 출발부터 다르기 때문에 가정 내 남녀의 역할이 같지 않다는 전제에서 시작해야 하므로 가족 관계에서 남녀 동등이라는 말은 성립이 안 된다."

이들은 호주제가 '미풍양속'이라며 폐지에 완강히 저항한다.

그러나, 현재의 호적법과 호주제는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지 조선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조선의 유교적 관습과 결합시켜 도입한 제도다. 일제는 호주를 통해 '가(家)'를 파악하고 징병, 징세, 독립군 색출에 이용했다.

현행 호주제가 조선 시대 때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조선 시대 호주와 오늘날의 호주가 갖는 지위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오늘날 호주는 가족 구성원을 통제하는 권한을 갖기보다는 다분히 허상적인 것이다. 이것은 현대 가족의 성격 ― 더 이상 생산의 단위가 아니라 소비 단위라는 ― 때문이다. 수차례의 가족법 개정을 통해서 호주가 갖는 권한과 의무도 대폭 축소됐다.

그러나 여전히 호주제는 성차별의 상징적인 제도로 남아 있다. 현행 민법에서 호주 승계시 남성에게 우선권을 주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다. 현행법상 호주 승계의 순서는 아들, 딸, 아내, 어머니 순이다.

부계 혈통을 우선시하는 호주제에 따라, 여성이 이혼하면 자녀를 자신의 호적에 올릴 수 없고 자녀의 성도 바꿀 수 없다.

이러한 성차별적 호주제는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남아 선호 관습을 부추긴다. 남아 선호 풍조는 1996년 출생 성비가 여아 1백 명 당 남아 111.7명(둘째, 셋째로 내려갈수록 성비불균형은 더 심해진다)일 정도다. 대를 잇기 위해서 남자 아이가 필요하다는 통념에 따라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엄청난 압력에 시달리고 있는가.

호주제는 법 앞의 평등이라는 형식적 민주주의에도 위배된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따르면, 호주제를 명문화하고 있는 나라는 우리 나라뿐이다. 애초에 우리 나라에 호주제를 도입했던 일본조차 1948년에 호주제를 폐지했다.  

호주제 같은 낡은 유물은 즉각 폐기 처분돼야 한다. 여성부를 신설해 놓고 호주제조차 폐지하지 않는다면 김대중 정부는 위선 한 가지를 더하는 셈이 될 것이다.